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 하 필 랑, 指導敎授 장 성 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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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학교 및 학위 : | 昌原大學校 敎育大學院 國語敎育 專攻, 敎育學 碩士學位論文 |
| 년도 : | 2003年 12月10日 |
敎育學 碩士學位論文
孤山 尹善道 文學硏究
-고산의 儒者指向的 意識에 관하여-
指導敎授 장 성 진
이 論文을 敎育學 碩士學位論文으로 제출함
2003年 12月10日
昌原大學校 敎育大學院
國語敎育 專攻
하 필 랑
논 문 요 약
孤山 尹善道 文學 硏究 - 儒者指向的 意志에 대하여 -하 필 랑
창원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지도교수 장성진)
고산 윤선도의 문학연구에 있어서 孤山의 儒者指向的 意識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을 고찰하였다. 지금까지 고산의 문학 작품에 대한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주로 그의 자연관이나 고산이 작품 속에 표현했던 한글 사용에 대한 남다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고산의 탁월한 문학적 자질을 논하였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작품을 형성함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산의 사상적 배경과 문학 작품과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 개략 적인 연구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그의 漢詩를 주로 분석하여 본 결과 고산의 문학 작품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儒者的 意識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행로나 그의 성장과 정이나 유배 생활 속에서 창작되었던 대부분의 작품은 주로 한시였다.
한글 시는 고산의 유배생활 중에서도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작품 분량도 그리 많지 않고 내용은 주로 그의 은둔 생활에서 얻는 자족감이나 현실 도피적인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한글 시와 한시 모두 그 내용의 저변에 깔려 있는 사상적 근원은 유자 의식이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고산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의 생애에 따른 정치적 행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학문 수학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유자적 의식을 도출해 내었다. 그 결과 고산의 사상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小學> 이며 이를 중심으로 하여 주자학의 수용 양상을 고산의 의식과 관련지어 살펴보았다. 이러한 사상이 후에 시대적 배경의 혼란 속에서 형성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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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유교사상, 도교사상, 경제사상, 사회사상의 측면에서 살핀 후 그러한 사상이 작품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유자의식의 기반 위에서 살폈다.
결과 주로 그의 작품 속에서는 유교의식이 가장 많이 표현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유학자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사군의식, 그 다음에는 효친의식 그리고 사회비판의식과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 세계에 대한 실현의지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이는 고산 자신이 철저한 학자로서 백성을 구현해야 한다는 정치의식의 발로가 그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사회에 대한 올바른 참여의지를 나름대로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실현되지 못하자 결국은 자연으로 돌아가 새로운 이상 세계에 대한 실현 의지를 작품 속에 드러내면서 자신의 삶을 위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고산이 철저히 사림의 학풍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정통성을 이어 가려고 했던 그의 학자적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면 고산 윤선도의 문학 작품 속의 의식은 철저하게 유자적 의식이 그 기반이 되었음이 분명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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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논문요약
Ⅰ서론 ------------------------------------- 1
1. 연구목적 -------------------------------------------- 1
2. 연구사 검토 ----------------------------------------- 2
3. 연구방법 ----------------------------------------- 6
Ⅱ. 고산의 생애와 사상 ----------------------------8
1. 시대적 배경 -------------------------------------- 8
1) 壬辰倭亂과 前後의 影響 --------------------------------8
2) 光海君의 亂政과 丙子胡亂------------------------------ 10
2. 고산의 생애 ------------------------------------------13
1) 고산의 家系 ---------------------------------------- 13
2) 고산의 行蹟 -----------------------------------------16
3. 學問과 思想적 배경 ------------------------------------25
1) 학문적 배경 --------------------------------------- 25
2) 사상적 배경 --------------------------------------- 31
Ⅲ. 儒者指向的 意志 ----------------------------- 38
1. 事君意識 ------------------------------------- 43
2. 孝親意識 ------------------------------------------ 44
3. 社會參與 意志와 批判意識 ------------------------------- 51
4. 理想世界의 實現意志 ---------------------------------- 59
Ⅳ. 결론 ---------------------------------------------- 66
참고문헌 ---------------------------------------------- 68
영문요약 ---------------------------------------------- 70
Ⅰ서론
1. 연구목적
孤山 尹善道는 국문학 연구가 본격화되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널리 주목되고, 높이 평가되고, 거듭 연구된 작가이다. 연구 논저가 문학의 기본적 문제를 논의하면서 고산을 다룬 것, 고산과 다른 작가를 비교한 것까지 대충 헤아리면, 200 여 편에 가깝다. 그 가운데 단행본 22권, 학회 지에 실린 연구물만 132 여 편, 석사․박사 논문이 대략 40 여 편에 달할 정도로 연구 활동이 활발하고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1)
이는 고산이 文學史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뚜렷하고, 그의 작품이 지니는 의의가 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특히 그의 <시조>때문일 것이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연구의 대부분이 시조 연구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시조는 믿을만한 기록으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말을 남달리 능란한 솜씨로 구사하여 뛰어난 예술적 작품으로 형상화해 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2) 아름다운 우리말을 부려 형상 화한 <시조>작품 때문에 그의 문학 연구는 특별히 작품론에 더 큰 관심을 쏠리게 했다고 본다. 이런 면에서 윤선도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작품론이 작가론을 능가하고 있다.
근래에는 여러 연구자들이 윤선도를 논의할 때 그의 시조와 더불어 한문 문학(漢詩) 3) 에 대한 고려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룸으로써 연구의 범위와 관점이 확대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시와 고유시를 같은 위상에서 다루려고 한다. 또한 작가의 사상과 작품의 예술성을 균형 있게 다루려고 하는 하는 것이다.
1) 조동일의 '고산연구의 회고와 전망'(고산연구 창간호, 고산연구회, 1987, 3)에서는 1985년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20여 편이라고 확인했고, 그 중 단행본이 5권이 라고 했는데 2003년 현재 필자가 검토한 바에 의하면 단행본과 학회지 연구 결과물, 석사, 박사 학위 논문까지 합한 숫자이다.
2) 김수업, 1994, “윤선도론”, 배달말 19, 배달말 학회, pp. 4-7.
3) 그의 문집인 ‘孤山遺稿’ 卷 一에 252편 358수가 실렸으며, 卷 六에도 8편의 시와 4편의 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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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한 시인의 詩와 思想, 文學과 哲學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는 한 개인의 사상과 가치관의 형성은 곧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상황과도 관계될 것이고, 이렇게 형성된 사상의 본질은 문학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인도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시대의 지적 풍토나 사상적 조류에 대해서도 무관심 할 수 없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문학작품을 이루는 뿌리가 儒學思想이 주를 이룬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학사상은 그들의 행동양식과 사회적 반응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정치가였으며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윤선도의 문학 작품 속에 담긴 그의 사상, 철학, 가치관 등도 대부분이 儒者意識이 그 기반이 되었을 것이고 그의 작품을 형성하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본고에서 작가의 실제 성장과정과 수학과정, 정치적 행보 등을 중요 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연구사 검토
고산에 대한 평가는 조윤제에 의해서 일단 분명하게 이루어졌다 4) .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발휘하고 자연미를 발견했으며, 특히 <五友歌>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요약한 것이 그것이다. 5) 이런 관점은 그 뒤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였다. 윤곤강은 그의 생애와 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한데 이어 고산의 시조 75수를 실었다. 소박하면서 속되지 않은 가운데 말을 잘 다듬었다는 것으로 시풍의 특징을 지적했다 6) .
단편적이거나 인상 비평적인 차원을 넘어선 본격적 연구는 이재수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초창기 연구를 집약하고 발전시킨 의의를 지닌다. 7)
작가론, 작품론, 작품 주해를 갖추어 작가 연구로서의 좋은 본보기가 된
4) 조윤제, “조선시가사강”, 박문출판사, 1937, 5) 조윤제, 조선시가사강, 박문출판사, 1938.
6) 윤곤강, 孤山歌集, 정음사, 1948, 7) 이재수, 윤고산 연구, 학우사,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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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책 출간을 계기로 국문학 연구 전반의 작가론이 본격화되었다고할 수 있어 더욱 주목된다. 특히 주목할 내용은 관련 자료를 충실하게 이용해 고산의 생애와 인품을 자세하게 밝힌 것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의 발전된 업적이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품에 관해서도 판본, 창작 시기에서 해석상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충실한 고증을 갖추었다. 작품론 에서는 표현의 기법을 특히 중요시하고, 선행하는 <漁父歌>류의 조잡한 세계를 <漁父四時詞>로 다듬은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1930년~1950년대까지의 연구는 대략적으로 보아 거의가 통설이 되어 연구거리가 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미 해석이 가치 평가보다 더욱 긴요한 작업이라고 생각되어, 방향 전환이 요망되었다. 고산의 자연관을 다시 살필 필요가 있어 최진원의 “假漁翁” 연구가 이루어지고, 8) 그 논지가 그의 박사 논문에서 더욱 확장되었다. 최진원의 앞서 언급한 연구를 통해서 새롭게 제시한 관점을 살펴보면, 고산은 정계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연으로 돌아가 “假漁翁”의 초연한 세계를 찾았다 하고, 자연을 관념화해 자아와 대상이 모순되지 않은 경지에 이른 것이 초연의 의미라고 했다. 선비로서의 마음가짐을 흩지 않고 “溫柔敦厚”의 마땅한 도리를 간직하려 했음을 밝혔다.
이런 연구를 계기로 해서 고산을 위시한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들의 자연관을 밝히는 작업이 사상사적 통찰을 필요로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윤경상의 연구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다루었으나 고산의 사상을 통괄적으로 유기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개별적인 요소를 중요시하는 데 머물렀 다. 9) 최동원의 연구 또한 사상적 연구이며, 도가사상이 작품의 격조를 높이게 한 구실을 해명하고자 했다. 10)
고산의 자연관에 대한 논의는 윤성근의 연구 11) 에 이르러서 착안점이 달라졌다. 고산의 자연관이 전통적 자연관을 집약했다고 추단하지 말고그 나름의 특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고산은 유람자의 관점으로 자연 에서 흥겨움을 발견하고, 탐구자의 관점으로 자연에다 긍정 또는 부정의
8) 최진원, “假漁翁-漁父四時詞의 境遇”, 성균관대논문집 5, 1960.
9) 윤경상, “고산과 국문학”, 국문학, 공주사대, 1960.
10) 최동원, “道家思想이 古時調에 미친 影響”, 부산대논문집 10, 1969.
11) 윤성근, “尹善道의 自然觀”-그의 自然美와 表現“, 문화비평 2호, 아한학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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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부여했다고 보아 주제 추출을 구체화 하고자 했다. 윤성근은 자연관뿐만 아니라 禮訟에서 편 주장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말고 현실적 관심사의 전이된 표현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12) . 그 책에서는 상소문 몇 가지도 번역해 실었으며 연보도 제시했다.
고산 연구는 시조 작품만 주대상으로 하고 한시는 버려 두는 것이 관례였는데 권두환의 연구에 이르러서는 이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다. 漢詩 259편, 賦 4편까지 함께 다루어야 고산 문학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를 할수 있다 하고, 13) 한시와 시조의 관련성을 밝히는 것이 긴요한 과제라고 했으나 아직 구체적인 연구는 하지 못했다. 문영오는 고산에게 끼친 杜 甫의 영향을 살폈고 14) 또한 그 내용을 포함해서 고산의 한시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를 한 업적이다.
고산문학에 대한 연구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앞서 밝혔던 연구와는 다른 각도에서 시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장선희의 연구를 살펴보면, 선행된 연구의 대부분이 고산의 문학적 탁월성과 개성에 주안점을 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한 그의 문학적 가치와 의미의 실체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살피는 것에서 연구의 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산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조선조의 지배사상이었던 朱子學의 수용 면에서 그의 작품을 살폈다. 또한 고산의 학문적 위상이 마지막 주자학의 모습을 견지하면서도 한편에서는 實學家의 면모을 보여주는 先覺者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있다는 고산의 이원적인 모습을 시대상황과 관련지어 밝혀내고 있다. 15)
정운채는 고산의 시조와 한시의 제재와 주제의 공통점을 근거로 하되, 시조와 한시의 기능 분담을 시적 자아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고산의 사대부적 삶의 방식을 살핌으로써 서정적 주체의 기본적 정서를 밝히되 시적 자아를 검토하기 위하여 인물들의 형상화 양상을 고찰하여 인물 형상화 양상의 차이로부터 시조와 한시의 시적 자아
12) 윤성근, “윤선도의 작품집,”형설출판사, 1977.
13) 권두환, “尹孤山의 漢詩 硏究序”, 관악어문연구 3, 서울대출판부, 1973.
14) 문영오, “孤山 尹善道의 漢詩硏究”,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82, <한국문학5>에 동시 게재됨.
15) 장선희, “尹孤山 文學思想의 一考察:朱子學의 受容樣相으로 본-”, 광주보건전문 대학 광주보전논문집 16,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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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폈다. 16)
이상원은<어부사시사>를 17세기적 성격, 즉 16세기 江湖 시조와의 변별적 성격에 주목을 두고 현실적인 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그의 행동, 즉 현실주의적 성격을 밝히고자 했다. 17)
이화형의 연구에서는 기존의 업적을 수용하면서 시조작품 전체를 대상 으로 다소 새로운 시각에서 그의 존재론적 사고를 다루고 있다. 그의 경우 변화하는 현상세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보다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실체에 대한 관심이 집요함을 밝혔다. 이러한 불변적 실체에 대한 일련의 탐색이 형상화된 그의 문학적 성격과 작가의식을 존재론적 측면에서 접근함이 타당하다고 했다. 특히 그의 현실적 인식의 태도를 규명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고산의 작품은 현실상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격렬하게 투쟁하기보다는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의 주체에 대해 끊임 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작가의 태도에 주목하고 있었다. 18)
김경복의 글에서는 윤선도의 정신적 지향의 한 극단을 추적하고 있는데 그의 시조 작품에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과 함께 자연과 조화 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그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다. 즉 고산의 작품을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잠재적 형상의 하나로 겹쳐보면서 작품을 분석했다. 19)
이노형의 연구에서는 고산 시조의 연구사의 흐름과 수준을 검토해 보는 동시에 나아가 고전문학 일반의 해석에 있어 좀 더 발전적인 길을 찾고자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다. 주목할 수 있는 것으로 북한의 고산 연구 사와 남한의 고산 연구사를 자연관과 현실관에 있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나누어 밝히고 있다. 20)
16) 정운채, “윤선도의 時調와 漢詩 : 그 인물 形象化에 나타난 詩的 自我의 分化에 대하여”, 서울사대 선청어문논집 20, 1992.
17) 이상원, “<漁父四時詞>의 현실주의적 성격”, 고려대학교국어국문학연구회, 어문 논집 34, 1995.
18) 이화형, “孤山時調의 存在的 思考”, 한국언어문학 38, 1997.
19) 김경복, “고산 윤선도 시에 나타난 유토피아의식연구”, 문창어문학회, 문창어문 논집 제 37집, 2000.
20) 이노형, “윤선도 문학의 연구사 검토”, 울산대학교 국어국문과, 울산어문논집 제 15집,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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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선행 연구를 종합 분석해 보면 고산 시조에 대한 견해는 그 내용과 형식면을 함께 고려해서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그의 自然觀이며 또 다른 면은 그의 작품과 관련지은 思想性 으로 볼 수 있겠다. 전자의 경우 고산의 서정 세계가 이념 혹은 현실을 완전히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이념이나 현실에 닿아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후자의 경우에는 주로 그의 당대 현실의 영향관계와 관련된 사상성 인가, 그렇지 않으면 고산 자신의 개인적 성향에서 빚어진 사상성인가 하는 것이다.
