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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윤씨귤정공파종친회

해윤관련논문

저자 : 이종범 
출신학교 및 학위 :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 단국대석주선기념박물관 학술지 한국 복식 27호 (2009. 05. 02) 
년도 : 2009년 

海南尹氏家의 學問과 朋黨政治

 

이종범*
*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

 

I. 머리말


최근 경기도 광주시廣州市 송정동에 있는 해남 윤씨가의 선농先壟을 천장遷葬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는 복식이 출토되었는데, 묘역墓域의 주인공들이 「五友歌」와 「漁父四時詞 등으로 널리 알려진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생조부生祖父 윤의중尹毅中을 비롯하여 생모生母 순흥順興 안씨安氏와 친형親兄 윤선언尹善言 내외 및 증손자 윤종서尹宗緖로서 더욱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 글은 출토복식에 대한 심화된 연구를 위하여 묘역의 주인공의 이력과 이들 가문의 정치·학술 활동 등을 정리하려는 목적에서 작성 되었다. 아울러 그동안 문인으로서만 조명을 받았던 윤선도의 진면목을 제시함과 아울러 17세기 붕당정치사에서의 역할과 위상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I. 16세기 전반 해남 윤씨가의 학문과 교유

 

1,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의 기업基業과 교유

 

윤효정(1476-1543)은 해남 윤씨가가 '소봉素封' 의 칭호를 듣고 학풍과 정치를 제창한 사림파의 일원으로 활약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일찍이 유계린柳桂隣. 임우리林遇利등과 같이 최부崔溥에게 배운 윤효정은 연산군 7년(1501) 생원시에 급제하였지만 더 이상 과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스승 최부가 무오사화로 단천으로 유배를 당하고 갑자사화에서 참형을 당하는 등의 정국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1) 그는 대신 향풍을 개선하는 한편, 흉황으로 관곡을 갚지 못하여 옥에 갇힌 농민을 세 번이나 구하였던 삼개옥문三開獄門 적선지가積善之家의 덕업을 쌓았다


윤효정은 향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 갇힌 것은 아니하였다. '신씨복위소愼氏復位疏'를 통하여 기묘사림이 결집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훗날 '기묘완인己卯完人'으로 추앙받은 박상朴祥이나 기묘개혁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김안국金安國과 서로 소통하였던 것이다. 이들 윤효정의 벗들은 "진나라 관문을 냉소하여 말을 앞세우지 않나" 하거나, “천애天涯의 가슴에 품은 그리움 금할 길이 없다네" 하며 벼슬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윤효정을 그리워하였다."

 

1) 최부는 스승 金宗直과 함께 훈구파가 편찬한 r동국통감 r동국여지승람을 수정 증보하였으며 중국에 표류하였다가 귀환한 여정을 담아 '중국을 가보지 않고 알 수 있다' 는 평가를 받았던 r漂海錄」을 지은 당대의 사림학자였다
2) 박상 r次尹希參韻」 r訥齋集(續)」 권2, 김안국 r尹進士友衡衡之往海南 付寄尹同年孝貞希參暨其子尹佐 郞衢亨仲」 r慕齋集」 권5

 

윤효정의 관계망은 중종 8년(1513) 생원·진사시, 중종 11년(1516)에는 문과에 급제한 장자 윤구(1495-1549)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윤구가 가장 따르던 선배사림이 바로 박상이었으며, 김안국의 동생 김정국金正國과는 오래도록 우의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처사를 고집한 둘째 항䘕(1505-1591:해빈海濱)을 제외하고, 행行(1508-1592:졸재拙齋)은 중종 26년(1531), 복復(1512~ 1577:행당杏堂)는 2년 뒤인 중종 33년(1538)에 문과에 들었다."4) 더구나 공동의 문집인r聯芳集」을 엮었던 이들 형제는 부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이러한 윤효정의 기업基業과 윤구 곤계昆季의 성취를 훗날 윤선도는 이렇게 기억하였다. "고조께서는 농사에 근면하시고, 노복에게는 아주 가볍게 거두셨으니 증조부 형제가 발흥하여 일문이 융성하였다... 고증조는 절검節儉으로 일어났던 것이다."6)

 

2. 귤정橘亭 윤구尹衢의 문장과 사상


윤구는 일찍부터 “海南儒尹衢新有能文"의 명성이 있었다.7) 또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니, 중종 13년(1518) 11월에는「性理大全』을 강의할 26인에 들었으며,8) 조광조趙光祖·김정국 등과 입시한 경연에서도 왕도정치를 위해서는 군주가 구습舊習에서 벗어나야 함을 주장하기도 하였다.9)


한편 윤구는 국가는 군주君主의 전제專制가 아니라 군신君臣이 공치共治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재상의 책무가 막중하고 그만한 인망이 있고 공론이 뒷받침되어야 하였다. 실제 중종 13년(1518) 5월 승정원 주서注書로서 사림의 진출을 적극 지원하였던 안당安瑭이 우의정이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3) 박상의 訥齋集에 수편의 和尹亨仲 이 있으며 김정국의 思齋集에도 留別尹亨仲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윤구는 또한 김정국을 위한 제문을 지었다.(祭金參判正國丸)
4) 윤행은 광주 나주, 해주 등 8개 고을의 부사를 지냈으며, 윤복은 부승지, 안동부사 충청 감사를 지냈다. 또한 이들은 각각 문집을 남겼을 뿐아니라, 을사사화로 진도로 유배를 온 노수신, 장성의 김인후, 윤항의 사돈이기도 한 유희춘, 윤구와 같은 기묘명현인 양패손의 아들인 양응정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윤복은 안동부사 시절 세 아들을 이황의 문하에 들게 하였다. 이들에 대한 정리는 다음 기회에 하고자 한다
5) 윤효정은 해남으로 이사를 오기 전 강진 파산에 살던 구제를 友愛堂으로 편액하면서 "妻子似衣裳兄弟如手足衣裳綻嚇手足斲何續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일례로 윤구는 해남 금강골 本第를 行에게 양보하고, 행은 중형 衖에게 양보하였다는 미담이 내려오며, 또한 복은 윤구의 계도로 학문을 읽혔다고 한다.
6)「忠憲公家訓, r古文書集成--海南尹氏編正書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하 생략). 이것은 본래 현종 원년(1660)에 삼수 유배 첫 겨울에 보낸 r寄大兒書」였다.『고산유고의寄大兒書는 얼마의 문구를刪削하였다
7)朴忠元, r德場遺稿紈,「德陽遺稿. 이러한 명성으로 운구는羅州都會에 갔다가 만난 전라도總角,都事 南哀(1471 ~ 1527)의 눈에 띠어 그의 집을 출입한 적도 있었는데, 머지않아 절교하였다
8) r중종실록 권24, 13년 11월 6일 이때 26인은 孔瑞麟·金正國,申光漢,金絿.閔壽元,奇遵.鄭膺.權雲.具壽福 尹衢,李認,鄭順朋·閔壽千.柳墩.韓忠·尹自任,崔山斗. T玉亨·朴世熹.黃孝獻·李若泳,張玉·李忠健·李希閔.曺彦卿·金湜이다.
9) 中宗實鉄 권31, 13년 월 6일 靜庵 권 경연일 ( 戊寅10월 5일 尹衢日 立志 上下皆以古人自期然後雖不及古人 亦非尋常 之人矣但雖以古人自期而發於施爲者不能免末世之習則亦何益之有哉光祖曰此言是矣古人云知行竝進此之謂也.
10) 1518년 1월申用漑가 좌의정으로 승차하고 후임 우의정으로 金詮,李繼孟,南袞,安瑭이 물망에 올랐는데, 국왕이 윤구로 하여금 요양중인 신용개의 의견을 묻도록 하였을 때, 윤구는 안당도 1품에 올랐으니ト相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李耔나 金淨등이 적극 지지하였음을 물론이다(중종실록」권24, 13년 5월 7일).

