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및 파조 소개
1. 시조 소개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는 윤존부(尹存富)이다.
해남윤씨(海南尹氏)는 고려중엽에 이미 발상(發祥)한 고족(古族)이나 황공하게도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를 비롯한 선계7세(先系七世)는 관력(官歷)과 배위급묘소(配位及墓所)를 거의 실전(失傳)하였으며, 고려말(麗末)에 이르러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 광전(光琠)께서 대호군공(大護軍公) 단봉(丹鳳)과 소윤공(小尹公) 단학(丹鶴) 두형제를 두신 후로 지금까지 6백여년 동안 자손이 번창하여 8파(八派)를 형성하고, 강진(康津) 해남(海南) 영암(靈巖) 장흥(長興)등 여러 고을에 집단세거(集團世居)하면서 문장도덕(文章道德)과 충효절의(忠孝節義)가 세세환혁(世世煥爀)하여 호남망족(湖南望族)의 반열(班列)에 오르니 오로지 열선조적후여음(列先祖積厚餘蔭)의 비호(庇護)하신 소치(所致)다.
2. 파조 소개
파조(派祖)이신 귤정공(橘亭公)의 휘는 구(衢)요 자(字)는 형중(亨仲)이요 호는 귤정(橘亭)이다. 고려조(高麗朝) 휘 존부(諱 存富)께서 시조(始祖)이시다. 7대를 내려와 휘 광전(諱 光琠)께서 사온직장영동정(司醞直長令同正)이요 휘 단학(諱 丹鶴)을 낳으시니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냈고,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며 중시조(中始祖)이시다. 증조(曾祖)의 휘는 사보(思甫)이니 행사직(行司直)으로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고 조(祖)의 휘는 경(耕)이니 사간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고 고(考)의 휘는 효정(孝貞)이요 호는 어초은(漁樵隱)이니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호학적선(好學積善)하여 후학들을 교도(敎導)하시니 문교(文敎)가 크게 천명되었다.
이분이 어초은공파 파조(派祖)이시다.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부모 공양하기도 어려운 실정인데 미곡을 풀어내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이와같이 하기를 세번이나 하여 세번 옥문을 열어준 덕으로 세상에서 경앙(景仰)하는 바가 되었다. 호조참판(户曹叅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고, 비(妣)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 귀영(貴瑛)의 여(女)이다.
연산(燕山) 을묘년에 공(公)을 탄생하시니 타고난 성품, 재주가 특별히 뛰어났고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 저녁으로 곁에서 보살피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중종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중종 병자년에 문과 을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으며 기묘년에 홍문관부수찬(弘文舘副修撰) 지제교겸경연검토관(知製敎兼經筵檢討官)에 춘추관기사관(春秋舘記事官)에 임명되었다.
이퇴계 (李退溪), 유미암(柳眉岩)과 같이 호당(湖堂)에 피선(被選)되어 조정암(趙靜菴)과 종유 (從遊)하니 경륜지재(經綸之才)와 문장절행(文章節行)을 사림들이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았다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와 나재(懒齋) 유성춘 (柳成春)과 이름을 나란히 하니 세상에서 호남삼걸(湖南三傑)이라 칭송하였다.
공이 지은 의제발상론(義帝發喪論)은 그 문장이 해박하고 사물을 널리 분별하여 대단히 훌륭하므로 중국에까지 유입되어 일시에 전송(傳誦)하는 자들이 송연(竦然)히 그분을 상상케 되었으며 예조좌랑(禮曹佐郎)으로 재직시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은사(謝恩使) 김참판 세필(金參判 世弼) 민이백(閔耆伯)과 함께 연경(燕京)에 갔을 때에 중국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와서 보고 기필(期必)하여 말하기를 "귤정선생은 사림의 흠앙(欽仰)한 바 됨이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순명독실(純明篤寶)한 군자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경진년에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벼슬을 빼앗기고 해남녹산역(海南祿山驛)으로 유배되었다. 중종 무술년에 승정원에 전하기를 직첩(職牒)을 환급토록 하고 이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 배수하였다. 임기만료로 교체하여 신축년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제수되니 관아의 문에 지체된 송사가 없고 덕정(德政)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중종 계묘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이 절도에 지나쳐 거의 멸성(滅性)의 지경에 이르렀다 복을 마치고 명종 을사 십이월에 홍문관부교리(弘文舘副校理)에 배수되었다가 곧이어 교리에 올랐다. 노모가 계시므로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니 그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여러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영진(榮進)에 전혀 뜻을 두지 아니하였다.
날로 최산두, 유성춘 양공과 임석천(林石川) 신영천(申靈川) 박눌재선생(朴訥齋先生)과 종유하며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자질(子姪)을 교도하여 집안에 충효(忠孝)를 전하였다. 산수에 노닐며 시를 읊조리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여 임천(林泉)의 낙으로 삼았다.