윤선도 문학연구의 초창기에서는 주로 고산의 자연관을 언어의 표현 기교 면에서 드러나는 우수함과 개성을 집중적으로 밝힌 연구가 많았는데 이는 주로 고산의 시조 작품에만 매달린 연구결과로 볼 수 있다. 이를 총체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고산문학의 본질을 밝히는데는 미흡한 점이 많은 듯 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고산의 시조와 한시를 같이 분석하면서 주로 그의 사상과 이념의 측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할려는 시도가 다채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필자 또한 고산문학의 본질은 그의 사상적 측면의 다양성을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함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선행 연구에서는 고산의 사상적 측면을 어떤 특정 부분만 강조하거나 소재나 주제 면에만 국한시킨 점이 많은 듯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에서 밝힌 점을 토대로 하여 그의 자연관을 형성시켰던 다양한 문학의 본질적 뿌리가 무엇이며 또한 그의 다양한 사상의 본질적 뿌리는 어디서 연유하는가를 작품과 관련하여 밝혀 보고자 한다.
3. 연구 방법
앞에서 검토해 보았듯이 지금까지의 고산 연구의 업적이 방대하고 그연구사만 정리하여도 한편의 논문이 되고도 남을 만큼 다각도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연구결과나 방향을 놓고 보면 그의 한글시가나 또는 자연관에 국한된 느낌이 들고, 요즘 들어 새로운 연구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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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그의 사상이나 한글 시가를 벗어나지 못함을 지적할 수 있겠다. 또한 그가 처한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작품을 함께 아울러서 연구되 어져 왔음도 고산 작품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전에 평가되고 있는 고산의 자연관 형성과 그의 사상성 형성이 문학 전모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면 이러한 문학세계 전모를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고산과 관계된 시대적 정치적 상황과 사상 형성의 바탕이 된 문학적 淵源을 파악함을 연구의 출발로 삼고자 한다.
특히 본 논의의 중심은 조선조 사대부들의 가장 중요한 행동양식이자 기본철학의 근간을 이루었던 사상적 주류가 朱子學의 受容과 더불어 주자학적 기본 사상이 이들의 학문 세계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관직생활의 기본적 의식을 형성했을 것이 다. 그렇다면 고산의 정치적 행적이나 그의 의식, 가치관, 문학활동의 정신적 뿌리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작품 세계는 官. 學. 詩의 공통적 사상에 뿌리를 내렸던 것은 儒者的 意識의 방향에서 시작되고 매듭지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과의 관련성을 그의 성장과정, 학문의 수학과정, 주변의 가정환경, 또한 그가 활동했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보여준 학자, 정치가로서의 면모, 시인으로 서의 자질 등의 모든 활동의 근간이 바로 儒學的 意識과 연계되어 있었 다는 점을 고산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儒者的 意識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 기에 고산의 사상적 측면에서 주로 儒者 指向的 意識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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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산의 생애와 사상
1. 시대적 배경
윤 고산은 고귀하고 풍요한 명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괴로 움이 어떤 것인지를 모를 정도로 평온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가 자라난 가정 환경과는 달리 그가 살고 있었던 사회 환경은 참담 하기 짝이 없었던 시대였다. 그의 유년 시절로부터 소년 시절에 걸쳐서는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란 속에서 허덕이는 사회를 보아야했고, 청년 기에 들어서서는 광해군이라는 昏君이 나타나 국가의 기강은 문란해지고 권신들의 횡포로 백성은 도탄에 빠진 시기였다. 게다가 장년의 시기를 넘어서서는 丙子胡亂이라는 또 다른 전란을 치러야했고, 이러한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 백성들을 불행으로부터 건져내어 행복된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해보겠다는 그의 포부는 반대당의 방해로 번번이 꺾이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곤 했었다. 여기서 사회적 배경과 고산의 생애를 함께 살펴볼 이유가 발견된다. 개인적으로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받은 고산이 험난한 사회를 향해서 뛰어들 것은 엘리트로서 그의 의무를 자각 하고,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1) 壬辰倭亂과 戰後의 影響
14세기경부터 고려왕조는 왜구의 시달림을 받아왔고, 조선왕조에 들어 와서도 왜구의 침략은 골치거리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對倭關係는 交隣政策을 근간으로 하였기 때문에 회유를 통한 평화유지에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15세기 중에는 癸亥條約에 의한 三浦開港, 歲賜米의 지급 등 회유정책을 써 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三浦倭亂 後는 歲賜米와 歲遣船을 절반으로 줄였는데 일본측은 나빠진 무역조건에 불만을 품고 계속 분쟁을 일으켜 왔으며, 조선정부는 그 때마다 또 세사미와 세견선을 줄이는 악순환을 되풀이해 왔다. 그러다가 1555년에는 전라도 達梁浦에 왜선 60여척이 침입하는 乙卯倭變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일본은 足利幕府가 망하고 戰國時代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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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갔으며, 그 뒤 織田信長에 의해 전국시대가 평정되었고 豊臣秀吉이 국내를 통일하게 되었다. 21) 어떻든 풍신수길은 길러진 영사들의 군사력이 부담스러웠으므로 한편으로는 반대편 세력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해외무역의 길을 트기 위해 대륙 침략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풍신수길은 對馬島主를 통해 조선에 수교를 요청해 오는 한편,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비켜달라는 요구를 해왔고, 조선정부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일본의 풍신수길은 <征明假道>의 교섭이 결렬되자 드디어 1592년(宣祖 25년)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왜병의 힘은 군졸이 20만 2천명이요, 수군이 9천 여명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 다고 한다. 어떻든 지배계급 사이의 경쟁의 계속, 군사제도상의 공백, 왕조에 대한 심한 민심의 이반 등을 틈타서 침입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20일 후에 서울을 점령하게 되었다. 22) 더욱이 충주에서의 패전은 조선왕조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戰意를 상실하게 만들었 다. 당시 조선의 수도경비는 “城中士庶 皆己奔潰”하여 비록 고수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에 선조는 일단 평양을 피신하여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심하고 臨海君과 順和君 두 왕자를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 勤王兵 모집에 나서도록 했다.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다시 진로를 정하여 少西行長 부대는 평안도로, 加藤淸正 부대는 함경도로, 黑田長政부대는 황해도로, 毛利吉成. 島津 義弘부대는 강원도로 진군하고 기타 부대는 서울과 후방을 담당하였다. 23)
한편 한강을 버리고 후퇴한 金明元은 임진강을 방어하려 했으나 그마저 실패하고 일본군은 임진강을 건너서게 되었다. 그래서 개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황해도 안성역에 이르러 가등청정은 함경도로 향하고, 소서 행장은 평양으로 향하였다. 그동안 선조는 평양에서 李德馨을 명나라에 보내어 援兵을 청하였고, 윤두수를 유수대장으로 삼아 평양을 방어토록
21) 朴性植, “壬辰倭亂의 硏究”, 嶺南大博士學位論文, 1985, pp 74-75 22) 강만길,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84, p. 160.
23) 이재룡. 류영렬 공저, 한국사대계:조선전기편, 도서출판아카데미, 1984,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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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자신은 義州를 향하여 北行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러나 평양성을 지키고 있던 윤두수. 김명원은 소서행장에게 패하여 물러서니 6월 13일 평양마저 日軍에게 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서행장 부대가 평양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가등청정은 함경도로 진출해서 會寧에 피신해 있던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를 사로잡고는 安邊에 주둔해 있었다. 어떻든 임진왜란은 그 후 7년 간 계속되었고 전 국토는 황폐되었으니, 그 피해 상황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선 선조가 서울을 떠난 직후의 상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왕이 宮城을 떠나자 亂民들은 먼저 掌慧院과 刑曹에 放火하여 公. 私 奴婢文書를 불사르고, 內庫에 亂入하여 金錢財物을 해치고, 경복궁. 창덕 궁. 경경궁에 불을 놓으니, 歷代의 寶器와 弘文館의 書籍, 춘추관의 歷代 實錄, 他庫 所藏의 前朝史草. 承政院日記 등이 모두 灰燼되었으며, 또 임해군과 전병조판서 홍여립의 집에 방화하니, 서울은 日軍의 入城 以前에 벌써 焚掠되고만 것이다.” 24)
이것은 자국민에 의한 피해상황의 일부이고, 여기에다 일본군과 명군에 의한 파괴. 방화. 살상. 약탈한 것까지 합치면 말로써 형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구는 감소되었고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였다고 한다. 국가의 재정곤란은 말할 것도 없고, 매관매직이 자행되었으며, 사방에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호적과 토지대장이 불타버렸으므로 세금과 노역 징발이 곤란해졌다. 어떻든 임진왜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동양삼국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조와 정권이 바뀌게 되었고,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 光海君의 亂政과 丙子胡亂
선조 8년경부터 시작된 東. 西 分黨은 점차로 발전되어 東人은 南人. 北 人으로 갈리고, 왜란이 수습된 뒤에는 다시 북인이 다시 大北. 小北으로
24) 震檀學會編, 韓國史:近世前期編, 乙酉 文化史, 1962, 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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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게 되었다. 동인에게는 대체로 李滉과 曺植의 文人이 많고 西人에게는 李珥와 成渾의 계통이 많아서 黨爭은 學派의 대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25) 그런데 동인의 퇴계 학파는 <理>와 <道>를 중시하는 반면, 서인의 율곡 학파는 經世의 術을 강조하여 <기>를 중시하는 입장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主理>와 <主氣>파의 대립양상으로 본다면 퇴계 학파는 비교적 보수적이었다. 율곡학파는 대체로 진보적인 면을 지녔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후의 黨派趨勢는 정치이념의 차이보 다는 權力鬪爭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조 39년부터는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대. 소북간에 치열한 쟁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대북은 광해군을 支持하고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하였는데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모든 권력은 대북의 독무대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한성판윤에 정인홍, 예조판서에 이이첨 등이 新政權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을 추대한 대북 정원은 반대 세력이 재기할까 두려워 그것을 말살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임해군에 대해서 광해군에게 不軌를 도모하였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珍島流竄을 시켰다가 다시 僑 洞으로 옮겼으며, 그 뒤에도 대북의 중진들은 임해군의 처형을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임해군을 제거한 정인홍. 이이첨 등은 영창대 군에게도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1613년(광해군 5년) 4월 鳥嶺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을 서자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대역죄를 범한 것이라 덮어씌우는 한편 그의 외조 김제남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씌워 놓았다. 그리고는 먼저 김제남을 살해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찬시키더니, 다시 李爾幨의 명을 받은 江華府使 鄭沆으로 하여금 영창 대군을 살해케 만들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또 정원군의 아들 綾昌君 佺을 잡아 그에게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를 들어 살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광해군의 亂政과 對北政權의 독주가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인들은 인조반정에 의해 大北 政權을 무너뜨리고 광해군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러하여 소수의 南人들도 포함된 西人政權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남인들은 정계에서 퇴각하게 되었고 서인은 다시 少西와 老西로 자체
25) 李基白, “韓國史新論”, 一潮閣, 1984, p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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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하게 되었다.
어떻든 인조를 옹립한 서인정권은 向明拜金의 정책을 표방하고 나섰다.
원래 반정 세력이 내놓은 명분의 하나는 仁穆大妃 流弊와 永昌大君 살해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후금에 대한 화평 정책의 부당성이었다. 결국 이러한 국가 정책의 변화는 후금의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려 놓았다. 그래서 후금에서는 중국 본토를 진격하기에 앞서 후환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먼저 공격하고 나섰으니, 이른바 정묘호란이라 일컫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後金軍의 都元師 李弘胃의 지휘 아래 의주, 용천, 철산, 전주의 방어진을 차례로 무너뜨리더니 西北路의 요충지인 安州까지 점령하였다.
그 당시 平安兵史 南以興이 안주를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함락되고 만것이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강도와 남한산성 두 곳을 거점으로 버틸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후금도 또한 전선이 깊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 므로 平山에 머물면서 강화를 제의해 왔다. 26)
한편 강화로 피난해 있던 조선정부가 여기에 응함으로써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후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兄弟의 盟>, <君臣의 義>로 고칠 것을 강요하자 인조는 이를 거절하게되고 이에 격분한 청태종은 1636년(인조 14년) 1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재침하여 왔으니, 이른바 丙子胡亂이다. 이로 말미암아 강화가 함락되고 완자. 비빈 등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잡혀가게 되었고, 斥和論을 주장한 관리들을 비롯하여 무려 50만 명의 남녀가 청나라에 잡혀갔다고 한다. 그러면 전쟁이 끝난 뒤 우리나라가 받은 충격은 어떠했던가? 趙潤濟는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丙子胡亂은 亂으로서는 혹은 壬亂보다 작았을런지는 모르고 또따라 物質的인 피해도 적었을지 모르되, 精神的인 打擊은 도리어 임란 보다 더 컸지 않은가 한다. 왜냐면 병란에 있어서는 바로 城下의 盟을 맺고 淸國에 굴복하고 말았기 때문이다......중략......효종 때에는 북벌조차 계획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 잘 알 수 있거니와, 시조문학의 대가
26) 姜萬吉, 前揭書,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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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山 尹善道도 和議가 정하여졌다는 말을 듣고 忿怒를 참지 못하여 海中으로 들어가 다시 이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려 하였던 것이다. 27)
그 밖에도 金尙容 외에 많은 사람들이 和議를 반대하고 殉國했다고 하며, 굴복 후에도 청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하니 그 당시 朝鮮人의 감정이 어떠했는가를 잘 반영해 주는 이야기가 된다. 고산의 시조 작품 가운데 이러한 어려운 시대적 현실을 형상화한 작품이 간혹 눈에 띈다.
2. 고산의 생애
1) 고산의 家系
윤선도의 자는 約而, 호는 海翁이라 한다. 宣祖大王 二十年 (1587) 六月 二十二日 漢京 東部에서 태어나 현종 十二年(1671)에 甫吉島 芙蓉동 落 書齋에서 85세로 생애를 마친 유학자요, 정치가요, 시가인이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존부는 해남 윤씨의 시조이며 다시 思甫, 耕, 孝貞등으로 이어진다.
그의 고조 효정 28) 은 연산군 때 성균관 생원이었고 일찍이 농업에 힘쓰면서 해남 윤씨의 가업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은덕이 있었으며 호를 漁樵隱이라 했고 戶曹參判에 추증된 바 있다. 증조부 衢는 어려서 신동이라 일컬어졌으며 중종 11년 23세의 弱冠으로 文科에 급제하였다.
또 趙光祖의 門下에서 배운 바 있다. 여러 賢者들과 더불어 禮曺正郞까지 올라갔으나 26세에 기묘사화를 당하여 귀양살이하다가 47세에야 풀려나 벼슬은 弘文館副校理로 마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長男은 弘中이고 次男은 毅中이다. 홍중은 30세에 문과에 올라 禮曺正郞을 지냈으나 일찍이 세상을 마치었다. 의중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議政府右參贊에 이르렀는데 바로 고산의 祖父가 된다. 그는 선조 때부터 東人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었는데 西人의 嶺首인
27) 趙潤濟, “韓國文學史”, 探求堂, 1978, p 207.