 

이렇듯 기묘정국을 맞이하여 윤구는 득의의 시절을 보냈다. 20대 초반이었다. 정조사正朝使 김세필金世弼(1473~1533)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을 가기도 하였다. 이때 사마시 동방이었던 3년 연상의 기준奇遵(1492-1521)은 "먼 시골 바닷가 소년객少年客이여, 등을 켜고 어두운 북경의 저녁을 비추고, 칼을 빼들고 호지의 가을을 놀라게 하게” 하며 장도를 축하했다."11)


정조사正朝使는 20여세 연상이었음에도 다정한 벗으로 대우하였다.12) 의주 압록강변의 통군정統軍亭에서 남긴 연구聯句가 있다.13) 윤구가 먼저 읊었다.


統軍亭子鴨江頭 통군정이 압록강 머리맡에 자리 잡았으니
兒戲百祥浮碧樓 백상루와 부벽루가 아희 같군요

 

다음은 김세필의 대구對句다.

 

遼海湖山輸几席 요동 바다 가운데 산이 옮겨와 자리를 삼았으니
英雄千古有餘愁 천고의 영웅이라도 시름을 남길 만하다.

 

윤구의 문장은 중국에도 알려졌는데, 「漢高祖爲義帝發喪論이란 논문이 중국의 鄕試錄에 실렸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고관考官은 이 논문을 보고 “어느 곳이라도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겠는가마는, 광동성과 광서성이 아니면 서북 지방의 과시科試에서 나왔을 것이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14) 논문의 작자를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 윤구는 한고조 유방이 의제를 위한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항우를 이길 수 있었지만, 그것이 순수한 마음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고조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의제義帝가 생존하였으면 천하의 신망이 의제에게 돌아갈 것이지만 의제가 사망하여 천하의 원망이 항우에게 돌아갔으니, 내가 마땅히 의제를 위하여 장례를 치루면서 항우를 죽이고 갈아치우겠다고 한다면, 천하에서 의제를 추대하려고 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장차 나를 의제와 같이 추대하려고 할 것이고 항우에 대한 원한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항우가 천하로부터 원망을 얻은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다.” 고조가 자신의 탐욕을 달성하기 위하여 의제를 위하여 발상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탐욕은 고조가 본래 효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帝가 태공太公(유방의 부: 필자)을 섬김을 보건대 그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였으니, 의제를 위한 발상도 반듯이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윤구의 한 고조를 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이외에도「僞遊雲夢論」·「僞遊雲夢論」·「斬丁公論,「四皓羽翼

 

11) 기준,「送亨仲赴京」「덕양유고」권1.
12) 훗날 윤구와 많은 시를 수창하였던 김세필은 이를 『西征錄』으로 꾸며 윤구에게 보냈고 윤구는 여기에 발문을 적었다(『橘停遺稿』「題西行錄後」
13)「統軍亭夜飮聯句」제2수,『十淸軒集』권2
14)安璐 撰,「己卯錄補遺』, 중국의 r향시록에서 윤구의 논문을 찾아낸 인물은 羅世纘(1498-1551)이었다

 

太子論」등에서 그의 토사구팽과 정적 보복, 그러한 과정에서의 국가의 위태로움을 고발하였다. 그러한 의식을  杯羹」,「承露盤」등과 같은 부도 담기도 하였다. 특히 후자는 한무제漢武帝가 장생長生하기 위하여 이슬을 받아 마셨던 동반銅盤을 노래하였는데, 왕도정치는 군주 일신의 장수가 문제가 아니라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새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윤구는 왜 한나라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였을까? 그것은 한나라가 진秦의 전제專制와 학정虐政의 폐단을 극복하자면 관용과 왕도의 정치를 추구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공신을 부정하고 봉건을 탄압하며 또 다른 황제전제로 나갔던 데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었다. 또한 왕도정치는 '君主一心'에 있는 것이지 외면의 가식적 처사만으로는 결코 판단할 수 없나는 문제의식도 깔려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3, 윤구尹衢와 '湖南詩社'

 

윤구는 북경에서 돌아왔을 때는 정국이 바뀌어 있었다. 김세필이 조광조 등의 사사赐死가 지나친 것을 항의하다가 거제에 안치되었으며, 윤구도 지난 복상卜相 문제가 빌미가 되어 파직을 당하고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5) 그리고 이듬해 10월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있었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당시 호남에도 유배객이나 폐고인廢錮人이 적지 않았다 광주의 박상朴祥, 동복의 최산두崔山斗, 능주의 양팽손梁彭孫, 장흥의 신잠申潛 등이었다.


윤구는 이들과 교류하였다. 언젠가 장흥으로 유배를 왔던 신잠申潛에게서 <墨竹圖>를 얻고 좋아 박상에게 시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이에 박상도 "영천靈川의 분통憤痛어린 바, 찌꺼기를 떨쳐내고 천진天眞을 옮겨놓았고… 귤정이 얻어서 좋아하니, 그들의 친함이 노심虛心으로 맺어졌음이라" 하였다."16)


동복으로 유배를 왔던 최산두도 윤구에게 무척 다정하였다. 지난 시절 r성리대전을 강의할 유신으로 같이 뽑혔던 인연도 생각났으리라.


