己卯錄補遺卷[上] 己卯錄金正國撰補遺安璐撰
윤구 전(尹衢傳)
尹衢乙卯生。字亨仲。癸酉進士。丙子及第。以禮曹佐郞被罪。丁酉復敍。
稗官小錄云。尹橘亭嘗製爲義帝發喪論。一時傳誦。後羅參判世纘朝京師。得鄕試錄。橘亭論載在其中。考官批云。何地不生才。蓋非兩廣則西北之試也。不知此論何從而入耶。
補。左議政金應箕因臺諫駁箚。累朔請免得允。公以注書命往卜相于領議政鄭光弼右議政申用漑等第。而還詣政院。承旨朴世熹逆問曰。今日卜相。必安塘爹爹耶。公唯唯而後復命曰。領相臣鄭光弼議曰。論處心行事。唯安塘爲最。右相臣申用漑議曰。若言職次。則有金銓李繼孟。然安塘宜當。遂以塘爲相。禍作後。時宰以爲前日卜相時。申文景公薦李繼孟。而公聽朴世熹之言。變辭復命。推問以及世熹。而欲加罪。止罪公。退居桑鄕海南地。及復敍。爲全羅都事。時觀察使尹漑自以同年。叨居方伯謙抑。常以便服。往話于南廳房。巡到潭陽。監司與都事府使李俔。設小酌語及前事。公曰李繼孟不拘行檢。時議短之。安得擬議於卜相之列。只與申文景爲酒朋相許。國人共知故爲歸咎而欲加罪而晦。幸爲 聖明洞照。只罪臣而已云。未幾卒。子弘中毅中俱捷文科。毅中官貴。
윤구는 을묘생이고 자(字)는 형중(亨仲)이다.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고 병자년에 급제하였다. 예조 좌랑으로 있다가 죄를 입었으나, 정유년에 다시 서용되었다.
패관소록(稗官小錄) : 윤귤정(尹橘亭 윤구의 호)이 일찍이 의제(義帝)를 위해 발상(發喪)하는 논문(論文)을 지었는데 온 세상에 전해졌다. 뒤에 참판(參判) 나세찬(羅世纘)이 북경에 가서 《향시록(鄕試錄)》을 보니 귤정이 지은 논문이 그 중에 실려 있었다. 고관(考官)이 비평하기를, “어느 곳이라도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으리오마는 양광(兩廣 중국의 광동성과 광서성)이 아니면 서북 지방의 과시(科試)였을 것이다.” 하였는 바, 이 논문이 어느 경로를 좇아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보유 : 좌의정 김응기(金應箕)가 대간이 논박한 차자로 인해 여러 달을 두고 면직되기를 청해서 윤허를 얻었다. 공이 주서로서 왕명을 받들고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 신용개(申用漑)의 집에 가서 복상(卜相 정승될 만한 사람을 고름)하고 정원에 돌아왔다. 승지 박세희(朴世熹)가 맞이하여 묻기를, “오늘 복상된 사람은 반드시 안당(安塘) 어른이겠지.” 하였다. 공이 공손하게 대답한 뒤에 복명(復命)하기를, “영의정 정광필은, ‘마음가짐과 일처리하는 것은 오직 안당이 첫째다.’ 하였고, 우의정 신용개는, ‘만약 직책의 차례를 말한다면 김전(金銓)ㆍ이계맹(李繼孟)이 있지마는 안당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하여, 드디어 안당을 정승으로 삼았다. 사화가 일어난 뒤에 당시 재상이 ‘전일 복상할 때에 신 문경(申文景 신용개) 공은 이계맹을 천거하였는데, 공이 박세희의 말을 듣고 말을 다르게 복명하였다.’ 하여 추문하고, 박세희까지 죄주고자 하였으나 공을 죄주는 것만으로 그쳤다. 고향인 해남(海南)에 물러가서 살던 중 다시 서용되어서 전라도 도사(都事)로 되었다. 그때 관찰사는 윤개(尹漑)였는데, 동년(同年)으로서 방백(方伯) 자리에 있다 하여 겸손해하여 항상 편복(便服)으로 남청방(南廳房 도사가 있는 방)에 가서 이야기 하였다. 순찰하면서 담양에 이르자 부사 이현(李俔)이 감사와 도사에게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야기가 지난 일에 이르자 공이 말하기를, “이계맹은 행검을 단속하지 않아서 당시 논의가 단점으로 여겼는데, 어찌 복상하는 서열에 논의될 수 있으리오. 다만 신 문경과 술벗이어서 서로 허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아는 까닭으로 나에게 허물을 돌리고 죄를 더해서 숨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성상께서 통촉하시어 다만 나에게만 죄주었을 뿐이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아들 윤홍중(尹弘中)ㆍ윤의중(尹毅中)이 아울러 문과에 장원하였는데, 윤의중은 벼슬이 영귀(榮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