28) “孝貞엔 三子가 있었는데 다 文科에 급제하고, 장남 衢는 己卯의 名賢으로 名聲이 높았고, 次男 行은 僉知가 되고, 三男 復은 監査가 되어 海南 尹氏의 家名은 一世에 顯揚하였다.(李在秀, ”윤고산 연구, 학우사, 1955, 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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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珥와 鄭撤에게 여러 가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뒤 鄭汝立의 模叛事件에 연루되어 귀향 도상에 세상을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장남 홍중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고 차남 의중은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유심은 벼슬이 禮賓寺副正에 이르렀고, 차남 유기는 문과에 급제하여 江原道 觀察使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 분이 홍중의 뒤를 이었다. 관찰사 유기 또한 아들이 없게 되자 유심의 둘째 아들 善道를 입양시켰던 것이다. 그러니깐 유심은 고산의 생부이자 유기는 양부인 셈이다. 아래와 같이 간단 하게 요약할 수 있겠다. 29)
存富(始祖) - 思晉 - 耕 - 孝貞(戶曹參判) - 衢(吏曹判書) - 行 - 復 弘中(禮曹判書)----- 惟幾 ------- 善道 --- 仁美 毅中(議政府右參贊)--惟深(禮賓寺福正)--- 善言 --- 義美 惟幾(出) --- 善道(出) -- 禮美 --- 善繼
어떤 사람의 생애이든지 거기에는 굴곡이 있고 절정과 하강이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고산처럼 다사다난한 생애를 마친 이에게는 그 시기를 구분하는데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개인의 정치적 사건에만 초점을 맞출 수 없는 것이다. 작가 개인의 주변 상황과 시대상, 그리고 개인 자신의 가치관이 종합된 정보를 통해서 그 작가의 작품 세계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윤선도는 조선 왕조 안에서 가장 치열했던 당쟁의 소용돌이 시대에 살면서 선명한 당색을 내세우고 정치적 발언과 처신을 하였으므로 파란과 충돌이 우심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이미 정치적 실세에서 밀려난 남인의 일원이었고, 그것은 당대의 대부분 사대부들이 그러하였듯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고산의 가정환 경과 학문을 바탕으로 마련된 철학과 신념에 따른 것이겠는데, 지역적으
29) 원용문, “尹善道論”, 고려대학교국어국문학연구회, 語文論集27, 1987, p 26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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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는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었다.
당파는 애초에 사소한 인간적 갈등과 정치적 이견에서 출발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학문적으로 무장하게 되어 드디어 무서운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나는 영남의 이황(1501-1570)과 조식(1501-1572)에 닿아 있고, 다른 하나는 기호의 성혼(1535-1598)과 이이(1536-1584)에 닿아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남 학파에 닿아 있는 東人은 북과 남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북은 대북과 소북으로 닿아 있는 동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분열해 가고, 기호학파에 닿아 있는 西人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여 갔는데, 윤선도가 살던 시대에는 인조 반정으로 대북은 소탕되고 소북은 남인에 흡수되어 반정의 주체 세력들이었던 서인들과 대치하고 있던 상태였다.
서인의 판도 안에 생활의 터전을 지닌 윤선도가 생활 주변의 대세와는 달리 남인의 당색을 선명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고산은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해 생부 유심의 별세로 3년간 거상하느라 매였다가, 30세에 진사의 신분으로 당시 집권 대북의 핵심에게 극렬한 비판의 일격(丙辰疏)을 가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는 그 대가로 양부(유기, 관찰사)의 파직과 자신의 경원(慶源, 1년간)과 기장(機張, 6년간) 유배를 얻게 된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정치적 노선을 보였으며, 윤선도의 행동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된다.
37세가 되던 3월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 었다. 광해조 때에 절의를 세워 병진소를 올린 행위의 보답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정 이후 민심 수습 방책으로 남인을 서용하던 시세의 덕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처럼 얻은 기회를 포기하고 곧 해남으로 돌아와 5년 동안 다시 학문에 전념한다. 그런 후 42세가 되던 해에 새로 별시 초시에 나아가 장원을 하고 두 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이로부터 약 7년 간왕의 총애 안에서 한성서윤 등 요직도 맡았으나 항상 서인의 표적이 되어 결국 강석기의 미움에 부딪혀 성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만에 파면되어 49세에 고향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1년만에 병자호란이 터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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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산의 行蹟
(1) 靑少年 修學期
청소년기라함은 고산의 유년 시절부터 그가 李爾瞻을 규탄하는 병진소를 올리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그러니깐 고산의 30세 이전은 여기에 해당된다. 윤선도는 1587년(선조20년) 6월 22일 서울 연화동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특이하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그가 관찰사 유기 앞으로 양자로 들어간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처음 에는 이 사실을 즐거워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倫義와 宗事의 막중한 것을 알고 양부모 섬기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17세 때는 부인 南原 尹氏를 맞이했다. 25세 되던 해 11월에는 서울에서 해남으로 돌아갔다. 어초은이 해남에 터 잡고 살 때부터 이미 5대가 지났던 것이다. 해남은 선대의 무덤과 옛집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는 조상의 무덤을 살피기 위해서 갔지만, 가는 도중에 장편 기행시를 지었다. 1612년(26세) 가을에는 進士試에 합격했다.
또 그 해 겨울에는 생부 유심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고산이 주야로 병을 간호하는데 옷 띠를 끄르지 않고 그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몇 달이 되었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감에 미쳐 아무런 유언이 없자, 고산이 청하여 그 庶母에게 많은 전답과 노비를 나누어주도록 주선했다. 그만큼 고산은 젊어서부터 인정이 두텁고 사리에 밝고 의로운 인간성을 지녔다 하겠다. 이 청소년 수학기는 孤山에게 있어서 실력배양의 시기요 인격형성의 시기였던 만큼 비교적 행복하고 무난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한다.
아래 시는 14세 때 養父인 관찰공을 따라 安邊 任所로 가는 도중 그의 첫 작품인 五言絶詩인 <自國島廻舟>이다. 30) 이 시에서는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고산의 문학적 소양과 그의 詩心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廻舟日暮還 배를 돌려 석양에 돌아오는 길
半醉半醒間 반은 취하고 반은 깨어 있는 듯
30) <孤山遺稿> 卷 之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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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雁鳴猶去 외기러기 울며 날아가고
斜陽山外山 저녁 노을은 산 넘어 산을 비춘다.
이 시기에는 문학작품의 창작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단지 그의 성장과정에서 읽을 수 있는 성품과 문학적 소양이 엿보일 뿐이다. 고산의 漢詩는 14세의 작품에서부터 83세의 작품까지 전 생애에 걸쳐 있으나 시조는 32세에서 66세 사이에만 지어졌다. 그나마 한시는 70년 동안 지속적으로 창작되었으나 시조는 특정 시기에만 집중적으로 창작되었을 뿐이다. 31)
(2) 慶源流配와 仕宦期
이 기간은 孤山이 丙辰疏를 올린 시기부터 영덕유배를 가기 이전까지가 된다. 그의 나이 30대와 40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그 당시는 광해 군의 정치가 어지러워 얼신 李爾瞻이 나라의 권세를 잡고 마음대로 휘두 르던 때다. 이에 고산은 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대대로 녹을 받는 집안에서 임금이 위태로운데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유명한 丙辰疏를 올리기에 이른 것이다.
병진소는 1616년(광해군 8년) 겨울 당시 예조판서 李爾瞻, 議政 朴承 宗, 王后兄 柳希奮의 亡君負國의 罪狀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사실 고산이 병진소를 올렸을 때는 어두운 임금이 느껴 깨닫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 소를 내려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했다.
그런데 당시 대신들은 이이첨의 후환을 두려워하여 바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承政院. 三司. 館學에서는 이이첨의 뜻을 받들어, 김제남과 반역 사실에 연루된다고 하면서 없는 사실을 얽어 매었다. 그리하여 윤선 는 이이첨의 무리들에게 미움을 사서 1616년 세모에 경원으로 유배가게 되었고, 부친 유기도 관찰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23년 3월 仁祖 反正이 일어나게 되자 고산은 긴 유배생활에서 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42세인 인조 6년에 상경하여 별시 초시에 급제하고 봉림대군과
31) 김수업, 전게서, 재인용, p.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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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의 師傅가 되어 32) 그의 일생 중 가장 화려한 황금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앞날의 서광이 비치게 되었던 것이다. 사부로 임명되자 먼저 <小學>으로 교본을 삼고, 학문을 강론할 때마다 옛 공자의 득실과 선악을 인용해 가면서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다. 그 뒤 1632년 46세 때는 왕의 특명으로 戶曹正郞이 되었으니 이것은 오랫동안 대군의 師傅로서 임금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634년 48세 되던 해 星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겉으로는 임금의 교지가 있어서 특별히 선임되었다고 하나 사실은 반대파들에게 배척 당한 것이다. 1635년(인조 13년 49세) 가을에는 삼남에 토지를 측량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등급을 매기는 것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이에 고산은 상소(乙亥疏)하여 田政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상소는 임금에게 보고되지도 않고 그 일 때문에 오히려 파직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같은 해 겨울 향리 해남에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杜門不出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기간은 고산의 생애에서는 황금기에 해당되고, 화려한 정치 무대에서는 각광받는 인물로 등장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33)
<次樂忘韻> 二首
淸和時節雪猶殘 화창한 봄인데도 봄은 아직 남아
誰信人間有此寒 이런 추운 날씨를 누가 믿을 것인가?
攬草解蘭皆所善 다 핀 난초 잎새 어루만지는 것도 좋고
四山蔡服亦雲安 귀양살이 의복도 평안하구나
只綠愛國經身易 다만 나라 사랑하려다 내 몸 가벼이 여겨
終爲思親忍淚難 그로 인한 어버이 생각에 눈물 흘린다.
邪絲飛鴻斜日外 해는 기울고 저 멀리 기러기 날고
鎭胡樓上技欄干 진호루에 올라 난간에 기댄다.
(孤山遺稿, 卷之一, 16) 이 시는 고산이 당했던 세 차례의 유배기에서 창작되었던 작품 중에서
32) 秦東赫, “古時調文學論”, 螢雪出版社, 1981, p 170.
33) 원용문, 前揭書, p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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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식이 가장 많이 나타난 시로 볼 수 있다. 31세에 <丙辰疏>를 올리고 처음으로 가족 곁을 떠나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했을 때의 심경이 잘 그려진 시다. 이 시기에는 한시 창작이 활발하지 않았고 단지 고유시 창작으로는 <遣懷謠> 34) 와 <雨後謠>가 있는데 이 시가의 내용 면에는 역시 事君意識이나 그의 정치적 소견이 굳게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3) 盈德 流配와 隱遁期
여기서는 영덕유배의 因果關係와 고산이 再出仕하기 이전까지를 논술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고산의 나이 50대와 60대가 주로 이 기간에 해당 된다. 그가 歸鄕한지 만 1년이 되어갈 무렵, 1636년(인조 14년, 50세) 12 월에 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임란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 번거대한 戰禍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淸兵이 입적하자 그 형세는 위급하기 이를데 없었다. 공경대신들은 宗社. 嬪宮. 元孫. 大君들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갔다. 仁祖大王도 강도로 향하고자 했지만 事勢가 급박한지라 남한산성으로 大駕를 돌렸다.
이와 같은 變亂의 소식을 듣고 고산의 성품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는 鄕族, 家僮, 數百을 모아 晝夜로 배를 타고 임금을 구하기 위하여 강도를 향해 달려갔었다. 그는 조수의 들어오고 나감과 바람의 순하고 역함과 날의 밝고 어두움을 무릅쓰고 험한 파도 위를 밤낮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년) 1월 29일 마침내 강도에 도착했을 때는 강도가 이미 함락되어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해남으로 돌아와서 行在所를 찾아가려고 마음먹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海南에 돌아왔을 때는 임금이 적에게 항복하고 화의가 이미 정해진 뒤였다. 이 치욕적인 소식에 접한 고산은 세상을 버리고 숨어살기 위하여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제주도로 향하였다. 그가 山紫水明한 甫吉道를 발견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그 곳을 부용동이라 명명하고 格子峰 아래에 집을 지었다. 樂書齋란
34) 이 작품 속에 윤선도가 당시 ‘丙辰疏’를 올렸던 시기의 내면 세계가 솔직하 면서도 옹골차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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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붙이고는 그 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용하게 은둔 생활을 하던 그에게 1638년 (인조 16년) 大同察訪에 제수되었다.
또 그 당시 錦溪君 兵粮召募使가 되어 영암에 머물면서 고산을 그의 從事君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公을 미워하는 무리들의 참언과 모함은 끊일 사이가 없었고, 이로 인해 고산은 체포되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죄상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다만 임금께 문안하지 않은 죄만을 적용해서 1638년(인조 16년 52세) 6월 영덕현으로 두 번째 귀양 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유배는 1년만에 사면되었다. 그는 돌아와서 家事 일체를 아들 人美에게 맡기고 수정동에 집을 짓고 그 곳에서 살았다. 이로부터 10 여년 동안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본격적인 은둔생활로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芙蓉洞, 水晶洞, 金鎖洞, 聞簫洞 등은 고산의 은둔지요, 詩歌生活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쓰여졌던 고산의 한시와 시조를 살펴보면 그의 생활과 사상의 한 국면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35)
낙서재우음(樂書齋偶吟)
眼在靑山耳在琴 청산을 보면서 거문고 소리 들어
世間何事到五心 세상의 어떤 일이 마음에 드나
滿腔浩氣無人識 이 마음에 큰 뜻을 아는 사람 없어
一曲狂歌獨自吟 미친 듯이 한 곡조를 홀로 읊으네
어부사시사(가을 10)
송간석실(松間石室)에 가 효월(曉月)을 보자하니
배불여라 배불여라
공산낙엽(空山落葉)의 길을 어찌 알아볼꼬
35) 尹承鉉, “고산윤선도 연구”, 弘益齋, 1999, p 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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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백운(白雲)이 쫓아오니 여라의(女蘿衣) 무겁구나.
이 시기에는 고산이 가장 창작활동에 몰두해 있던 시기였다. 작품의 세계도 주로 사회적 의식이나 정치의식 등이 많이 나타나지만 아울러 임금에 대한 생각이나 어버이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그의 시적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바로 그의 문학적 사고의 뿌리는 바로 儒者 指向 意志와 관계 있음을 말해 준다.
(4) 再出仕와 論爭期
이 시기는 고산이 효종의 부름을 받고 再出仕한 기간부터 당쟁활동을 적극적으로 개시한 7. 80대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고산의 노년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고산이 아들 仁美를 시켜 임금께 상소했던 일은 이미 전술한 바 있거니와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다시 반대파들의 모함을 받게 되었 다. 아들을 보내어 投疏하는 것은 가만히 조정을 시험하는 것이니 잡아 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자 요청하였다.
임금의 뜻이 고산에게 있음을 알고 온갖 계교를 써서 그의 再登用을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1652년(효종 3년) 봄 임금은 바야흐로 書 典을 강독하고 있었다. 자주 의문이 나고 어려운 구절도 많아 경연의 신하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고산의 경학이 높음을 생각한 효종은 다시 成均館司藝로 特召하신 것이다.
임금이 自書한 敎書를 받고 그 말뜻이 심히 간절하여 마지못해서 부름에 나아갔다.
같은 해 3월 도성문 밖에 이르러 상소하여 전후의 무고 받은 사실을 아뢰고 벼슬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임금은 고산이 서울에 온것을 기뻐하여 다시 비답을 내려 빨리 入城하기를 재촉했다. 그렇게 되니까 時輩들의 猜忌와 嫉妬는 더욱 심해졌고, 그 가운데 正言 李萬雄이 傾陷의 論을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658년(효종, 72세) 3월에는 특별히 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이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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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이 더욱 치열해져 그를 질시하는 무리들이 “사람이 벼슬하는데 어찌 매양 특명으로만 할 수 있단 말인가”고 抗辯까지 하였다. 그러한 소리를 들은 고산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사직소를 13 번이나 올렸지만 그 때마다 승정원에서 기각 당하고 말았다. 그 해 4월에는 다시 소를 올려 정원의 壅蔽를 통박하고 이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기를 빌었다. 이번에는 효종도 어쩔 수 없이 고산의 퇴직을 허락하였고, 36) 고산은 歸南하지 못한 채 楊洲孤山 村舍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宋逡吉, 李瑞相 등이 主가 되어 南人 鄭介淸書院을 헐어버리고 그 신주를 불살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그 孫子 鄭國憲이 懷疏訟冤했으나 그 소장은 승정원에서 받아 주지도 않았다. 이에 고산은 국시가 어려워지고 선배 유학자가 무고 받음을 통분하게 여겨 數千言의 상소를 올리게 되었으나 이 번 일만 큼은 효종도 윤선도를 두둔하지 않고 윤선도의 상소를 <妄言>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1659년 (효종 10년 73세)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으니 하나는 山陵問題요 다른 하나는 趙大妃의 服制問題였던 것이다.