江路尋春晚 강 길에는 봄 찾아감이 더디니
思君步月時 그대를 생각하며 달 아래 걷다가
年年山間谷 해마다 산 사이 골짜기에서
曲隨分有涯 한정이 있는 분수를 곡진하게 따른다네

 

윤구는 금릉으로 유배를 갔다가 돌아 왔다. 어숙권魚叔權은 r稗官小錄」에서 최산두, 유성춘
윤구를 '湖南三傑'로 호칭하였다.17) 실제 윤구는 호걸의 기풍이 있었다

 

15) r중종실록」권39, 15년 5월 21일 이후 유배에서 풀려난 김세필은 충주 지비천에 工字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6) r눌재집 권1, r和尹亨仲求题申元亮墨竹韻」
17)「己卯錄補遺」(상)

 

오언고시五言古寺 「登泰山小天下」에서는 “장하다 중니仲尼 공구옹孔丘滃이여, 그 큰 뜻을 누가 따르리오” 하다가, "움푹 들어간 현인의 눈은 우주를 떠돌고 바람을 품은 한 마음은 아리따워라" 하였다. 그러면서 당대를 꾀꼬리 비둘기가 대붕을 비웃는 모습으로 풍자하면서 "비웃음 받아도 내 또한 무슨 의혹 있을까, 처음 마음을 더욱 닦고서 장차 대붕과 같이 훌훌 털고 높이 날리라'. 하였다.18) 혼탁한 세상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 보인 것이다. 그러나 검은 물을 한 번 들이 면 다시는 희어지지 못하는 실[絲]을 빗대어 신의와 염치를 상실한 세상이 못내 비관스러웠다.19) 그러면서 일탈을 꿈꾸었다. 부賦 「天河」에서 “시속時俗의 어지럽고 더러움이 서러워라, 원컨대 가볍게 일어나 저 멀리 노닐다 왔으면 어떨까" 한 것이다.


한편 윤구는 박상을 비롯하여 유성준柳成春. 신잠申潛, 최산두崔山斗, 임억령林億齡등과 '詩社'를 결성하였다.20) 중종 9년(1514) 문과에 장원하고 자신을 당여로 끌어들이려던 남곤南袞을 "높이 낀 저문 구름을 곧추 올라 헤치게 할까"하며 풍자하였다가 유배를 당하고 풀려난 남주南趎도 합류하였다.21) 주로 장흥 가지산의 보림사나 강진 백련사 등지가 무대였다. 훗날 송순宋純은 한 스님으로부터 남주 . 박상·최산두의 시에 윤구가 서문을 적은 시축을 얻어 보고 슬픈 감회를 적었다. "당신들의 여취餘臭라고 따르기 힘들더니 우연히 선가禪家에 버려진 보물을 수습하였네."22)


중종 25년(1530) 박상이 나주목사를 그만두고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그를 위한 행장을 지었다. 이렇게 적었다. "세속世俗이 좋아하는 미순媚順을 선생은 천악賤惡하였고 세속이 싫어하는 剛方을 선생은 자보自寶로 여겼으며 세속이 다투어 힘쓰는 재리財利를 선생은 타척唾擲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선생의 정사는 엄명嚴明하고 단칼에 베는 듯 기강을 세우며 황류荒類를 호미로 파내듯 하였으니 반듯이 궁과무고窮寡無告를 우선하고 토호의 겸병을 억압하였다."23)


중종33년(1538)에는 이달선李達善(1457-1506)의 묘갈명墓碣銘을 찬하였다. 광주 이장동에서 태어난 이달선의 가문은 고려 후기 이순백李珣白으로부터 7대에 이를 때까지 문과급제자가 끊이지 않았던 호남의 명가였다.24) 성종 17년(1486) 문과에 급제한 이달선의 전도는 그리 밝지 못하였다. 신진사림으로 연산군 치세를 만난 것이다. 비록 모친상으로 낙향하여 무오·갑자사화를 피하였지만, 결국은 파직을 당하고 남평 만적동으로 물러났다가 연산군 12년(1505)에 세상을 떠났다. 윤구는 이달선의 말년을 간단히 요약하였다. “공은 이사里社에 물러나 날마다 술잔을 즐거움으로 삼고 가


18) r귤정유고」「鶯鳩笑大鵬」(賦). "雖日見笑 吾又何疑益修吾初服將與大鵬翕忽乎高也飛"
19) r귤정유고」「悲絲」(부)
24) 海南尹氏文獻 권1 橘亭公, "與諸公爲詩社會每花辰雪朝折簡招邀聯騎相會有不及者罰以浮白或以詩相謔如是者盖數十年." 海南尹氏文獻은 윤두서의 제7자 尹德顯의 아들인 윤위(1725-1756)가 편찬하였다 오늘날 '윤씨문헌'의 신찬이 필요하다.
21) 학포집」부록 「己卯黨禁錄」; 이긍익, r燃黎室記述, 권8, 기묘당적」.
22) 송순,隣曾智泉袖一軸開示」 俛仰集 권3
23) 윤규 r訥齋先生行狀, 訥齋集」附錄.
24) 이달선의 조부李先齊(1390-1453)는 세종 치세에 집현전 부제학과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고 국방과 재정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을 뿐만아니라 <光州鄕規>를 처음 발의 시행하여 새로운 향촌질서에 기여하였으며, 부친李亨元(1440~1479)은 성종 치세에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는데 일찍부터 최고 공신 韓明澮를 탄핵하여 신진사림의 추앙을 받았는데 일본통신사로 갔다가 대마도주의 방해책동으로 돌아오던 중에 거제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효온의 절친한 벗이었던 이달선 역시『주역」을 막힘없이 강독하여 임금에게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자로 賞讚을 들었다. 그리고 연산군 치세에는 度牒制및 僧科폐지 昭格署의 혁파 및 水陸齋금지를 주장하고, 임사은 소인으로 규탄하면서 언로를 방해한 영의정 盧思愼의 해임을 요구하는 등 신진사림의 대열에서 활동하였다
25)  r귤정유고」「通訓大夫掌樂院正知制敎  李公淑人安氏雙墓碣銘

 

인家人에게 생산生産을 묻지 않았다."25)
이달선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윤구에게 묘갈명을 부탁한 공충公忠은 둘째였고. 장자 공인公仁(?-1522)은 중종 14년(1519)에 문과에 들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공인의 아들 중호仲虎(1512-1583)의 차남과 삼남이 윤구가 터를 잡은 백련동에서 태어났다. 이들 형제가 이발李潑(1544-1589)과 이길 李洁(1550-1589)이었다. 윤구가 이중호를 사위로 삼았던 것이다.