명종 기유 정월에 모부인상(母夫人喪)을 만나 슬퍼함이 예에 지나치고 상례(喪禮)를 집행함에 있어 지나치게 엄격히 하시다 심히 수척하여 병이 나서 12월 24일에 졸하니 향년 55세이다.
아드님이 귀하게 됨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에 홍문관예문관대제학(弘文舘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춘추관사(知成均館春秋舘事)로 증직되었고 묘는 해남군 북일면 갈두리 산갑좌원(山甲坐原)에 모셨다.
배(配)는 증정부인 평택임씨 진사휴(進士畦)의 여(女)이신데, 갑인년에 나서 명종 무오 8월 14일에 졸하니 묘는 합장을 하였다. 2남1녀를 두었는데 남 홍중(男 弘中)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郎)과 영광군수로 증예조판서(贈禮曹判書)요. 의중(毅中)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이요 여(女)는 광산 이중호(李仲虎) 감사에게 시집갔다.
후배(後配)는 증정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 판서재후(判書載休)의 여인데 연산 경신년에 나서 명종 기미 10월 16일에 졸하니 묘는 삼산면(三山面) 상가리(上駕里) 백암동지좌원(白岩洞子坐原)이다. 1남 공중 (恭中)을 두었는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증호조참판 (贈户曹參判)이다.
장남 홍중은 무육(無育)하여 질 유기(姪 唯幾)가 사자(嗣子)가 되었고 차남 의중은 3남 3녀를 두니 남 유심(男 唯深)은 장단부사(長湍府使)요, 유기는 관찰사(觀察使)인데 백부의 후(後)로 출계(出系)하였고, 유순(唯順)은 봉사(奉事)요, 여는 윤공(尹鞏) 참의(參議)와 신식(申湜)과 최덕명(崔德明) 주부(主簿)에게 각각 시집갔다. 삼남 공중은 6남 5녀를 두었는데, 남 좌(佐)는 수문장(守門將)이요, 척(倜)은 훈도(訓導)요, 현(俔)은 판관으로 증호조참판이요, 검(儉)은 현감으로 증호조참판이요, 건(健)은 훈련원부정이요, 우(佑)는 만호(萬户)요, 여는 이진(李津)과 박안조(朴安祖) 만호와 박부경(朴無競)과 이진(李振)과 박지봉(朴之鳳)에게 각각 시집갔다.
아, 훌륭하도다. 공의 문장행의와 효행탁절(孝行卓節)이여 백세의 사표(師表)가 되시었다. 숙종 경신에 본도사림(本道士林)들의 건의(建議)로 인하여 해촌서원에 매향(配享)하게 되었다.
3. 본관 유래
본관을 처음 사용하게된 연유는 12세인 어초은공 효정께서 강진 덕정동에 거주하시다가 해남으로 거처를 옮겨 임우리, 유희춘 등과 같이 금남 최부선생에게 수학하던중 과거시험인 사마시(1501년)에 시권을 접수하면서는 '해남(海南)'이라는 본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2년 후인 어초은공의 장자이신 귤정공 구(衢)께서 과거시험인 1513년(중종8) 생원시급제자 명부인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보면 "윤구 생년을묘(1495, 연산1) 본관 해남 거주지 해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제분의 시권에 본관을 분명히 명시한 것이다.
따라서 해남(海南)이라는 본관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501~1513년(중종 8)이며, 어초은공에 의하여 본관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어초은공은 출사(出仕)를 하지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호학적선(好學積善)하여 후학들을 교도(敎導)하시니 문교(文敎)가 크게 천명되었고, 삼개옥문(三開獄門)의 덕(德)을 베풀었으며, 자손들이 중앙관직에 진출하면서 명실공히 호남명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 본관 연혁
해남(海南)은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마한 때에는 구해국(狗奚國)이었다고 한다. 538년(백제 성왕 16)에 새금현(塞琴縣)이라 불렸고, 757년(신라 경덕왕 16) 침명현(浸溟縣)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康津)의 관할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해남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암군(靈巖郡)에 속하였다. 1018년(현종 9) 영암군(靈巖郡)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감무를 설치되면서 독립하였다. 1409년(태종 9)에 왜구의 극성으로 육지에 옮겨온 진도현(珍島縣)을 병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이라 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다시 진도와 분리하여 현감을 두어 해남현이 되었고, 또 수군전라우수영을 두어 남쪽 해상 방비의 요지로 삼았다. 1448년(세종 30) 황원현(黃原縣)‧옥산현(玉山縣)‧죽산현(竹山縣)과 병합, 당악(棠岳)으로 개편하였다가 다시 해남현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해남군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하면서 부근 도서를 완도군으로 이속시켰다. 1955년에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