첫째문제에서 고산은 水原府 後山을 王陵 자리로 천거하였다. 그런데 수원 사람이 權勢要路에 뇌물을 주어 그 땅을 쓰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當路者 역시 “수원은 나라의 큰 鎭인데 邑을 옮기고 백성을 옮기게 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라 쓸 수가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산릉 자리는 이미 수원으로 정해지고 공사까지도 끝났는데 논란하는 사람은 더욱 불고함을 고집했다.
그런데 李尙眞, 奇重胤 등이 다시 建元陵의 안 뫼등성이를 추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대신 삼사와 송시열, 송준길 등이 가세하여 인산은 建元陵 내강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다음에 陸上對樹의 穎 傾으로 말미암아 결국 홍제동에 이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뒷날 正祖께서는 고산이 감정한 수원의 묘지에 대하여 격상하시고, 고산의 산릉의 전문<弘濟全書> 권 57권에 전재하였다. 그 공적으로 왕은 <孤山遺 稿>를 上梓시키고, 자손을 기용하여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다음은 趙大妃의 문제다. 이 문제가 처음부터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던
36) 원용문 , 전게서에서 재인용. p. 26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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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가 죽고(1645년, 인조 23년) 효종은 둘째아 들로써 왕세자가 되어 대위에 오르게 되고, 왕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효종의 喪을 당하여 조대비는 마땅히 장자를 위하여 3년 복을 입어야 하는데도, 宋時烈, 宋逡吉 등이 儀禮의 4가지 복제중에서 대통은 이었으나 옳은 큰아들이 아니라는 의미을 인용하여 朞年腹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37)
요컨대 서인이 이조판서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등의 주장은 효종이 비록 왕위를 계승하였다고는 하나 둘째 아들임에 틀림없으니 1년 복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남인인 진선, 윤휴, 장령, 허목, 전참의 윤선도 등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임에 틀림없으나 맏이가 죽고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맏아들과 다름없으므로 3년 복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禮論問題는 黨爭으로 飛火하여 권력구조상 小勢에 있던 南人들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번 禮訟에서 패배한 고산은 마침내 1667년(현종 8년 81세) 7 월 21일 임금의 특명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그 때 현종이 말하기를 “윤선도는 선조에서 대단히 예우 받던 신하로서 나이가 80이 넘었는데도 특별히 석방하라”는 엄명이 있었던 것이다.
8년간의 기나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그 해 8월 海南에 돌아왔으며, 9월에는 다시 芙蓉洞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5년 간 유유자적하면서 스스로 즐기는 생활을 하다가 1671년(현종 12년, 85세)6월 부용동 낙서재에서 천명을 마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 기간은 고산이 영광과 시련이 함께 한 시기로 효종의 등극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인 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임금에게는 恩寵을 받아왔지만, 그만큼 執權士類들의 嫉視 를 동시에 받아야 했다. 어떻든 그는 당쟁 세계에 뛰어 들어 그의 노년 기를 불태웠다고 할 만하다.
아래의 시는 효종의 능자리와 상복에 대한 자신의 정론을 따르지 않고, 서인측 양송을 따르는데 대한 심정을 표현한 시다. 38) 이 시에서도 고산의 곧은 절개와 성품을 엿볼 수 있다.
37) 윤성근, “윤선도 작품집”, 형설출판사, 1977, p 147-155.
38) 윤승현, 前揭書, p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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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독불항(고산 홀로 항복하지 않았네)
滄浪便作靑溟闊 큰 물이 일어나 푸른 바다같이 넓어져
莫辨長郊與大江 큰 벌판이 한강물로 분간할 수 없어라
底事玆山不埋沒 어찌하여 이 산만 침몰되어 잠기지 않고
天岡萬阜忽邊降 천만 작은 언덕은 갑자기 항복하여 늘어섰는고
아래의 시는 고산의 최종적 인생 정리의 뜻이 담겨진 시다. 그가 죽기 2년 전에 지은 작품으로 고산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열화와 같은 당쟁의 휘말림도 악착스런 세파의 시달림도 끝내는 순리대로 살다가 순리대로 죽고 말겠다는 ‘自然哲學’ 곧 ‘老莊哲學’의 본질인 것이 다. 39)
동하각(同何閣)
我豈能違世 내가 어찌 세상일을 거역했는지
世方興我違 세상은 어찌 나를 버리는가
號非中書位 높은 자리 원하지 않고
居似綠野規 대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리라 <孤山遺稿, 권 1, p.76>
이처럼 이 시기의 작품은 대체로 한시보다 가요가 더 많다. 이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도 있었지만 문학 작품의 질적인 면에서도 세련미와 원숙미를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현실적 삶에서는 정치적 소견이 배제되고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국은 이상 세계로 향한 자연으로의 귀향하는 삶을 살야만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39) 문영오, “고산 윤선도 한시연구”, 東國大學校韓國文學硏究所, 한국문학연구5, 1982,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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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學問과 思想的 배경
1) 학문적 배경
고산은 이른바 禮學의 대가라는 점에서 조선왕조 학자의 계열에서 제외될 수 없는 인물이다. 중국의 朱子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당대 학문의 사종으로 추앙받던 노론의 송시열과 맞서서 오히려 송시열(宋時烈) 을 당혹하게 만들만큼 윤고산의 예론은 철저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우암(尤菴, 송시열의 호)과 고산의 예론을 두고 각각 비판할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우암이 내심 상당히 당혹했던 기록이 산견 되는 것으로 보아 고산의 예론은 결코 경시될 수 없었던 것만은 움직일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이처럼 윤고산은 예론의 대가로서 一家를 이룬 학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시조시인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정치인. 학자. 시인이라는 세 개의 인물이 한 몸뚱이 속에 寓居했던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특히 우리의 역사상에서 손꼽히는 지성인으로서 그 인물이 ‘정 치인+학자+문학가’가 아닌 사람이 드물고, 또한 그들의 생활이 ‘출사+유 배+은둔’이라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나라 지성인은 대체로 이러한 인물과 생활상의 유형성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고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 고산의 경우처럼 입체적인 특징 40) 을 지닌 사람은 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특징적인 면모가 그의 학문적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朱子學의 受容 樣相과 그의 實學적 학문의 수용 양상의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朱子學>의 수용 양상
고산이 생존했던 조선조는 획일적 사상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고려말
40) 여기서 ‘입체적인 특징’이라 함은 본인의 견해로는 조서 사대부가 지닌 일반 적인 유학자적 태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산은 다양한 사상적 측면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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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입된 주자학으로 이론 무장한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 건국된 조선조는 학문. 도덕. 윤리 정치. 예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근원을 주자학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조의 사람들은 완벽하게 통일된 주자학에 의해 규제되었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사회를 주도하던 사대부들은 모두가 주자학자였으며 주자학을 현실 사회에 구현하고자 했던 정치인이었으며 주자의 예술철학을 따르고자 했던 문인들이었으므로 가장 투철하게 주자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었다고 볼 수 있다. 고산 역시 당시의 사대부들과 같이 朱子學을 修學하는 학자이자 정치인이며, 문인이었다. 그러나 고산의 문학은 조선조의 다른 문학 작품들에 비해 대단히 개성적인 면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주자 학의 면모를 담고 있으면서도 완전하게 주자학적 학풍을 가진 것 보다 고산 자신의 독특한 성품에서 비롯된 문학적 감수성과 그의 자연관에서 엿볼 수 있는 심미적인 안목이 결합해서 보여주는 개성이 돋보인다. 하지만 그의 대부분 작품들이 담고 있는 문학적 소양은 거의 儒者的 意識 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본다.
조선 주자학의 절정은 이황(1501~1570), 이이(1536~1584) 등 대학자들의 배출로 중국의 주자학을 능가하는 고도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 실천력의 결여와 당면한 실제 문제들에 대한 해결능 력의 상실 등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다. 주자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주자학이 학문적 한계성을 노출하자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양명학 쪽으로 그 한계성을 극복해 가는데 조선의 주자학은 스스로의 한계를 감지 할수록 더욱 자기 세력의 옹호에 집착하여 극단적인 폐쇄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자학 이외의 일체를 부정하는 조선중기 무렵에는 주자학이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저해하고 역행하는 중대한 요소로 작용하게 되고 주자학의 이러한 이론적 번잡성과 현실 대처 능력의 상실에 반발하여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면서 주자학 이전의 본원 유학적 성격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실학이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고산은 이처럼 주자학의 붕괴와 실학의 도래가 동시에 감지되는 시기에 살면서 스스로는 철저한 주자학자로서 일관하였으나 당시에 주도 권을 장악하던 주자학자들과는 잇따른 마찰을 일으켜서 조선조 중기의 주자학적 안목에서도 껄끄러운 ‘아웃사이더’ 41) 였고 후기의 실학 쪽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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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으로 너무 먼 소외자가 되었다.
고산이 당시의 주도 세력이었던 주자학자들에게 외면당했던 두 가지 이유는 첫째, 그가 당시에 실세였던 남인계열에 속하는 주도적 정치 세력에서 탈락되었던 것 둘째, 고산이 스스로 수학하고 신념했던 주자학이 당시의 주도 세력들이 추종하던 주자학의 말기적. 파행적 성격과 불화하여 매번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 등이다.
고산이 살았던 당시에는 당쟁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학문상의 단순한 이견 제시도 당파를 달리하면 기존 정권에 대한 도전이나 야욕으로 간주 되어 극력 배척되던 때인데 고산이 스스로 수학하여 체득한 주자학은 자기 세력 옹호에 급급하던 당시의 사변적 주장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고산은 정의감과 행동력을 겸비한 실천적 주자학을 주장 했기 때문이다. 고산은 그의 주자학적 신념을 그 당시의 사회 현실에 실제로 적용코자 부단히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은 유배와 은둔. 출사의 행로를 반복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산의 초기 주자학의 수용은 중종 때 사림파의 종통이라 할 수 있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기묘사화 때 같이 화를 입어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초기 주자학의 실천적 도학 정신을 철저한 ‘修己’ 로부터 비롯되는데 이러한 ‘修己’ 의 바탕은 <小學>을 근거로 한 것이 다. 고산은 어려서부터 사숙하던 곳이 없이 홀로 수학하다가 20세 되던해 우연히 집에서 책들을 정리하던 중에 숨겨져 전해오던 증조부의 <소 학>을 발견하고 비로소 주자학의 근본 정신에 접근하게 된다. 이러한 <小學>에 의한 주자학의 근본 정신에 대한 깊은 깨우침은 고산에게는 평생의 감언이었으며 계고가 되었고 고산의 인생관 정립에 근간이 되어 고산 자신의 구성 분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小學>에 기반을 둔 고산의 정통 주자학적 정신의 실천이 당시의 사회와 마찰을 일으켰던 첫 번째의 사건이 30세 때 조정의 비리와 과거의 부정 등을 낱낱이 파헤쳐 당시의 권력자였던 예조 판서 이이 첨을 벌하라는 상소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丙辰疏>였다. 이는 당시의 정황으로 보나 고산 자신의 말로나 모두 <小學>에 의해 닦여진 학자
41) 임형택, “한국문학사의 시각”, 창작과 비평사, 1984, pp. 68-69.
여기서는 조선조 사대부층을 ‘관인형’, ‘처사형’, ‘방외형’ 으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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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양심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산의 문학적 특질이나 혹은 그의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소학>을 윤선도는 어떤 태도로 받아들였는지를 상세하게 살펴 보기로 한다.
윤선도는 따로 스승을 찾아 학문을 익히지 않고, 가정에서 생부와 양부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열 한 살 이후 몇 년 동안 절간 에서 혼자 책을 읽고 사색한 이른 바 독학자이다. 가정의 넉넉한 재력으로 보든지, 자식을 유명한 선생께 보내어 가르침을 받게 함으로써 견문을 넓히고 학연을 쌓아 정치적 기반을 다지던 당시의 풍조로 보든지, 당시 조선조의 학문의 수준이 거의 절정에 달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스승들이 전국적으로 흔하였다는 점을 볼 때에 그가 아버지에게서 가학만을 읽히고 독학으로 성취하였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그의 인간성 형성에도 깊은 상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족한 가정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보수적 원칙주의 정보만으로써 그의 철학을 완결시키게 만들었을 듯 하다. 고산은 일정한 스승이 없이 가정 에서 부친에게 漢學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11세 때 되는 산사에 가서 책을 읽었는데, 그 때 중들이 水陸大會를 열어 儒釋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든 적이 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자기 방에 단정히 앉아 홀로 글읽기에 열중하니, 보는 사람마다 기특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아직 15세가 되기 전에 文辭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 글을 본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았 다. 또한 어려서부터 經書와 史書를 깊이 연구하여 심오한 학문적 소양을 쌓았기 때문에 어른들은 장차 그가 큰 어른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장자나 사마천의 책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己卯士禍 이후에는 <小學>이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부모들은 자제들에게 그 책을 보지 않도록 경계했으며 42) 심지어는 소학을 소장하고 있는 이조차 드문 형편이었다. 고산은 옛 책을 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 것은 그의 학문적 성취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하루에 6,7행을 정해놓고
42) 李在秀, “윤고산연구”, 學友社, 1955, 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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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 씩 읽어 나갔다. 그리고 말하기를 “사람의 모양이 되는 것은 여기에 다 있다” 라고 하였으니 그야말로 소학의 신봉자라고 할 만하다.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는 오로지 理趣를 숭상했고 사화는 별로 중요시 하지 않았다. 또 과거보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든 소학에 전념한 다음부터는 학문의 깊이가 더하여져 그의미를 관통하게 되었고 문장력 또한 눈부시게 발전하여 그 당시 명망 있는 선비들이 함께 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에 다시 聖賢의 經傳을 읽어 해득치 못하는 곳이 없게 되었다. 그가 평상시 집에 거처하고 있을 때에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좌하여 臥側安閑함이 전혀 없고 그의 자제나 비복도 그가 낮에 누워 있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다. 또 행동 거지가 분명한데다가 飮 食起居에 威儀가 있어 사람들이 은근히 두렵게 생각했으며, 성품이 忠義 强直하여 시비를 가림에 절대로 타협함이 없다하였다 한다. 그 때 疎庵 任叔英은 사방에 문명을 떨쳤던 사람인데, 고산이 평소에 지은 시를 보고 당대의 제일이라고 칭찬하면서 “이는 마땅히 장원급제할 사람이다”라고 호평했다는 것이다. 고산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게 될 때에는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소학을 먼저 배운 후에 사서육경(四書六 經)을 공부하게 했을 정도로 ‘小學’에 傾倒되었다.
(2) 實學사상의 수용 태도
고산의 학문적 특성은 스스로는 철저한 주자학의 복고를 의도하였던것 같으나 실제적으로는 당시 주자학의 궤도에서 상당히 이탈되어 실천 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드러내면서 그 무렵 발흥하기 시작하는 ‘실학’쪽으로 근접해 갔음을 알 수 있다. 43)
당시 조선 사회는 극히 폐쇄적인 朱者 尊崇時代로서 주자의 경전 해석에 일획도 임의대로 가감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절대적인 때였음에도 불구 하고 ‘고산’ 44) 은 선인들의 훈고에만 의존하지 않고 모든 성현과 先儒의 儒訓들을 심사 추구하여 스스로 깨우쳐서 그 뜻을 바로 알아 풀이하였고
43) 韓國哲學會編, 韓國哲學史, 동명사, 1987, pp. 90-94.
44) 孤山先生年譜, 卷之一 壬子 公二十六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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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 복서. 음양. 지리 등의 서적에도 널리 통하여 전심 연구하여 이론 중심의 공허한 당시의 학풍에 비해 대단히 실질적이고 주체적인 경향을 취하였는데 이러한 실질 추구의 학문적 경향은 해남 윤씨의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實學적이고 技學적인 학풍이 해남 윤씨의 한 특질이 되었다.