 

 

III 16세기 후반 해남 윤씨가와 붕당정치


1. 형제의 삶과 길


윤홍중尹弘中(1518-1572) . 의중毅中(1524 ~ 1590) 형제는 각각 명종 1년(1546)과 명종 3년01548)의 문과에 들고 벼슬에 나섰다. 두 사람은 모두 호방하고 무예의 기질이 있었다. 윤홍중은 을묘왜변 때에 매복전술로 왜구를 사살하고 퇴각시켜 해남을 보존한 공을 세웠다.26) 윤의중도 '선사善射' 를 중국 사신에게 실연實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형제의 삶은 달랐다. 윤홍중은 직설적이며 대범하였는데, 을묘왜변의 전공을 굳이 주장하지 않는 것이 그러하지만, 명종의 숙의淑儀 신씨申氏 사가私家의 담장이 경계를 넘어 왔을 때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숙의 집안의 노복을 응징하였다가 강진으로 유배 간 적도 있었다.27) 또한 영광군수 시절 정기란 인물이 영광에서 소금 등의 공물을 방납하며 막대한 재물을 축적하자 가차 없이 제지하였는데, 당시 성리학에 밝고 경연관으로도 복무한 집안이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정철이 순행을 왔을 때에는 마음으로 가볍게 생각하여 해학으로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28) 신응시辛應時(1532-1585) . 정철鄭澈1536 -1593)과의 악연의 발단이었다.


이러한 윤홍중에 비하여 윤의중은 시무時務에 뛰어났다. 선조 4년(1571) 여름에 평안감사로 부임해서는 바로 가을에 민역民役을 동원하지 않고 관아의 저축된 물자를 풀어 군자루君子樓를 신축하는 수완도 보였다." 명종 14년(1559) 왜에 납치된 한인이 황해도 등지로 표박하였을 때, 이들을 호송하는 책임을 겸한 동지사가 되었을 때였을 것인데, 박순(1523~1589)은 다음과 같은 시로 전송하였다."

 

26) 趙憲 重峯集 권 8 請漸倭使疏(159 3.15), "乙卯 ...海南尹弘中分伏射徒數t於輔 處而賊不敢城" 그러나 명종실록에는 윤홍중은 나오지 않고 "이때 海南 성 하나는 縣監 邊協을 힘입어 극력守備하며 때때로 나가分散하여 도적질하는 적들을 잡았으므로 이로 인해 함락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명종 10년 5월 30일).
27)  명종실록 권28, 17년 4월 12일, 또한 일찍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벼슬이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기질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28) r해남윤씨문헨 권2, r正郎公(尹弘中), 그런데 이 자료에는 정철이 순행할 때 전라감사였다고 하는데, 정철이 전라감사를 할 때는 선조14년(1581)이고 이때는 이미 윤홍중이 세상을 떠난 후가 된다. 그렇다면 정철이 전라도 어사로 왔을 때인 선조 원년(1568) 저간이었을 것이다.
29 r해남윤씨문현 권2,君子樓記. 이듬해에 은산현을 순행할 때 "炳臥殷山縣孤懷澗水西 小庭風雨裏 花落鳥空啼"와 같은 서정넘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30) 박순 思庵集 권1,「送尹致遠赴京」. 이 시에 의하면 두 번째 중국행임을 알 수 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처음의 사행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潦盡關河霽景淸 장마 그쳐 山海館과 황하가 개이면 그 맑음 볼만 하고
塞鴻無數帶秋聲 변방 기러기 무수히 날면서 가을 소리 띠겠지
朝天更踏燕山路 사신 가는 연산로를 두 번 밟으니
鴨水長城亦舊情 압록강과 만리장성도 역시 옛정 아니겠나

 

두 번째 가는 중국행이라 낯설지 않으리라 위안하면서 능히 사명을 다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읽혀진다. 이렇듯 박순과도 친밀하였던 것이다. 한편 윤의중은 노구의 유희춘 柳希春이 경연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국왕에 진언하는 과정에서 여러 동료와 함께 하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31) 후배도 적지 않게 배려하였던 듯하다. '三唐詩人'의 칭호가 있는 백광훈白光勳(1537-1582)에게 오래 전에 헤어졌는데 잊지 않고'日曆'을 보낸 적이 있었다."

 

2, 기축옥과 해남 윤씨가

 

1570년대 후반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기 전부터 조정은 반목의 조짐이 나타났다.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이 이조정랑 문제로 충돌하더니만, 허엽 許曄과 이이李珥는 향약 정책과 서경덕 학문 평가를 둘러싸고 알력을 빚었는데, 이 과정에서 후배사림은 선조의 신정新政 이래 별다른 성과를 이루어 내지 못한 선배사림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국왕에 대한 확실한 견인 이를테면 '格君'의 의지가 없고 사림 정치의 근본 수단인 교풍矯風과 양사養士를 미룬 채 미봉적인 시무개혁만을 앞세운다는 것이었다. 또한 선배사림이 외척인 심의겸과 밀착되어 있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다가 박순의 '노비살주사건' 의 판결 결과를 놓고 후배사림은 선배사림은 완연히 갈라섰다. 동인과 서인으로 분립한 것이다. 이러한 정국의 변동 과정에서 동인의 한 중심에 이발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남 윤씨 역시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이 분란의 중심이 있다고 판단한 이이가 양인을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조정 갈등을 조정하고자 하였던 선조 8년(1575) 가을쯤, 이발이 정철에게 심의겸과의 관계를 청산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이때 정철鄭澈은 “심의겸이 어버이를 섬기고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 볼 만한 점이 많이 있는데 어찌 그대 아저씨 윤의중이 형의 아들을 죽이고 자기 아들에게 종통宗統을 빼앗아 준 것과 같은 지경에야 이르렀겠는가?" 하며 윤의중까지 공격하였다.33)


윤의중의 조카란 심질心疾과 광증狂症으로 광우패려狂愚悖戾한 일이 많아서 윤홍중이 진도로 쫓아냈던 외아들 윤사회尹士晦이다. 결국 의금부에서 12차의 형신 끝에 결국 장폐杖斃되었는데 신응시 등이 '淫烝'으로 고발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철이 이러한 윤사회에게서 종통을 빼앗으려고 미치게 하였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더구나 차남


31) 미암일기 병자 1576 9월 25일. 副提學尹毅中大司憲朴啓賢僉知李遴宗簿正李廷馣相繼來到尹致遠日 頃於十八日 朝講已及下番金應南掌令許晉獻納洪 進咸啓柳希春宜置經幄不可遠離宜勉召來於明春云云.”
32) 玉峯詩集 中 謝駱川相公寄日曆 舊別知何處新春又客邊不禁愁度日渾欲醉忘年 天盡歸鴻外 書傳振蟄前 大平占氣色 吾策只東田"
33)「선조수정 실록」권21, 선조 20년 9월 1일 이 삽화는 조헌이 상소에 적었다
34) r선조실록」권7, 6년 10월 12일·ll월 3일 및 12일

 

유기唯幾가 형의 후사로 삼는 문제는 윤의중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해남에 살아있던 윤항尹衖 . 행行 복復을 비롯한 일가의 공의를 거친 것이었다.35)


선조 14년(1581) 5월 윤의중은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36) 그동안 조정을 떠났던 이이가 동인과 서인의 보합을 내걸고 복귀하여 대사헌으로 있을 때였다. 그러나 동서보합은 쉽지 않았다. 동인 중에는 동서보합보다는 시비분변是非分辨이 필요하며, 그러자면 심의겸沈義謙이 먼저 퇴진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발도 그러한 입장이었다. 이이는 동서보합을 위하여 이러한 사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인이 요구하는 정철 퇴진 문제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이는 이발의 협력이 절실하였고, 이발과 정철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이이가 '형조판서 윤의중 불가'를 앞장서 발의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이었다. 이때 성혼成渾이 "그대는 이발과 매우 밀접하므로 윤의중을 탄핵하겠다는 의향을 미리 알려라"고 충고하자, "윤의중을 힘써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이발이 꺼려할 것으로 알고 그러는 것인데 이 것은 이발을 모르는 소치이다"라고 응대하였다.37) 양사에서 '윤의중의 호부豪富가 탐학의 소치' 임을 내세우는 공론을 일으켰지만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사실 해남 윤씨가의 당대 호부는 연안의 자연조건을 충분히 이용한 '언전堰田개발'의 산물이며, 동시에 상속제도에서의 처변妻邊재산의 첨부와 종통의 향배에 따른 가산 집중의 결과이었다. 그러나 윤의중에게 씌워진 '탐학에 의한 호부' 라는 오명은 굴레가 되었다. 특히 선조 18년(1585) 가을 이발이 서인 퇴진을 주도한 다음부터는 서인이 이발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조헌 , 이귀李貴등은 으레 윤의중의 호부만이 아니라 앞서의 '윤사회 사건'까지 들췄다. 동인과 서인의 명목을 만든 장본인을 윤의중으로 지목하면서 이발의 배후인양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윤의중으로서도 자변상소를 올렸지만,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38) 결국 '정여립 사건' 의 여파로 일어난 기축옥에서 윤의중은 이발의 외숙으로서 연좌된 것이 아니라 호부가 빌미가 되어 파출되어 귀향 중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윤선도는 네 살이었다. 그리고 2년 이상을 갇혔던 이발의 노모 즉 윤선도의 대고모가 옥사獄舍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기축옥으로 이발의 가문은 멸문의 지경에 이르렀고, 해남 윤씨가 또한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3 윤선도의 생부와 양부

 

윤선도의 생부 윤유심尹唯深(1551-1612)은 선조 9년(1576) 생원시에 급제하고 음사蔭仕로 청안현감清安縣監을 지냈는데, 정유재란 때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선조 38년(1605)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백광훈이


35) 해남윤씨문헌 권2 丙戌疏(1586)
36) r선조수정 실록 권 15, 14년 5월 1일
37) 석담일기 신조 14년 5월 이렇듯 이이가 윤의중을 반대한 이면에는 원칙주의자로서 인망이 두터웠던 이발이 정치상황을 떠나 자신을 존숭하고 협력하고자한 점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정철을 지키려고한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35) 해남윤씨문헌 권2 丙戌疏(1586)
39)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을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일반 시각인데, 그것은 정여립과 아무 관계가 없는 李黃鍾·曺大中 등의 억울한 죽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황종은 윤효정의 외손으로 윤의중의 고종사촌이 된다.
40) 선조실록」권 1、20년 3월 22일 . 권92 30년 9월 10일 . 권132 38년 10월 21일 가축옥 이후에 벼슬을 놓았다가 다시 복직하였던 것 같다

 

윤유기의 종숙從叔 윤관중尹寬中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통보通甫가 본사本司의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한결같게 상봉相奉할 수 없으니 도리어 한탄스럽다”40) 윤유심은 그다지 사환에 뜻이 없었던 것 같은데, 한동안 남양에서 살았는데, 먼저 '令德'과 '婦道' 가 뛰어난 순흥順興 안씨安氏(1551~1609)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42)


윤유기尹唯幾(1554-1619)는 형과 많이 달랐다. 일찍이 노진盧禛(1518-1578)에게 배웠는데, 백광훈과 같은 선배 문인의 지우를 얻었다.43) 선조 13년(1580 문과에 급제한 윤유기가 마땅히 들어야 할 승문원承文院에 들지 못함을 무척 아쉬워하였다.44) 이후 승문원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문과 급제자치고는 그다지 현직에 나서지 못한 것 같다. 더구나 기축옥 이후에는 문장을 드러내지 않고 교유도 좁아졌다.


윤유기가 조정에서 제 나름의 역할을 찾은 것은 임진왜란 중이었다. 선조 27년(1594) 41세에 병조정랑이 된 후에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왜란이 끝난 선조 31년(1598) 안변부사安邊府使시절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북 지방을 횡행하며 작폐를 저지른 명군을 진압하는 공로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병조 및 호조의 참의와 강원감사를 지냈는데,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부평과 담양의 부사로 나갔다. 대북정권大北政權하에서 입지가 좁아진 것이다.