또한 당시 고산과 학문적 견해를 같이 했거나 고산의 학문을 이해했던 사람들의 학문적 경향을 살펴보면 고산의 학문적 특성 또한 짐작할 수있는데, 먼저 고산을 두 대군의 사부로 천거했던 張維(1587~1638)는 고산과 다른 서인의 계열에 속하여 권력의 중심권 안에 속했는데도 당시의 주자학의 횡포를 배격하고 이단으로 도외시되던 양명학의 자유주의 경향과 개성주의를 옹호하였는데 張維의 이러한 학문적 방향 전환은 실학의 전개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또, 현종 때의 <예송 사건>때 고산과 같은 남인 계열로서 3년 복설을 주장하는데 뜻을 같이 하던 許穆과 尹澔가 있다. 허목은(1592~1682)은 <學. 文. 書>의 삼고라는 칭을 들었던 석학으로 일상생활의 실용적 가치와 실질적 행위를 중시하였고 실사를 추구하였다.
고산 생존시의 실생활을 살펴보아도 고산은 단순히 이론만을 연구하던 학자가 아니라 당면하는 실제적인 생활 면의 문제 해결에 고심했던 經世 家의 모습을 다분히 드러냈는데 해남 윤씨의 전통이 원래 난민을 救恤하고 죄인을 방면케 했던 적선지가였지만 고산은 더욱 <小學>에서 가르치는 患難相恤의 뜻을 몸소 실천하여 가난한 친척들에게는 가산을 나눠주고 비복들은 후대하였으며 나무를 심고 물을 막는 간척 사업을 벌여 인근의 주민들에게 농토를 무상으로 분배해 주었으며 관직에 있을 때나 물러나 있을 때의 처지를 상관 않고 한결같이 백성을 위하는 <疏>를 번번 하게 올려 끊임없이 賢政愛民할 것을 촉구하고 백성들의 곤궁을 탄식하는 시를 써서 괴로움에 동참하는 등 자신의 학문과 생활이 합일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모습을 그의 생애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전 시대의 다른 주자학에 대한 반성으로써 현실 문제의 개혁에 많은 영향을 끼쳐 후기 실학파 특히 박학과 고증을 중시 하는 백과사전학파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남겼는데 천관우 45) 는 허목의 이러한 학문적 성격을 실학이라 정의하였었다. 許穆보다 20 년 정도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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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尹鎬는 허목을 선배로 섬기며 問學하였는데 그의 경전 연구는 종래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 <대학> <효경> 등이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장구와 주를 수정하여 주자비판의 改新經學子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당시의 정권 담당층이었던 송시열 일파에 의해 사문 난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고산과 학문적 견해를 같이 하거나 동지적 입장을 취했던 사람 들의 경향은 자신들의 학문을 의도적으로 실학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추구하고 나아가고자 했던 것들이 결국은 후기의 실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임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산의 학문적 위상이 마지막 주자학의 실체를 견지하 고자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선각자의 일면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이원적인 모습은 그가 처한 시기가 중세와 근세의 교체기였다는 역사적인 시대상황과도 맞물려 중세의 말기적 학자이면서 후기 실학의 태동을 예고해주는 선구자적 모습으로도 비춰지는 것이다.
2) 사상적 배경
(1) 儒敎思想
문학 작품이 마음과 현실, 그리고 사상과 경험, 이 넷이 서로 부딪치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 46) 을 받아들인다면, 문학관과 사상은 창작의 내면적인 두 요인일 것임은 당연하다 하겠으며, 이를 검토하여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작가나 작품을 연구함에 있어 선행되어져야 할 필수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시인은 그가 처했던 환경과 시대적 상황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그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과 그 시대에 성행했고 주름 잡던 작가 들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니 사상은 그 작가의 골격을 이루고 작가의 영
45) 천관우, 韓國史의 再發見, 일조각, 1975, p. 105.
46) 조동일, "문학연구방법", 지식산업사, 1980, p.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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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력이 내용과 형식을 이루는 것이다. 고산의 학문 세계와 문학 작품의 정신적 근간을 논할 때는 당연히 유교 중심적 사상에서 그 연구의 출발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유교의 중심 사상으로는 ‘道’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道는 태극이 되고, 음양으로 나뉘고 자연에는 오행으로 운용되며 인간에는 五倫, 五常 이 되는 것이다. 中庸에 “元. 亨. 利. 貞은 천도 지상이요, 仁. 義. 禮. 智 는 人性之綱”이라 한 것도 같은 뜻이며 유교 사상의 중핵이다. 孔子의 중심사상은 仁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道가 곧 仁이다. 도는 인간이 걸어 가야 하는 올바른 길, 바른 길이며 행동 철학이다. 47)
유학은 宋代에 와서 程子. 朱子가 性理學( ‘性命義理之學’의 준말 )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시켜 심성의 수양을 철저히 하면서 동시에 규범 법칙 및 자연법칙으로서의 그 理를 깊이 연구하여 그 理의 의미를 실현 하려는 학문이다. 麗末 安珦이 주자학을 들여와 성리학 시대가 열리고 조선시대의 人倫道德의 기본이 되었다.
그 실천율로 三綱五倫을 내세우며 구체적인 내용은 <小學>에서 제시 되어 <立敎>, <明倫>, <善行>, <嘉言> 등에서 인간이 행해야 할 길을 밝힌 것이다. <소학>은 유교 이념의 실천서이며 수신과 도덕 교훈서로서 고산이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였을 때 <소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次樂忘韻 二首>라는 시를 통하여 유교 사상이 담긴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次樂忘韻> 二首
淸和時節雪猶殘 화창한 봄인데도 봄은 아직 남아
誰信人間有此寒 이런 추운 날씨를 누가 믿을 것인가?
攬초해난皆所善 다 핀 난초 잎새 어루만지는 것도 좋고
47) 류연석. 최미애 共著, “고산 윤선도 시조에 나타난 思想性 연구”, 순천대학 교사범대학 부속 과학연구소, 과학과 교육 제 9집, 2001, pp.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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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山蔡服亦雲安 귀양살이 의복도 평안하구나
只綠愛國經身易 다만 나라 사랑하려다 내 몸 가벼이 여겨
終爲思親忍淚難 그로 인한 어버이 생각에 눈물 흘린다.
邪絲飛鴻斜日外 해는 기울고 저 멀리 기러기 날고
鎭胡樓上技欄干 진호루에 올라 난간에 기댄다.
(孤山遺稿 권 1 쪽수 16-17)
위의 시는 경원 유배지에서 지은 것으로 귀양살이의 착잡한 심정 속에서 충효의식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 道敎思想
도교는 古代 神仙說을 중심으로 不老長生을 이상적인 것으로 추구하며, 老子를 敎祖로 하고 後漢 때 張道陵이 창교하였다. 노자는 허무를 주제로 한 無爲自然說을 주장했다. 자연 그 자체가 하나의 원리이며 진리이니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도피의 생활을 했고 자연에 묻혀 안주하며 인위적인 것을 배척하였다. 또한 유교의 삼강오륜은 인간이 만든 것이요, 자연에 따르면 모두 필요 없는 거추장스런 것이라 했다.
노장학파들은 세상을 白眼視 하고 飮酒. 彈琴. 圍碁 등을 일삼고 즐겨 노장 허무의 언사를 입에 담았으니 이를 청담이라 하였다. 48) 그 예로 중국 남북조시대 죽림칠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도교의 내용은 노장사상과 신선사상이 결합한 것으로 노장 사상의 근본은 무위 자연을 이상으로 삼고 仁, 義, 忠, 孝 등을 인위적인 수단으로 생각했다. 신선사상의 기본은 秘法方術로서 질병과 제액을 물리치며 養生, 養氣, 呼吸鍊丹 등에 의한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도교의식을 受容했고, 49) 여기에는 昭格
48) 박성의, “韓國文學背景硏究”, 예그린출판사, 1978, 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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殿이 있어 祈雨, 治病, 救福을 맡아보았다. 중종때 趙光祖의 건의로 국가적 도교관서인 소격서를 없앴으나 이는 우리 민족의 의식 세계에 잠재되어 민간 종교로 전승되어 왔으며 이런 신선사상이나 허무사상이 문학 작품에 반영되었다.
<孤山遺稿> 第 一에 <用前韻戱作遊仙辭求和> 라는 漢詩에서 ‘鍊丹疑 學參同契’, ‘金鼎何難火次第’ 등 도교의 不老不死의 방안들을 읊은 것으로 보아 고산이 도교에 심취했으며 노장의 書나 도교 서적을 탐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산은 芙蓉洞을 ‘仙跡甚多 且奇峯環立 基形或似芙蓉花’라 했으며 신선들이 사는 蓬萊島라 인식하였고 琪花瑤草만이 자라는 仙界라고 생각했다. 고산은 ‘由來神仙豈異人’ 이라 하여 神仙과 世人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이런 태도나 사고방식은 유가의 공통적인 특질이라 생각된다.
당시 儒者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현달하기를 바랐고 은퇴할 때는 자연 속에서 신선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고산이 관로에서 물러나 금쇄동. 문소동. 부용동에 묻혀 자연을 벗삼고 은둔한 것은 노장의 은둔도피사상의 영향으로 신선과 같은 생활을 즐기려 했던 듯하다. 또 고산은 <금쇄동기>에서 그 곳이 선계임을 묘사함으로써 도교에 젖어 있음을 보여준다.
고산문학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연구는 저서나 논문에서 단편적으로 논의되어 왔는데, 많은 연구 중에서 고산의 儒者的 指向意識과 관련하여볼 때 가장 공감이 가는 연구물로 원용문의 논의가 있다. 그는 작품론에서 고산의 사상적 배경을 동양문화의 맥락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仁義를 중심으로 한 유교의 정치철학인 經世濟民과 敎化善政을 강조한 작품이 유교 사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또한 江湖自然에서 생활을 한 은둔 도피 사상은 老壯哲學에 바탕을 두었다고 했으며 작품을 통해 볼 때 고산은 노장철학에 상당히 심취해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 다.
49) 李太祖는 星祭檀을 쌓고 太白 金星에 제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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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제사상
그는 임금은 백성으로 하늘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하고, 백성들이 먹을 것을 넉넉케 해주고 백성들의 재물을 많게 해주는 것이 天命을 길이 하는 방법이라 하였다. 50) 마찬가지로 대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대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 하고, 백성의 의식을 넉넉히 해주고, 민심을 묵고,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고, 天命을 정함으로써 宗社의 큰 계책을 삼아야 한다 하였다. 51)
이처럼 정치적 안정은 결국, 경제적 기반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 므로 재물을 끌어 모으면 백성은 흩어지고, 재물을 흩어주면 백성들은 모여들게 되느니, 진실로 백성을 모여들게 하려면 재물을 흩어주는 것이 옳은 일이다. 52) 이는 <大學>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민심을 모으는 방법이 바로 경제적 시혜를 베푸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재물을 모아들이면 백성은 흩어지게 된다’ 하였는데, 이는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과중하게 거둬들임으로써 민심의 離叛 현상을 초래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고산은 당시의 田制의 과중으로 인한 백성들의 궁핍현상과 도둑의 성행을 우려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경제 안정의 기초가 토지에 있고, 토지 제도가 바르게 되어야 조세의 평등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均田은 국가의 大事라 하고, 均制가 균등해야 하고 과중 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은 고르지 못하고 과중에 통탄치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53)
田制가 고르지 못하면 다스릴 수 없으므로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토지를 고르게 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지 않음이 없었다 한다.
토지를 고르게 함은 세금을 고르게 하기 위함이고, 세금을 고르게 함은 백성을 이롭게 함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공자가 '적은 것을
50) <孤山遺稿> 卷 二, 乙亥疏 : “嗚呼 君以民爲天 民以食爲天 古裕民食阜民財 乃祈天永命 之道也”.
51) 위와 같은 글 : “傳曰 道得衆則得國 失衆則失國 伏願殿下留神於此而以裕民 食 結民心 固邦本 宅天命 爲宗社大計也.”
52) 위와 같은 책, 卷 二, ‘時弊四條疏“ : ”傳曰 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笱可以聚 民則散財可也.“ 53) 위와 같은 글 : “大槪 田制要均要不過重 而今也不均而過重 臣竊痛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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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하지 말고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하라'는 말에 근본을 둔 것으로 백성의 賦役은 고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고산은 전통 유가의 정신을 계승하여 정치에 있어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것이며 특히 조세 내지 국민 부담의 평등을 강조하였다.
(4) 사회사상
그는 기강의 확립을 통해 사회 기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陳時務八條疏>에서 時務八條의 하나로서 ‘振紀綱’을 강조하고 三綱五 常, 天序, 天秩이 우주의 綱紀가 되고 국가의 綱紀가 되는 것으로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54) 고 말했다.
그런데 기강을 바로 잡는데는 인재를 변별하고 상벌을 공정하게 하는데 있다. 人才를 변별한다 함은 君子가 등용되고, 소인이 제거되어 인사의 정의가 세워짐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당시의 현실에서는 權奸 李爾瞻이 권력의 상층부에서 마음대로 專橫하는 형편이었기에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할 것이다. 더구나 朋黨 의 폐해가 극심하여 올바른 人材가 제대로 등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상벌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하는 것이므로, '어진 이를 추천 하는 자는 상을 주는 것이 옳고, 어진 이를 가로막는 자는 벌하는 것이 옳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는 상을 주는 것이 옳고, 나라를 부끄럽게 하는 자는 벌하는 것이 옳다. 정직한 자는 상주는 것이 옳고, 속이는 자는 벌주는 것이 옳다. 공평한 자는 상을 주는 것이 옳고, 사사로운 자는 벌주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런데 상주고, 벌주는 것은 마땅히 공평 하고 균등해야하며, ‘상은 모름지기 신중해야 하고 벌은 반드시 행하되, 상벌의 권이 마땅히 위에 있어야지 아래에 있어서는 안된다’ 55) 고 하였 다.
또한 당시 신분상 많은 제약 하에서 차별대우를 받던 노예 등 불우 계층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貴賤에 定分이
54) 황의동. 앞의 책 재인용 <고산유고> 권5 ‘鄕社堂 條約’ : “孔子曰 不患寡而患不 均......民志賊役 不可不均也” 55) < 고산유고> 앞의 책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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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마침내 변할 수 없다면, 옛날의 소위 公卿의 자식이 庶人이 되고 서인의 자식이 공경이 되는 것은 모두 헛소리인가? 天地 사이에 만물은 일정히 바꿀 수 없는 이치가 없으므로, 성인易을 지어 밝혔으니, 어찌 홀로 노예만 萬代토록 노예가 되는 이치가 있느냐고 했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신분의 固着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고, 신분 세습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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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儒者指向的 意志
고산은 특수한 시대상황과 문학적 분위기 속에서 작품 활동을 전개 하던 작가이다. 그가 처한 시대는 표면적으로는 중세적으로 경직된 이념과 신분 질서를 고수하려던 몸부림이 강하였으나, 내부에서는 근대적 사상과 가치의식이 싹트고 실제로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가 붕괴되기 시작 하는, 근대사회로의 이행 과도기였다.
또한 한문 문학만을 본격 문학으로 인정하고 국문 문학은 문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사대부의 여가 시간을 활용하는 여기 정도로 인식되던 종래의 문학 의식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國文文學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 문학이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문학은 道를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文以載道論에 대응하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이 표출된 것이라야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의식이 조금씩 싹트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과 문학적 분위기 속에서 창출된 고산의 문학관은 어떠했을까? 고산의 문학관을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道本文末論의 보수파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고산 자신은 문학관을 따로 피력해 놓은 것은 발견되지 않는데 다만 그의 서신이나 洪宇遠이 쓴 謚狀에서나 시조를 짓고 난 후의 跋文 등에서 그의 문학관을 엿 볼 수 있다. 洪宇遠 이 쓴 謚狀을 살펴보면 평생 시를 읊는 것이나 글을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누가 물으면 답하고 일이 있으면 지었다. 앞사람들을 踏襲하지 않고 新意를 創立하였다.