윤유기의 최후는 곤혹스러웠다. 광해군 8년(1616) 윤선도가 올린 유명한 '丙辰疏' 때문이었다. 대북정권의 비방은 심각하였다. “아들을 사주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윤선도가 보낸 편지가 있다. "우리 집안은 삼세 에 걸쳐 국위을 먹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군부의 위태로움을 좌시坐視하고 어찌 헛되이 처자를 보호하려는 마음만을 구사驅使하려 한단 말입 니까?" 결국 운유기는 아들의 뜻을 받아들이고, 유배지에 글을 보내 위로하였다.45)

 

 

Ⅳ. 고산 윤선도의 출처出處와 사상思想

 

1, 시론詩論과 학문관學問觀

 

지금은 시인으로 유명하지만, 당대의 윤선도는博學과·自得의 학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허목許穆(1595-1682은 '널리 경사 經史와 백가白家를 읽었으며 의약醫藥, 복서ト筮. 음양陰陽, 지리地理등 연구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하였으며, 홍우원洪宇遠1605-1687)은 '문자文字의 훈고訓詁'에 구애되지 않고 자득自得의 묘妙를 얻은 바가 많은데 세상에서 공을 논하는 것을 보면 단지 직언直言하고 감히 간쟁諫爭을 한 것으로만 알지 학문學問의 공功과 경제經臍의 재材는 아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46)

 

41) r옥봉집」별권「與尹宣傳寛中,. 백광훈도 과거를 보지 않고 뒤늦게 선릉참봉 등의 벼슬을 한 것으로 보면, 윤유기의 처음 벼슬도 이러한 계통에서 시작하였을 것이다. 백광훈이 운유심에게 보낸附尹通甫別名惟深, 野岸雲開水似天寒林落日客行邊當杯莫怪醉成倒別後相忘猶有眠'가있다.
42)『고산유고」권1, r乙卯臘月 往南陽伯父舊宅有感」
43) 윤유기 계문」r옥계 집」권7: r옥봉집』상,「別伊成甫名唯幾
44) r옥봉집」별권「與尹宣傳寬中書」 减甫之不入槐院時誌之隘可笑”
45 r 고산유고 권5, 祭顯考文(己未謫機長時) 顯考始也址終遂許之止之者愛子之情也 許之者爲國之義也...嘗寄一絶於子日休塞外千行淚頻寄天涯字書但願謫居無痴丙 何嫌田里自耕鋤 ' 윤유기는 처음에는 노원에 묻혔다가 유배에서 돌아온 윤선도가 해남으로 이장하였다(1631)
46)許穆 神道碑銘및 洪宇遠「諡狀, 고산유고 부록.

 

윤선도의 박학과 자득 특히 '經世事功之學'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궁리로 밝히지 못할 사물의 법칙과 자연의 이치는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었다. 제자 정유악郭維岳에게 袼物·物格을 설명한 바 있다. "천하의 사물은 이미 알 수 있는 이치가 없지 없음이니 궁구窮究하라 한 것이고... 물리物理의 극치極處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물物의 극처板處가 내 마음 위에 이르게 된다"47) 궁리 理즉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인간의 인식능력과 자연의 내재법칙을 일치시키는 과정이며, 이것이 마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격물치지를 통하여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법칙 그리고 인간의 정서와 자연의 운동은 하나가 된다


시가詩歌도 인간과 자연, 인식과 감정의 일치를 통한 자기정화의 발로였다. 역시 정유악鄭維岳에게 "詩란物態를 펴서 늘어놓은 것이다"고 하면서 “추운 것을 춥다고 하지 않고 더운데 덥다고 하지 않고 위험한데 위험을 말하지 않으면 무식무별無識無別에 불과하고 본심을 잃은 사람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48) 물태物態를 떠난 인정人情은 없으며 또한 물외物外에서 유희 遊戱하고서는 물태物態를 나타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대군 시절의 효종에게도 비슷한 시론詩論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시詩는 성정性情을 읊고 정신精神을 유통시키는 것이므로 알아야 하지만, 민이民彝와 물칙物則에 관계가 되면 읽어서 행실에 유익함이 있어야 하고,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말하는 것이면 보아서 다식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49) 그러면서 두 편의 시에 대하여 하나는 유탕망반遊蕩忘返의 뜻이 있고 하나는 현능간진衒能干進의 심사내가 드러나 있다 고 혹평하였다.


이렇듯 윤선도에 있어서 궁리는 마음을 떠나 있을 수 없으며, 시가詩歌또한 사물 및 자연과의 일체화를 통한 정감과 도리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만물에 대한 궁리, 자연과의 교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마음의 주인인 인간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유가 전통의 天人合一論을 굳게 믿고 있었다. 여기에서 하늘 혹은 하늘의 이치는 인간을 초월하는 이념형의 존재가 아니였다. 어디까지나 인사人事가 잘못되면 재앙을 내려 인간을 바로 잡아주는 구체적 소이所以로서의 실존하는 천리였다. 따라서 하늘의 재앙 등을 거부할 없는 운명運命과 회피할 수 없는 운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논리를 대책對策에 정리하였다.


1633년(인조 11) 문과文科 회시會試의 책제策题는 “수재나 한해 등의 이변異變이 인사人事 아니면 음양의 조화인가, 혹여 이것이 나라의 정해진 운수[定數]에 처한 것이 아닌가를 묻은 雨暘策이었다."50) 小氷期, 에 따른 재해가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윤선도는 먼저 책제策題가 "임금의 밝음이 부진한 바가 있고 신하의 착함이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 시정時政이 혹여 어긋난 것이 아닌가'라고 되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재앙災殃과 난망亂亡을 음양의 화괴和乖나 이미 정해진 운수로 이해하려는 발상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하늘의 상서나 재앙은 인사人事의 무실無失과 유실有失에 있다"고 단언하였다. 즉 인사가 중화中和에 있으면 재앙도 상서가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임금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임금은 한 귀로 하늘에서 듣고 한 귀로는 백성에게 들어야 한다. 하늘이 싫어하는

 

47) 고산유고 권4, r答鄭進士吉甫大學問目別紙, 400쪽.
48) r고산유고」74, r答鄭進士吉甫書」, 419쪽.
49) r고산유괴 권3하、「送大君房掌務書」(庚午), 374쪽 윤선도는 小學부터 書課를 정하여 엄격하게 가르쳤는데 훗날 효종은訓誨를 잘하여 解蒙할 수 있어 그의 공을 잊은 적이 없다고 예우하였다(r효종실록 권8, 3년 1월 18일).
50) 고산유고 권6, r對雨暘策, 488-492쪽.

 

바는 반듯이 하지 않고 하늘이 꾸짖는 일은 반듯이 무시하지 말 것이며, 백성이 미워하는 일은 모두 버릴 것이고 백성이 윈하는 바는 모두 좇아야 하는 것인데 무릇 오로지 참되게 할 것이지 거짓이 없어야 한다.” 군주가 하늘과 백성을 섬기는 마음과 실천, 그것은 인사의 중화를 향한 핵심이었다. 지금의 재앙이 두려우면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통한 중화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책의 요지였다
 

이 해 겨울 전시殿試의 어제御题는 '경전의 종지宗旨가 무엇인가' 이었는데, 윤선도는 어찌 종지에 그치는 것이겠습니까? 하며 다음과 같이 대책하였다.51) 먼저 문자가 있기 전에는 마음으로 전하고 가르치던 성현의 도道가 문자가 있고 난 후 책에 쓰여 지게 되었음을 말하면서 “성현의 서書는 재도載道의 기器이며 성현의 도道는 전심傳心의 법法”이라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경전經傳즉 성경 현전聖經賢傳은 마음을 전하는 그릇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경전은 모름지기 도道와 심心은 일관일규一貫一揆한다는 다시 말하여 마음에 도를 담는 심득내의 자세로 읽어야 하고, 이때 비로소 경전이 "入道之指南"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였다. 성현의 수사修辭에 머리를 조아리기만 하니 書自書 我自我가 되어 경전이 독자의 여정旅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치도治道가 날로 떨어지고 학자들이 성분性分과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하여 民生·日用.彝倫이 추락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로지 경전의 종지宗旨만을 섬기면서 성분지학性分之學의 실實이 무엇인지 모르는 학풍學風과 사습士習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도 다만 경전의 요령,,에 부지런하실 뿐 심득내의 실實에 미진함을 생각하지 않음은 당연하였다. 이렇듯 윤선도는 경전의 요령이나 종지에 얽매이는 공부를 거부하였다. 성인이 마음으로 전한 중화의 도를 마음에 두는 심득心得의 자세를 중시한 것이다. 이 것이 없으면、治道를 구현하고 .民生·日用.彝倫을 보장하는 공부가 될 수 없었다


윤선도는 근세에 정개청鄭介淸(1529~1590)을 심득의 도학을 이룩한 학자로 보았다. 일찍이 유성룡柳成龍(1542-1607)도 평생을 학술學術과 행검行檢으로 자임하였다. 고 하였지만, 자신도 하학상달下學上達로 심조자득深造自得하였으며 성분性分을 다하고 저실著實을 노력하였다 .고 높이 평가하였다 '동방의 진유眞儒로서 이황 의 다음에 오를 만하다 고도하였다.52 그의 저술 r愚得錄J은 "전인前人이 계발啓發하지 않았던, 실로 후학後學의 지남指南으로 손색이 없었다.”53)

 

2, 기질氣質과 가도론家道論

 

윤선도가 벼슬에 나간 것은 인조 치세 대군사부大君師傅를 포함하여 호조정랑戸曹正郞과 성산현감星山縣監등으로 6년, 효종 치세 예조禮曹·공조참의工曹參議로 3년을 포함하여 모두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丙辰疏'(1616)와 論禮疏'(1660) 등으로 인한 유배생활이 15년이 넘었다. 그리고 중년 이후에는 대부분을 해남에서 보냈다. 이러한 유배와 퇴거는 반정공신 및 서인산림과 불화한 탓도 있었지만, 효종으로부터의 극진한 예우까지 뿌리치고 "고향에서

 

5)「고산유고」권6, r對經傳宗旨策 495-6쪽.
52) 고산유괴 권3상·國是疏J. 352-3쪽. 당대 학술 계통을く이황-정 개청>으로 평가함으로써 송시열 등이 주도한 〈이이-김장생>의 도통론을 정면에서 부정한 셈이다.
53 고산유고 권4 上鄭知事世規書,  399-400쪽 윤선도는 말년에 愚得錄의 일부 訛誤를 고증하고 비용을 마련하여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己亥.庚子禮訟으로 귀양을 가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허목이 서문을 지어 간행하였다 홍우원, r諡狀).


원옹園翁, 계우溪友와 더불어 성조聖朝를 노래하며 살리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54) 평소 “사군자士君子의 처세處世는 출出과 처處 두 길뿐이니 조정朝廷이 아니면 산림山林이다" 하였지만, 후자에 더 비중을 두는 처세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55) 그에게 퇴거의 의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재주가 있고 건강하면 힘을 펴고 못나고 병이 있는 자는 엎드려야 함은 수레의 바퀴가 둘이고 새는 두 날개가 있음과 같은 이치다."56)


한편 이러한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는 기질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남과 융화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허목이 말하였다. "해옹诲翁은 매사에 남들과 달리하려고만 한다.”ST) 그러나 자신의 뜻을 숨기는 법도 없었고 굽히지도 않았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으로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1569~1635)이 소모사召募使로 내려왔을 때에 이렇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유관,,의 사자士子를 억지로 불러들이고 또한 무고無告한 잔민殘民을 뽑아가니 유해무익有害無益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쓸모없는 군사나 급할 것 없는 군량을 구하지 말고 다만 준걸俊傑을 찾아 천거하는 일은 어찌하지 못합니까?" 선조비宣祖妃의 인왕후懿仁王后의 사촌으로 자신과도 먼 인척이 되는 고관에게 보내는 답장치고는 경외하거나 위문하는 상투조차 찾을 수 없다."


인조 10년(1632) 반정의 일등공신이며 예조판서인 최명길崔鳴吉(1586 ~ 1647)이 윤선도를 儒醫로 약청藥廳에 천거한 적이 있었다. 임금을 근시近侍할 수 있는 자리로 어쩌면 호의였고, 그런 만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거절하였다. 사대부가 의약에 밝다고 하면 .천시賤見하고 비오卑汚하게 취급하던 세태가 못마땅하던 차에 자신의 장처長處를 醫術로 간주한 것에 마음이 상한 것이다.

 

그에게 의약은 잡학이나 기술이 아니라 醫道였다. 그리고 "산림山林의 위탁委託도 없고 부형父兄의 위세偉勢도 없으며 인아姻婭의 원조援助가 없고 붕우朋友의 떠받음도 없는데 5년간이나 훈척勳戚과 같이 지냈다”고 하였다.") 최석정의 호의에 대하여 학파와 혈연으로 인재를 발탁하고 공신과 왕실 인척이 정국을 좌우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응대한 것이다. 인조 14년(1636)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동家僮과 격군格軍을 모아 해로를 이용하여 북상한 윤선도는江華失守를 알고도 강화도 근처 항산缸山까지 갔는데, 大駕東出之說의 풍문이 있어 호남으로 돌아가야 임금이 머문 곳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는 생각하고 되돌아와서, 바로 보길도로 들어갔다.61) 이 때문에 경상도 영덕으로 1년 가까이 유배를 갔다. 이러한 처신은 다름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보낸 편지에 “분문奔問과 주조趨朝는 다르다"고 하면서 趉朝하지 않는 것은 '국가에 비보裨補함이 없이 벼슬의 계단으로 삼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고 적었다.62)군주제 하에서 쉽지 않는 발상이며 행동이었다.
이러한 윤선도는 시문에서 꾸임이 없었다. 부친까지 "무오윤기無溫潤氣01 병病이다"고 평할 만큼 기질氣質을 높이고 부미浮齋를 일삼지 않았던 것이다."63 물론 한결같지는 않았지만, 이 점이야말로 최고의 시인이 되는 밑거름이었