반드시 經書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였으며 이치를 숭상하고 辭를 숭상하지 않았다. 56)
고산이 평생 시를 읊거나 글을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는 것은 글을 오락이나 사교의 목적으로 사용함을 탐탁치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이나 풍류가 오락의 한 면이 될 수 없는 道의 일종으로 보는 입장인 것이다. 이로 보아 고산 문학의 일면이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
56) <孤山遺稿>, 卷 之 六, 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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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윤선도가 지니고 있던 근본적인 文의 터전은 아무래도 道本文末論의 입장에 서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意識 志向의 根源은 결국 儒學者的 태도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보아진다. 57) 이러한 사실로 보더라도 그의 문학에 내재된 의식의 바탕은 儒者指向的 意志가 가장 중요한 뿌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고산의 유자지향적 의지가 담긴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산은 조선조에 활약했던 修己治人의 학자였던 만큼 그의 문학작품에도 조선조의 다른 문학 작품들처럼 주자학적 문예의식에서 발로된 것이 대부분이다. 58) 먼저 고산의 많은 시조작품들 중에서도 주자학적 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는 대표적 작품부터 살피고자 한다. 가장 성공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오우가>라 할 수 있다
내 버디 몇이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머엇 하리.
(水)
구름 빗치 조타 하나 검기를 자로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는 믈 뿐인가 하노라.
(石)
고즌 므스 일로 퓌며셔 쉬이 디고
플은 어이 하야 프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손 바회 뿐인가 하노라.
57) 이정자, 時調文學硏究論, 국학자료원, 2003, pp. 152-160.
58) 이민흥, 士林波 文學의 硏究, 형설출판사,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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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
뎌우면 곳 퓌고 치우면 닙 디거늘
솔아 너는 얻디 눈 서리를 모르는다.
구천(九泉)의 불희 고든 줄을 글로하야 아노라.
(竹)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는다.
뎌러코 사시예 프르니 그를 됴햐 하노라.
(月)
쟈근 거시 노피 떠셔 만물을 다 비취니
밤듕의 광월(光月)이 너만 하니 또 잇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벋인가 하노라.
고산이 선택한 ‘五友’는 인간이 아닌 水石松竹月의 다섯 자연물이다.
고산의 交友관계에 대하여는 별다르게 알려진 것이 없다. 고산 스스로도 ‘신은 본디 성질이 게을러서 벗을 사귀지 않으며 출입도 드물어.....’ 라고 할만큼 인간적인 교우 관계는 별무했던 것 같은데 이는 그 성격이 강직 하고 비타협적이고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실상을 간파하고 인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진작 포기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59)
그리하여 고산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림으로써 더욱 더 자연에 천착 하여 갔고 인간에게서 찾지 못한 이상적이고 항구여일한 덕목을 자연에서 발견하여 그를 벗삼고 수신의 모범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벌써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보지 않고 탐미의 대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고산이 생각하는 윤리적 기준에 맞추어 숨겨진 본질을 찾아내어 그것을 자신의 修身의 모범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산의 사상적 경향은 그가 어릴 때부터 탐독했던 <소학>의 교본을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학자적 양심에서 비롯된 당연한 삶의 태도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59) 이민흥, 앞의 책 재인용, p. 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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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深菴>
蓮華峯下淨深菴 연화봉 아래 있는 정심암
金碧輝煌照佛輝 암자의 휘황함 빛이 나고
辛苦上人耽道義 스님의 고생스런 구도는
吾儒見此可懷慙 유자인 나는 부끄러움 느끼네.
< '遺稿' 卷 一. p.71 >
<雨後謠>
궂은 비 개단말가 흐르던 구름 걷단 말가
앞 내희 깊은 소회 다 맑았다 하나
다 진실로 맑기곳 맑아시면 갓끈 씻어 오리라
위의 시도 고산의 나이 32세에 경원 유배지에서 지은 <雨後謠>의 전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궂은 비> <흐리던 구름><흐린 물> <맑은 물>등의 자연물에 자신의 신념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위의 시 종장에서 “진실로 디와 아시면 갇긴 시서 오리라”라고 한 것은 어찌 <仁> 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와 뜻이 통한다. 즉 <仁>을 강조하고 있다. 인이란 공자의 가르침이요, 사대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실천 도덕이 아니 던가 이로 본다면 이 시도 공자의 <仁>을 바탕으로 했으니 곧 儒家思想 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고산의 문학 속에서 그가 넉넉한 생활을 하면서도 내면적 순수성을 잃지 않으려 했던 인간적 고뇌를 절감할 수 있다. 그의 문학 세계에 표출 되는 순수한 정감과 아름다운 선율이 이렇듯 구체적 현실과 긴밀하게 조응하고 있다는데 그 가치 또한 높다 하겠다. 자연을 읊은 상당수의 시에 있어서도 즉흥적인 관조의 자세로 읊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겠다. 대체로 자신의 의지와 심미감을 주관화하여 노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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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는 물론 조선조 사대부들의 유학적 이념에 합당한 문학적 현상이 기도 하다. 다만 고산의 문학은 유학적 이상과 그에 따른 일상적 삶의 인식과 자연관이 얼마나 심도 있고 독특한 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연적호운(詠硯的 呼韻)
形似仙桃落九天 천도 복숭아 모양 연적으로 벼루에다 물을 따니
口如鵬噣擧波邊 봉새부리 모양으로부터 벼루 가득 물결이 일어
胸中雲夢惟泓識 가슴엔 큰 꿈과 오직 큰 배움을
麗澤多年意獨堅 여러 해 공부하여 홀로 뜻을 이루리
위의 시는 고산이 16세 때 입양 문서를 예조에서 공증받았고 17세에는 결혼도 하여 과거에 장원을 했다. 당시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지어진 시다. 앞부분은 고산의 선천적 고결함과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학문에만 심취하여 자란 그의 인격과 성향이 그대로 녹아 있는 작품이다. 그의 순수한 마음의 결 위에 청운의 꿈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고산의 장밋빛 꿈이 고결하게 녹아 있는 시적 분위기가 학문적 소양을 닦은 유학자다운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60)
차운답인(次韻答人)
花落林初茂 꽃 지면 숲은 무성해지고
春歸日更遲 봄 오면 해는 더욱 길어져
一元宜靜睹 자연의 조화를 자세히 살피니
四序臨環移 사철은 차례로 옮아간다.
燕語薔薇架 제비는 장미 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60) 문영오, “孤山 尹仙道의 漢詩 硏究”, 한국문학연구 5, 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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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楊柳枝櫻 앵무는 버들가지 위에서 노래부르는
風光數處好 경치가 곳에 따라 좋기만 한데
佳興少人知 아름답고 흥겨움을 아는 사람은 적어라.
이 시는 고산이 사부시절인 43세에 지어진 것으로 자연에 대한 시적 감수성과 굴곡진 그의 인생살이의 체험 속에서 깨달은 심정이 살아 있는 시다. 많은 사고 과정의 끝에 나올 수 있는 그의 허무함과 그 허무함이 조금은 여과되어 어느 한 고비를 뛰어 넘은 학자의 초연함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작품이다. 간결하고 서정적인 작품으로 고산의 인품과 정제된 감정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앞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그의 작품 성향으로 보아 그의 작품 대부분유 자적 의식의 기반 위에서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을 주제별로 크게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 사군의식 (事君意識)
그의 작품에서 사군을 주제로 한 것으로는 <遣懷謠> 5수 중 3수가더 있다. 고산은 권력에 대응하여 정의를 부르짖다 부친 유기는 강원도 관찰사직에서 罷職 당하고 본인은 서울서 2000여 리나 떨어진 오지로 유배되었다.
내일 망년된 줄 내라야 모손가
이 어리기도 님위 타시로쇠
아 아리 닐러도 님이 헤여보쇼셔 <견회요 2>
고산이 올린 수 천언의 상소도 개인의 영달보다도 국가의 안위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귀양살이의 혹독한 형벌이라 “내일 망녕된줄 내라야 모손가”란 구절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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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 울분, 좌절감 등이 뒤범벅이 되어 이런 자책의 구절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61) “이 어리기도 님 위 타시로쇠”에서 엿볼 수 있는 심정은 이 마음 어리석었던 것도 다 임금을 위하는 것이라는 충성심을 엿볼수 있으니 이 시도 충효사상이 작품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秋셩城鎭딘胡縷밧귀 우러 녜 뎌 시내야
므음호리라 書듀夜야의 흐르다
님向향 내 뜯을조차 그칠뉘 모로다 (견회요 3)
위의 시도 慶源 配所에서 그칠 줄 모르는 임향한 일편단심을 읊은 시조이다. 종장에서 자신의 임향한 일편단심을 끊어지지 않는 시냇물에 비겨 표현한 것이다. 王邦衍이 어린 단종을 영월에, 일편단심을 끊어지지 않는 시냇물에 비겨 표현한 것이다.
왕방연이 어린 단종을 영월로 유배시켜 놓고 돌아오다 애절한 심정을 읊었다는 시조의 한 구절 “이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와 흡사함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조선사대부들의 의식 밑바탕에는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유학자적인 의식이 작품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같다.
2. 孝親意識
어버이 그릴 줄을 처음부터 아란마
님군 向 뜯도 하히 삼겨시니
眞實로 님군을 니면 긔 不孝인가 녀기롸. (견회요 5)
고산은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丙辰疏를 올렸고 그 일로 큰 화를 미
61) 정병욱, 학국 고전의 재인식, 홍성사, 1983,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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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게 하였다. 그 죄책감으로 부친과 임금을 놓고 효가 먼저냐 충이 먼저 냐에 대한 갈등의 흔적이 역력하며 결국은 충효는 곧 일치하고 임금의 은혜를 잊는 것이 불효가 된다하여 충성을 함으로써 불효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려는 흔적을 엿볼 수 있다. 62)
이와 같이 고산의 초기 시는 아직도 여타 사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하고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孤山이 아직도 젊었기 때문에 오로지 목적한 방향 외에는 눈 돌릴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한 가지의 사상이 배어 나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의 도리이자 조선조 유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기에 자연 스럽게 孝 사상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만코 만코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니 (견회요 4)
위의 시는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에 치우친 충효의 시를 많이 읊조리는데 비해 이 시는 뼈 속에 사무친 부모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을 반복과 대구로 구성하여 자신을 짝 잃은 외기러기에 비유하여 표현의 묘미를 얻고 있다. 진솔한 자신의 감정 표현이 매우 절절 하여 가슴에 와 닿는다. 63)
조선조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갖는 공통점을 들자면 사군의식과 효친사상 중에서 특히 사군의식에 그 무게가 두어지는 경향이 많지만 이 시는 고산의 순수한 효친의식이 가식 없이 순수하게 충만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하는 아름다운 시라고 볼 수 있다.
62) 류연석, 최미애, ‘고산 시조에 나타난 思想性 硏究“, 과학과 교육 9, 순천대학교 사범대학부속 과학 연구소, 2001, p. 11-12.
63) 문영오, “윤선도론”, 고산연구 4호, 고산연구회, 1990, pp.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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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귀기행(南歸記行)>
만력 39년(서기1611년), 북두성이 바로 서는 11월 7일.
거문고 수선할 약 구하는 일을 마치고
멀리 부모님 고향 그리며 해남으로 향한다.
집안의 경사와 기쁜 일 알리는 여정이지만
잠시나마 동기간의 이별을 어이 견딜까.
머나먼 여행, 말을 끌고 한강을 건너며
이별의 아쉬움 청문 한 곡조를 나눈다.
광릉의 산 오두막은 한밤중이오.
이부현(利富峴)고개 벌써 어두워진다.
사람의 목숨 재천인데 호환이 두려울까.
소동파의 하인이 풀었던 방법을 써 보리라.
-중략-
집 앞에 이르니 밤은 벌써 깊어
문 밖에 자던 새 놀라 푸득거리고
작은 동생 종종걸음으로 문턱을 넘어
막내 누이와 친척들 비단 장막 걷고 반기네.
어버이 사랑 자식 효도 되뇌기 몇 번이던가.
질병과 기한에서 풀려난 걸 의심한다네.
시골사람 이로부터 먼 나들이 말고
먼 나들이도 다시는 오랜동안 말라.
이 시는 孤山遺稿에 실려 있는 한시인데 처음으로 문영오(文永午) 교수가 全文을 번역하여 널리 알려 진 시이다. 문 교수는 고산의 남귀기행을 두보의 북정(北征)과 정철(鄭澈)의 관동별곡과 견주면서 남귀기행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작품이다. 64)
여기서도 고산은 자기 집안에 대한 애틋한 정을 호들갑스럽게 표현하지 않았고 장부와 학자다운 풍모가 자연스럽게 배여 있어 느낌이 읽는
64) 류근안, “윤선도 한시 연구”, 군산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p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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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하여금 비교적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 가슴 밑바탕에서 무척이나 애끓는 감정이 스며나게 만든 작품이 다. 이 시의 창작동기의 밑바탕에는 충과 효와 형제애에 대한 儒學的 意 識이 깔려있다. 왠지 모르게 한글 시의 분위기가 묘하게 결합되어 색다른 느낌을 주는 詩다 .
<祭 文>
만력(萬曆) 47년(1620년) 11월 26일 불효한 아들 선도는 귀양살이하는이 곳(기장)에서 울부짖으며 북쪽을 바라옵고 절을 올리면서 집안 일꾼을 시켜 변변치 못한 제물을 보내어 아버님 영전에 삼가 올리나이다. 불초한 아들은 볼 모양 없이 나라에 죄를 짓고 이 먼 곳에 와 있나이다.
또한 임금님께 버림받고도 스스로 죽지 못하고 그 화근이 아버님께 미치게 되었나이다.
아버님이 병중에 계신 줄 알면서도 의원을 불러 시중 한번 하지 못하 였을 뿐만 아니라 임종에 들어서 그 자리조차 지키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게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장례까지 치루지 못하였나이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분묘에 풀이 제법 자라도록 아직 성묘도 못하고 있나이다. 먼 옛날에서 지금까지 천지 사방을 둘러보아도 소자와 같이 불효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사오며 이것이 애달프고 원통한 사정이 어디에 있사오리까.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모두 애를 끓지 않는 것이 없사오며 두루 헤아릴 수도 형언할 길이 없사옵니다.
-중략-
병진년(1616년) 대궐 문 앞에 나아가 과격한 말로 상소를 올리고져 할때 아버님께서는 처음 말렸으나 다시 간곡히 말씀드리니 마침내 허락해 주셨는데 말림은 아들을 사랑하는 정의 깊음이었고 허락해 주심은 나라를 위한 길이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지요. 이토록 자식을 사랑하셨 지만 옳은 일에는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허락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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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나이다. 보통 어버이로서는 해 낼 수 없는 일이 옵니다. 이렇듯이 진실 되어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보옵니다.
-하략-
궁벽한 이 곳 하릴없이 흐르는 눈물로 하늘 저쪽 너한테 소식 자주 보내노라 귀양살이 너 한 몸 병 없기 바랄 뿐애비사 호미 메고 밭간들 무슨 험이 있으랴.
날마다 이 글을 눈물로 읽으면서 멀리서 그리는 아버님 생각에 넉넉한 위로를 받았사옵니다. 생각건대 소자가 대궐문 앞에서 부르짖음이 비록 광망하였다 하더라도 이 또한 시운이요, 운명이었습니다.
처음엔 어떤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것도 아니요. 어떤 명예를 얻기 위해 출발한 것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아버님의 깊은 뜻을 잊어버리고 만 행위가 되었습니다. 하오나 아버님 마음 속은 옳은 길이다 여기시고 한스 럽게 여기지 않으셨사옵니다.
- 하략 -
위의 글은 1620년 아버지 제사 때 고산이 올린 제문이다. 고산이 기장 에서 지은 글로서 아버지에 대한 불효함을 통절하게 느끼게 해주는 대목일 뿐만 아니라. 고산이 바르지 못한 일과 타협하지 않는 정의로움의 정치적 소신과 성향이 결국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르침, 그의 교육환경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글이다. 이런 점역시 고산의 儒者的 의식과 그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려 했던 그의 學者 的 태도의 꼿꼿함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글이라고 본다. 65)
65) 원용문, 윤선도 한시와 시조의 상관성 고찰, 고산연구 제 3호, 고산연구회, 1989, p. 10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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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사상 이수(對目思想 二首)
雨退雲消月色新 비 갠 뒤 달빛 한층 깨끗하고
靑天萬里淨無塵 끝없이 맑은 하늘 유리알 같아
遙知此夜高堂上 알고 말고 이런 밤 어버이께서는
座對兒孫說遠人 손자와 마주앉아 자식을 걱정하시리
秋城明月巨頭看 秋城서 머리 들어 밝은 달 보니
月照東湖也一般 동호를 비춘 달빛 고향과 같아
姮娥若許踿薄語 발을 걷고 항아와 얘기 된다면
慾問高堂宿食安 어버이 숙식이나 편안하신지 묻고 싶어.
<孤山遺稿 卷 一, 16>
이 시의 경우는 달이 대화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고산은 2000리 밖경원에서 달을 매개로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나타내고 있다. 어버이의 반대를 뿌리치고 올린 상소, 그 죄목으로 얻어진 귀양살이 이기에 어버 이에 대한 정은 더 절절했을 것이다. 좌절과 미련, 원망과 죄책감이 엇갈린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산의 비애는 더욱 더 커져만 갔을 것이다.
<睡覺思親二首>
庭圍溫情誠宜念 부모님의 안부 진실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데
宗社安危豈忍看 종사의 안위를 어찌 그냥 볼 수 있으랴
以孝爲忠忠便孝 효로써 충을 하는 것이니 충이 곧 효인데
孰云忠孝兩全難 누가 충효를 둘 다 온전히 하기가 어렵다고 했는가
(孤山遺稿 卷之 一詩.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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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懷謠 五首>
어버이 그릴 줄을 처음부터 아란마
임군 향한 뜯도 하히 삼겨시니
진실로 님군을 니면 기 불효인가 녀기롸
(孤山遺稿 卷 六下 十七 )
한시는 1617년 31세 때 이루어졌고, 시조는 1618년 32세 때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모두 경원유배 시기에 지어 진 것이니,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평소 고산의 성품으로 보아 부친의 안부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유교의 근본 사상이 忠君理念이라면 고산이 儒者로서 가장 바람직한 충효 겸전을 이루는 것이었다. 어버 이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본다면 이 또한 고산의 사상적 근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事君과 孝 의식 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次樂忘韻 三首>
人間百事己忘情 一念君親耿耿明
秋思便從醒後情 嘉견時向夢中成
天連絶暮山連海 風滿長郊月萬城
頭有書生强狼意 此間心地亦能淸
인간백사를 이미 내 정에서 잊어버렸지마는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일념만은 말똥말똥하고 분명해지네
근심스러운 생각은 술 깬 뒤로부터 기승을 부리고
아름다운 계획은 때때로 꿈속에서나 이루어진다.
하늘은 인간 세상에 떨어진 사막에, 산은 바다에 이어졌네.
바람은 긴 들에 가득하고 달빛은 성 안에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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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이 강하고 굳센 뜻이 있는 것에 힘입어서
이 사이에서도 마음이 또한 맑을 수가 있다.
위의 시 역시 그의 효 의식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나타내 주었다.
충효 사상을 최고의 이념으로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를 실현시킬수 없다는 점에서 작품의 비극적인 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3. 社會參與의지와 批判意識
1) 사회참여의지
次歡喜院壁上韻 (차환희원벽상운)
歡喜院中歡喜無 환희원에 와도 환희는 없고
江南歸客興長吁 강남가는 나그네 긴 탄식하네
經綸未展病於此 경륜을 펴기도 전에 병이 나니
萬億蒼生何日蘇 온 백성들은 언제쯤 소생시킬까
슬프나 즐거오나 옳다하나 외다하나
내 몸의 해 올 일만 닷고 닷글 뿐이언정
그 밧긔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이시랴. (견회요 1)
경원의 배소에서 지은 이 시조는 윤선도의 일생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철저한 선민 의식이 결코 왜곡되거나 변질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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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음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의 상황은 현실의 문제이다.
이 현실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야겠다는 자기 의지의 확인이 이 시조의 의미인데, 이것은 사실상 현실과의 대결에서 밀려 난 자의 자기 倣氣요, 실현이다. 즉 자신의 모든 일은 어떻게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내 몸의 해 올 일'을 설정하는 것은 현실과의 단절 의지를 드러내는 관념적인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관념적 표현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현실에 대한 중압감을 우리는 이 시조의 이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66)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과의 관계가 상실될 때 윤선도 자신의 입지마저 불안해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예감을 이 시조에서 받게 된다. 현실의 부정은 곧 이 현실 속에 있는 자신의 부정이라는 치명적 손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현실의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현실의 선택적 부정으로 자신의 관념을 합리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일 망령된 줄 내라 하여 모를 손가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다
아뫼 아무리 일러도 님이 헤여 보소서 <견회요 2>
여기서 님과 나 자신, 그리고 님이 제외된 현실까지도 아울러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지극히 유교적인 현실 인식인 것이요, 여기서 님은 나와의 관계만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고 님이 제외된 현실, 나와 대립된 관계만으로 설정되어 있고, 따라서 님은 그 양자를 아울러 조감하는 위치에 서서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전통적 사대부의 관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와 대립된 현실과 내가
66) 이화형, “고산시조의 존재적 사고”, 한국어문학 38, 1997, pp. 34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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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격에 놓여 있고, 이를 조정하는 님을 보다 상승된 우위의 입장에 놓음 으로써, 님을 하늘과 연관짓는 天道思想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67)
이처럼 윤선도가 바라는 이상적 현실은 님의 긍정적인 면의 확대라는 전통적 방식의 설명 그 이상이 아니다.
궂은 비 개단말가 흐르던 구름 걷단 말가
앞 내희 깊은 소회 다 맑았다 하나다
진실로 맑기곳 맑아시면 갓끈 씻어 오리라 <우후요>
이 시에서는 ‘궂은 비→ 개다, 구름 → 걷히다, 깊은 소 → 맑아지 다’ 라는 상황의 변화는 바로 님의 긍정적인 면의 확대에 다름 아니다.
이 긍정적인 면의 확대라는 징조만이라도 感發되어 작품화할 정도로 윤선도는 현상의 변화에 목말라 있었다.
그 현상의 변화는 바로 자신의 出仕와 직결된다. 종장의 ‘갓끈 씻는다’의 의미는 屈原의 漁父詞의 끝 구절에서 인용된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구절이 성인의 입장에서 대립된 현실까지를 포용하고 결국은 時俗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니는데, 고산의 의지는 대립된 현실의 극소화라는 대립적 상황에 있다는 차이에 기인한다. 즉 나와 님의 긍정적인 측면은 완전한 일치에 놓여 있다는 인식과 그 결과로서 처절한 패배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자아의 변화가 있어야 해결되는 문제이 다. 님의 제외된 현실 그것 또한 결국 자아의 또 다른 일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아의 또 다른 일면에 대한 不感은 결국 현실에 대한 自斃적 태도로 발전한다.
인간은 결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현실의 부정이 치열하게 드러난 것은 현실에 대한 집착의 강도와 같은 대열에 놓을수 있다. 더구나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윤선도에게 있어 현실 또는 속세의 배제는 철저한 문학적 기교였다는 것이다.
67) 신동욱, 우리의 삶과 문학, 고려원, 1989, p.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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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교는 결국 고산 작품의 후기에 이르러 현실과 인공적 자연을 초월하는 機制로서 꿈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꿈으로의 돌입은 총체적 존재의 만남을 희구하는 것이고, 이는 바로 현실에서의 불만이 入 夢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일명 몽유계의 작품과 그 출발이 같아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68)
<夢天謠>
상해런가 白玉京에 올라가니
玉皇은 반기시나 群仙이 꺼리나다
두어라 五湖烟月이 내 分일시 올탓다
이는 인생 역정에 대한 분명한 자기 확인이다. 자신의 인생이 또 다시 시작되어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인된 것이다. 하늘의 옥황과 군선은 현실의 님과, 대립되는 세력의 유추 그 이상이 아니다. 님과 관련된 옥황은 따라서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으로 혼합되어 있다는 전기 작품의 경향은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현실을 초월한 천상의 모습이 현실의 구도와 일치할 때, 그것은 결국 체념의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옥황끠 와보쟈 더니 다못야 오나 다’ (몽천요 3) 의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보리밥 픗믈을 알마초 머근 후에
바회끗 믈의 슬지 노니노라
그나믄 녀나믄 일이야 부줄이 이시랴 <山中新曲, 만흥 2>
68) 정병헌, “고산국문 시가의 변모 양상”, 고산 연구 2호, 고산 연구회, 1988, pp. 257-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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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식사와 더불어 물가에서 노니는 행위의 자유로운 생활이 선명 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 풍류적인 삶의 모습이 현실을 거쳐서 도달했 다는 점이 이 시의 이해에 더 적합한 것 같다. 자유와 자적의 즐거움이 ‘그나믄 여나믄 일’이라는 모든 인간 외적 대상들과 대응하고 있기 때문 이다. 그는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현실적 삶에 대해 민감하면서도 출세를 위한 행보에 집착하거나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향유하고자 애쓰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69)
이처럼 세상의 경험이 여과되면서 시인 자신의 치열한 현실 체험과 포괄적 인식에서 도출된 자연 친화적 성격은 결국 따지고 보면 인간 실존적 문제에서 고민하던 그 근원적 동기는 어릴 때부터 심취했던 소학에서 얻고 깨우쳤던 정신적 세계에서 출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夢天謠 3 >
하히 이저신제 므슴 術슬로 기워낸고
白백玉옥樓 重듕修슈제 엇던 바치 일워낸고
옥황끠 와보쟈더니 다몯야 오나다. < 夢天謠 3 >
이 작품은 경국제민의 뜻을 품고 임금님께 나아갔으나 아뢸 말씀을 다못하고 퇴궐한 고산의 실의에 찬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초장에는 하늘이 이즈러지는데 무슨 수로 기워낼 것인가 하는 물음과 중장에 백옥루를 중수할 때에 어떤 장인이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옥황께 이것 저것 다 여쭈어 보고자 했는데 , 뭇 신하들의 방해로 다 못 여쭈어 보고 왔다는 내용으로 憂國忠民과 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 饑歲歎 >
還환子자타 산다 고 그사 그르다 니
夷이齊제의 노 줄을 이렁구렁 일관디고
69) 서준섭, “조선조 자연시가의 이념적 기반”, 강원대 논문집 15, 1981, 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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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즈버 사이야 외랴 운의 타시로다
위 작품은 <기세탄>으로 당시 백성의 어려움에 대한 고산의 愛民思想 을 볼 수 있다. 그 예로 伯夷 叔齊의 古事를 들고 있다. 백이 숙제 형제는 은의 토왕 때 孤竹君의 두 아들로서 주의 무왕이 강태공과 함께 주왕을 토벌하려 할 때 주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토벌하는 것은 義에 어긋납니다.”고 하면서 말렸다. 이 때 무왕은 칼을 빼어 목을 치려하니 강태공이 “이 분들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목을 쳐서는 안됩니 다."고 말렸다. 殷 나라는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졌으니 백이 숙제는 의롭지 못한 제후인 무왕이 세운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연명하다가 餓死했다는 고사인데, 이 시조에 서는 충성스럽고 청렴한 백이 숙제의 정신을 높이 기리고 있다. 70)
非從軍國徵求應 국사가 아닌데도 부역에 응하니
宗社響薌在此中 나라의 뿌리는 능본에 있어
物外亦知民事急 물외에 살면서도 백성들의 바쁨을 알아
相呼出洞助田功 서로 동리에 나와 농사일을 돕네
隣僧哀我檀苦 이웃 승려가 나의 苦役 알아
來助治糞感難深 묵은 밭 개간하는데 도우니 감화가 깊구나.
休論勝負爭先事 누가 잘하고 못하고 빨리 하고 늦게 하는 것말하지 말라
均是慈悲利物心 항시 자비심은 물질과 정신을 이롭게 하네 (遺稿권, 51쪽)
백성들은 부역에 나가고 농사의 일손은 모자라는데 중들이 모두 나와 일손을 돕고 함께 일하니 감회가 새로워 불교의 자비심이 모든 만물을 이롭게 한다고 했다. 이는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惻隱之心 곧 仁을 동일로 보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70) 문영오, 윤선도론, 백산출판사, 1986, p.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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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 비판 의식
<墨梅>
物理有堪賞 자연에 구경거리가 많지만
捨梅取墨梅 매화를 버리고 묵매를 취한다
含章知至美 운치를 머금음은 가장 아름다운 미
令色豈良材 외양의 아름다움을 어찌하랴
自매追前哲 스스로 물러나 현인을 따르고
同塵避欲猜 속세에 있어도 시기를 피할 수 있으리
回看桃俗李 어줍지 않은 선비들을 뒤돌아보니
猶可作輿臺 오히려 그들이 하인처럼 미천하네
<遺稿 권 一, p. 31>
위의 시는 신랄한 세상 비판이 여과되지 않고 드러나 있다. 자연에 구경거리가 많고 벼슬에도 높은 벼슬이 많지만 자신은 요란하게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매화를 취하지 않고 또한 높은 벼슬도 바라지 않으면서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墨梅를 취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그런 것에 얽매이는 세상 사람들을 ‘猶可作輿臺’라고 꼬집는다. 문영오는 이 작품을 두고 “세한사우를 등장시켜 자신의 고결한 인격을 이들에 의탁하면서 심화를 달래고 있다."고 했다. 71)
눈 속에서도 굳게 피어나는 매화도 좋지만 화려한 매화보다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화려한 매화보다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묵매로 자신을 비유하면서 巧言令色을 일삼는 무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 우고 있다.
71) 문영오, 고산 윤선도 연구, 태학사, 1983, 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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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季夏 次贈沈希望韻以寄復用其韻賦>
經濟眞成次下離 도탄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진실로 이루 어지고
目生靑壁錦紋滋 맑은 정신에서 오는 광채 더욱 빛난다
悲歡不起榮兼辱 슬픔과 기쁨이 영욕에서 일어나지 않고
去駐那關速與遲 거주함이 어찌 세월의 더딤에 관계하랴
惟願實區王化復 오직 바라건대 왕의 선정이 온 천지에 다시 오고
每愁天下萬生疲 매일 마다 온 나라 백성의 고달픔을 근심하나니
物然百感由中集 매일마다 온 나라 백성의 고달픔을 근심하나니
老子滄茫獨立時 늙은 몸 아득히 홀로 서 있다.
( ‘遺稿’ 권 1.p. 59 )
城郭外有長川 경원 성 밖으로 긴 내가 흐르는데
混混東流赴海邊 동쪽으로 흘러서 바닷가에 이른다
何日歸路龍鬣上 언제쯤 석방되어 말을 달려 돌아가려나
何爲甘雨雨民田 단비로 변하여 백성의 밭에나 내리지.
병환고산선상감흥(病還孤山船上感興)
내가 경국제민에 뜻이 없지는 않으나
군자의 나아가고 물러남에 때가 있다.
이르는 강산마다 모두 좋게 여기니
석양의 돌아가는 배 느리다고 싫어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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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理想世界의 實現意志
잔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리랴
말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노라 < 산중신곡 ‘만흥 3 ’ >
성리학에서 얘기하는 格物致知論 의 格物 物格 및 認識의 관계를 적용해 보면 學者가 주력해야 할 것은 格物이다. 그러므로 고산은 進學의 과정에서 格物을 특히 중시하여 <대학>의 가르침이 格物로 立道의 發轉處 로 삼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문학작품에도 격물 물격을 통한 물리의 인식 과정을 노래하였거나 이를 통해 파악한 물리를 형상화한 것들이 쉽게 발견된다.
위 시조의 초장이 작자의 격물하는 자세를 나타낸 것이라면, 중장은 그에 따라 물격이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다. 종장에서는 사물의 오묘한 물리를 터득한 마음속의 즐거움을 노래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가 현실 속에서는 이미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의 對社會的 의지가 관철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이젠 자연의 대상물을 통해서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 현실 속에서 얻어지지 않는 것을 대신한 자신의 제 3의 세계, 즉 이상 세계에 대한 간접적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72)
여기 소개된 작품은 오랜 동안의 유배생활과 벼슬살이를 체험한 후 56
세 때 지었다는 <산중신곡>의 (漫興 4) 부분이다. 축적된 갈등과 긴장을 모태로 전원에 귀의코자 하는 선비 의식이 부각된다. 73)
72) 김경복, “고산 윤선도 시에 나타난 유토피아 의식”, 문창어문논집 37, 2000, pp. 190-195, 73) 임철규, 왜 유토피아인가?, 민음사, 1994, pp.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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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고셔 삼공도곤 낫다더니 萬乘이 이만랴
이제로 혜어든 巢父許由 냑돗더라
아마도 林泉閑興을 비길 곳이 없셰라 < 漫興 4 >
당시의 현실은 명예를 존중하고 권세를 부리며 이욕을 채우고자 하는 세속적 이해관계가 작용하여, 상호간에 반목질시하고 당파가 갈리면서 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이러한 부조리하며 무질서한 사회 현실을 극복 하는 길은 일체의 세속적 이해 관계에서 벗어나는데 있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한 본성을 회복해야만 참다운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인간의 결속에 의해 사회 질서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 다.
이에 객관적 대상에 대응하는 행위의 주체인 인간이 강조되고, 사회적 자아로서의 투쟁적인 면모보다 근원적 자아로서의 내면적 의식이 중시되는 의식의 한 단면이 엿보이는 작품인 <산중신곡, 조무요>를 살펴보면
月出山이 놉더니마 믜운거시 안개로다
天王 第一峰을 一時에 리와다
두어라 ㅣ퍼딘 휘면 안개 아니 거드랴
이는 단순히 자연현상을 관조하고 묘사했다기보다 미감을 통한 시적 형상화에 내포된 시인의 심사가 엿보인다. 산을 가리고 덮는 안개는 정치 상황이나 현실의 부정적 요인을 표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할만한 양심과 지성의 소유자였다.
“遊伽倻山 二首”(49세)
伽倻仙去已千年 가야산의 신선 떠난 지 이미 천년
堪笑伽倻訪此仙 가야산의 신선 찾는 내가 우습지
泚筆流觴非勝跡 술 잔 띄워 시 지음이 좋은 자취 아니고
也知都在避人前 세상 사람 피하기 위함 이제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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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성산에서 약 2년 간 재임시절에 오랜 관습으로 행정이 법대로 되지 않고 관리들의 부정이 심하였다. 중과부적 혼자의 힘으로 제도와 구습을 타파하지 못하고 경상감사 유백증과도 뜻이 맞지 않아 사직소를 냈으나 파직하여 처리하여 버린다. 이 때 가야산을 유람하며 자신의 심회를 읊은 시다.
次歡喜院壁上韻 (차환희원벽상운)
也知都在避人前 환희원에 와도 환희는 없고
江南歸客興長吁 강남가는 나그네 긴 탄식하네
經綸未展病於此 경륜을 펴기도 전에 병이 나니
萬億蒼生何日蘇 온 백성들은 언제쯤 소생시킬까
고산 사상의 주류는 유교사상인데 忠, 孝, 爲民, 修己治人 등 너무나 현실적이고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강조하기 때문에 정치 현실과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낀 사대부들은 도피처로서 마음의 고향을 느낄 수 있는 도교적 요소에 마음을 안착시킴으로써 인간적인 고뇌, 환멸, 불만을 해소하려 했을 것이다. 74)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문학작품이 대부분 이렇게 현실 도피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자신의 현실적인 기원이나 희망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막연히 또 다른 세계, 즉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의 다른 몸짓인 것 같다.
간밤의 눈 개인 後후에 景경物물이 달랃고야
이어라 이어라
압희 萬만頃경硫유璃리 뒤희 千쳔疊텹옥산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사臥와
仙선界계ㄴ가 佛불界계ㄴ가 人인間간이 아니로다 <어부사시사 冬 4>
74) 박준규, “고산의 한시 연구”, 고산연구 제 3호, 고산연구회, pp. 2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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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도 한 폭의 풍경화를 보듯이 안전에 자연의 景勝이 전개된다.
함박눈이 내릴 때는 지척이 분간되지 않더니 이 눈이 개여 화사한 햇살 에도 눈부실 때는 새로운 은빛 세계가 전개되어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너무도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선계이거나 부처가 사는 세상이지 인간 세상은 아니라고 했다.
앞에는 萬頃琉璃 뒤에는 첩첩산중의 낙천지라 하여 고산은 인간세계에 대한 부정적 혐오감, 불평. 불만을 은근히 암시하며, 자연에 돌아가 정치적 불만과 패배의식을 보상받으려는 생각이 나타나 있다. 즉 혼탁한 정치 권력자들이 사는 세상보다 이곳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곳인가를 강조 하여 그들보다 더 편안한 생활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기며 자기 위안을 삼고 있다.
여기서 인간세상은 홍진이요, 자연은 선계, 불계로 비유하여 자시닝 현실에서 구하지 못한 안식처이자 마음속에 그리고 그리던 이상적 세계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75) 고산이 처음 甫吉島에 入島하 였을 때 점거할 곳을 정하고 , 그 곳을 芙蓉洞이라 하였는데 이는 仙意 識에서의 命名이다. 勝景을 찾아 冬天石室이니, 偃仙臺라 한 것도 마찬가 지의 心理的 動機로 말미암은 것이다.
먼저 동명을 부용동이라 한 첫째 이유는 사방의 여러 산들이 고을을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그 모양은 흡사 꽃봉오리가 터져 피는 연꽃과 같아서 붙인 이름으로 전한다. 이에 대해서는 尹緯의 <甫吉島識> 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방을 바라보면 산이 들러 이어 있고, 아지랑이 퍼렇게 아른거리며, 여러 산 봉우리들은 첩첩이 벌여 있는데, 이는 마치 연꽃봉우리가 터져 피는 듯하니 부용이라 한 이름은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四望回合 嵐翠 蒼蔚 群巒疊列 如蓮化綻 芙蓉之名 蓋以此也) 76)
명명은 고산이 보길도의 佳境을 先蹟이 많은 선경으로 생각하고 부용 화와 같은 산세의 形勝에 착안함은 물론 蘇軾의 芙蓉城詩를 비롯하여 중
75) 최진원, “국문학과 자연”,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1, p. 42.
76) 孤山年譜, 卷 一, 丁丑, 장 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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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부용성 仙遊古事를 염두에 둔 데서 그 같은 동명을 생각해 낸 것으로 판단된다. 보길도에 대한 이같은 발상은 당초 入島할 때 제작한 ‘黃原 雜詠 3수’에 역력히 나타난다. 황원은 고산이 처음 이 곳에 정박하였을때 찾은 포구의 이름이다.
誰能創此 朴而工 누가 이처럼 질박하고 공교하게 만들 수 있을까
豪從由來造化翁 호방함은 造化翁의 솜씨로 말미암았네.
傍日臨風若雲谷 해를 곁에 하고 바람에 임함은 朱子의 雲谷과 같고
宅幽勢阻勝盤中 집이 깊숙하고 형세 막힘은 이원의 반곡보다 낳구나
玉槽飛瀑穿香霧 조곡에 날리는 폭포 자욱한 안개를 뚫고
石甕寒潭暎碧空 석옹의 차가운 못엔 푸른 하늘이 비치네
十里蓬壼天賜履 십리의 봉곤은 하늘이 주신 복록이니
始知吾道未全窮 비로소 나의 도가 궁한 것만이 아님을 알겠구나
<어부사시사 중 봄(春)>
이는 고산이 51세 되던 때에 보길도에 들면서 지은 <黃原雜詠 3首>중첫 수다. 여기서 그는 이 섬을 신선이 산다는 봉곤이라 하였다. 이곳의 絶勝을 모두 仙境으로 생각하고, 이 곳의 발견은 하느님이 내려 주신 福 祿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렇게 자연의 절승을 두고 선경이라 함은 그 경치를 신비롭고 그윽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의 觀念에 따르면 俗界와 대립되는 항으로서의 현실 세계와는 다른 고산 자신의 안식처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이상향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어떤 儒者이든 산수에 자적하면서 自然秩序를 터득한 경지에 이르면 절대적인 자연의 이치에 나름대로의 느낌과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한 서정적 취향이 깊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절실하게 仙意識에 매몰되는 현상은 고산 자신의 현실인식이 좌초되고 자신이 바라는 새로운 세계 곧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러한 형태로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겠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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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醉하여 누었다가 여울 아래 나리려다
배매여라 배매여라
낙홍(落紅)이 흘러오니 도원(桃源)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세홍진(人世紅塵) 이 얼마나 가렸나니
윗 시는 홍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공간의 표상이다. ‘낙홍’은 복숭아 꽃잎을 의미할 것이며, 그러기에 ‘도원’이 자연스레 연상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역시 ‘인세홍진’의 더러움, 잔망스러움 등이 가려진 넉넉하고 아름다운 세계다. 윤선도의 의식 속에 자연의 삶이야말로 동양적 전통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삶이자 사회상임을 새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들어라 닻들어라
만경징파(萬頃邆波)에 슬카지(싫도록) 용여(容與)하자 <어부사시사중 중 가을(秋)>
자연의 세계는 어떤 탐욕이나 아집을 찾을 수 없는 공간이다. 모든 것이 순리에 따라 펼쳐지고 서로 상호 의존하면서 생명의 충일성을 노래한 다. 자연은 생명과 도덕의 바탕이 되면서 인간에게 하나의 정신적 도량이 된다. 윤선도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자연은 도덕적 표준이 되면서 규범의 세계로 인식되었다.
그가 즐겨 해남의 금쇄동과 보길도의 부용동에 은거하면서 자연적 삶을 예찬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실천 위에 있다. 따라서 윤선도에게 자연적 삶은 현실적 삶에서 얻을 수 없는 이상적 삶의 구현인 것이다. 특히 그가 <어부사시사>를 통해 세속적 삶의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아를 실천하고자함은 현실적 삶과는 대비되는 이상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
77) 김경복, 전게서 재인용. pp. 19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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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한 표현인 것이다.
자연은 윤선도에게 있어서 현실정치의 좌절에서 오는 패배감 그리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란을 격음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환멸 등을 윤선도에게 삶의 순박성과 생동성을 추구하게 만들어 주는 이상적 삶에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78) 이런 점에서 고산이 노래하고 있는 모든 자연은 어쩌면 자신이 현실에서 얻지 못한 이상적 삶의 의식적 투사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78) 박준규, “고산의 한시 연구-보길도에서의 제작을 중심으로”, 고산연구 3호, 고산연구회, 1989, pp. 2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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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결론
본고는 고산 자신의 학문 세계를 형성했던 성리학이 윤선도의 작품 속에 어떻게 녹아 있으며 이러한 성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이 윤선도의 작품 속에는 어떤 모습으로 담겨지고 있는가를 그 당시의 어지러웠던 조선 후기 사회의 반응양식과 관련지어 보았다. 이러한 관련성은 윤선도의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 기반과도 연계되어 있으며 유학과도 서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이 논의에서는 고산의 儒者的 意識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그의 학문 세계와 고산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얻어낸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적 개성이 어떤 본질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주로 고산의 한시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의 생애는 그의 靑少年 修學期, 慶源流配와 仕宦期, 盈德流配와 隱遁 期, 再出仕와 論爭期로 나누어 고산 생전의 활동을 그의 정치적 행보에 맞추어 살펴보고 고산의 가정환경과 성품이 그의 수학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한 그의 학문수련 과정에서 길러진 그의 지적 체계와 성리학적 사상과의 관계가 그의 한시나 문학 세계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첫 째, 그의 학문 수학기에는 소학 위주의 수업에 전념하였는데, 이는 고산의 가계에서도 살폈지만 사림파의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표현 하였다.
둘째, 그의 학문적 특성을 주로 주자학적 기반 속에서 찾아내어 문학 작품과의 관련성을 논하되 완전하게 주자학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그의 학문적 특성 자체가 이미 실학적인 사상을 많이 내포하여 다른 학자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진보적이고 개화된 사상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의 유학적 의식을 실천하려고 했던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을 살폈다.
셋째, 고산의 문학작품을 유자 지향적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 事君意 識, 孝親意識, 社會的 參與意識, 마지막으로 理想世界를 향한 意志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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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 그의 문학작품 속에 드리워진 儒者 指向的 意志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주로 그의 학문적 경향에서는 성리학과 실학의 두 측면을 충실히 실행하고자 노력한 유자적 실천의지가 작품 곳곳에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의 정치활동의 대부분은 사림파의 정통적 의지를 관철하려다 거의 대부분이 유배생활로 점철되었다. 이 시기에 그의 많은 한시가 창작 되었고 작품 속에는 주로 사군의식이나 효친의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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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tudy of Kosan, Yoon Seon Do -A Classical Scholar-oriented-
by Ha, Pil Rang
Major inKorean Education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Changwon National University
I studied Kosan's works laying stress on his classical scholar-oriented ideas in this study of Kosan, Yoon Seon Do's literature. I studied the results of studies on Kosan's literature, and I found out that the critics had commented on his superior talent for the literature by endowing his view of the nature and his Korean words in his literature works with a special worth.
Recently, they studied actively his ideological background which had a lot of influence on his works. However, I felt something wanting because they had studied broad outlined studies in commenting the relationship of Kosan's ideological background and his literature works. So I have analyzed his Chinese poetry mainly. Consequently, I have found that the most important factor, which had given form to his literature, was on the basis of his classical scholar-oriented ideas. Most of his works which he created during the path of his political life, the proces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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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growth, and his exile life were the Chinese poems.
Because he created most of his Korean poems during the latter life of his exile life, there were few of his Korean poems and the contents of the poems were formed primarily of his self-sufficiency from his secluded life or his escapism. But still I think that his classical scholar-oriented ideas formed the nucleus of his ideological origin of the contents of his Chinese and Korean poetry. Hereupon, I studied Kosan's lifetime first and the path of his political life with his life. And I deduced his classical scholar-oriented ideas which had been formed from the process of his learning. As the result, So-hak had influenced a lot on his ideological formation. So I saw through the receptive aspect of Joo Ja -hak in connection with Kosan's ideology. I observed his ideology which had been formed in the chaos of his life background in the aspects of Confucian ideas, Taoism, economic ideas and social ideas. And I also observed what kind of aspects those ideas showed in his works on the basis of his classical scholar-oriented ideas. As a consequence of that, Confucian ideas had been expressed the most in his works. I have divided them into the literati ideas, the filial piety ideas, the social criticism, and the realization will : first, the literati ideas, second the filial piety ideas from Confucianist, next the social criticism and last, his realization will about his ideal world which he had never accomplished in his real life.
From this, I can tell that he might have done a right participation in the society when he had failed in the achievement of his political expression ; Kosan thought himself as a thorough scholar, and so he had his political ideas that he had to relieve his people. However, unfortunately he had fa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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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it. Finally he retired to the nature. He created his works to console himself as showing his realization will about his new ideal world in his works.
This came from his scholar conscience to preserve scholar's academic heritage and keep a thorough knowledge completely. Judging from this point of view, I have concluded obviously that the ideas in Kosan, Yoon Seon Do's literature works were based on a classical scholar-oriented fully.
(So hak : A book which Joo Ja wrote and edited to educate the children.
Joo Ja hak : An orthodox school of Confuc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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