 

54) r고산유고 권2, r辭職乞骸疏 , 311쪽
55) r고산유고 권4, 上鄭判書世規晝 (16484d), 385쪽.
56) r고산유고 권5, 供辭(1638), 466쪽.
57) ra남윤씨문현, 권14, r忠憲公遺事」此公每事欲異於人吾未知也
58) r고산유고 권3하. 上錦溪群陳亮書, 372쪽
59) 박동량은 선조 말년 영창대군의 보호를 위임받은 8유신 중의 한 사람으로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는데 박세채의 조부이기도 하다.
60) 고산유고 권4, 上禮曹判書崔鳴吉書」, 369쪽.
61) r고산유고 권5하, 供辭(1638), 465쪽
62) 고산유고 권4, 答人書, 382쪽

 

다 이러한 솔직 담백한 시격詩格은 노년에도 변함이 없었다. 인조 24년(1646) 강빈姜嬪사사賜死를 반대하였다가 진도로 유배를 온 이경여李敬輿(1585~1657)가 시를 보냈는데, “석실石在에는 바야흐로 만권 책이 펼쳐있고[石室方開萬卷書r
“조그만 뱁새 메추라기 부질없이 북극해 고기를 부러워했네鷦鷯空羨北溟魚r 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제 책을 읽으며 지난 시절의 사환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이에 대한 윤선도의 대구는 "도타운 녹봉 받은 이래 글을 끊고서厚祿從來斷絕書r,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까 그대가 물고기가 아닌데[何知魚樂子非魚r 이었다.60)

 

이러한 숨김 없는 기질은 부형과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배지 삼수에서 큰 아들 윤인미尹仁美(1607-1674)에게 양구사업養駒事業을 그만 둘 것을 당부하는 한편 자신은 쉰 살 이전에 입지 않던 명주옷을 입는 아들이 입고 있는 습성을 질타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먼저 ..영광조부님(윤홍중: 필자)께서는 불의不義한 일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아마 부富에 마음을 두셨던지 생육生育이 쇠절衰絶하였다"고 하면서, 생부(윤유심: 필자)의 호엽好獵과 가형家兄(尹善言: 펼자)의 양구養驅와 務服美具를 숨김없이 나열하였다.66) 가족사에 대한 감회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던 것이다. 비록 언제 생을 마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절검과 근면이 가업의 기본이 된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묻어나지만, 24세(1630)에 진사에 급제하고도 자신을 대신하여 가업을 책임을 졌고 이미 오십이 훨씬 넘긴 아들에 대한 훈계치고는 너무 신랄하였다


이렇듯 윤선도는 실로 멈춤과 감춤이 없었다


그러나 가족애는 지극하였다 약관 18살에 진사에 너끈히 합격하고도 세상을 버린 차자 의미義美(1612-1636)의 죽음 앞에서는 통곡하며 제문을 적었으며, 손자 이구爾久(1631-1656)마저 후사 없이 불귀의 객이 되자 나의 재앙이 너에 미쳐 네가 벌을 받았구나.” 하며 어쩔 줄 몰랐다.66) 장자가 현종 3년(1662) 필체를 바꾸면서까지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빈척擯斥을 당하여 行公하지 못하자, “재주가 탁지度支(호조: 필자)를 판가름할 만한데, 나로 말미암아 금고를 당하였다.고 안타까워하였다 서자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윤선도는 서자에게도 자영한 재산을 상당 부분 분급하였다.", 서모와 서제도 배려하였다. 광해군 4년(1612) 생부가 임종하면서 서모에게 노비를 사여 하였는데 "여러 해를 받들어 모신 서모庶母에게 사여賜與하시라는 윤선도의 간청을 받아들인 일이었다. 가형家兄 윤선언尹善言(1580-1628)이 다른 노비로 바꾸려고 하자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물론 윤선도의 가형에 대한 생각은 허술하지 않았다. 첫째 형수 여산 송씨(1583-1607)를 일찍이 보내고 영광 김씨

 

63) r해남윤씨문헨 권14,「忠憲公遺事」.
64) 孤山遺稿권1,「和李政丞」
65) r중헌공가훈 靈光祖父主雖不爲不義之事似留心於爲富故生育衰絕.. .況每覓兒駒養成取利士夫之大病吾每病汝汝不可止耶生父主雖無養駒取利之事微有鄧公之癖有如程伊川之好獵此先世,断無也大父主病之至作詩而誨之然終不決科未必非此病爲崇也兄主養駒如汝一生事於斯且務服美俱非男子之陽德也勤於文而不得一名後事終至零替可勝歎哉
66) r해남윤씨문헌 권13,「진사공」계문 : 고산유고」권1, r挽孫爾入·尹義美는 인조 8년(1630) 19살에 형仁美와 함께 진사시에 들고爾久를 두었는데, 유복자爾厚(1636-1699)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유복자를 낳은 동래 정씨는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14일 후에 부군을 따랐다
67)『해남윤씨문헌 권15, r헌납공, 숙종 4년(1678)에 사간원 헌납으로 추증되었다
68)尹煒,「甫吉島識, 이에 의하면 윤선도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재산이 아닌 자영 재산은 서자들에게 내렸다고 한다.
88 r 고산유고 부록 諡狀. 副正公寢疾公晝夜侍疾不解帶不離則者數月及其將終公請之日庶母承侍累年 豈無賜與之意乎副LE公不能言而色可之公遂自取紙筆,洲吏臧獲券而歸之其後公伯氏以其所與多先妣舊使者欲以他婢僕換與之公執不可 한편 자신이 기장에 유배되었을 때에 서모가 세상을 떠나자,庶弟善養에게 죽식을 떼지 말라는 간곡한 위문편지를 보냈다(r고산유고 권3하,「慰庶弟善養書)

 

(1594-1626)까지 세상을 떠나자 큰 부인은 종내 아이 기르지 못한 한을 품었는데, 이제 남편의 울음소리가 더욱 슬프구려." 하였다" 그리고 삼취三娶(원주 원씨:1601 ~ 1672)에게서도 후사를 이을 기미가 없자, 장래가 촉망되고 판서 정세구鄭世規의 딸과 맺어준 차남 윤의미義美(1612-1636)를 들여보냈다.71)

 

3, 정론과 사상

 

윤선도는 오랜 기간 해남에 살고 사환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은둔자는 아니 었다. 효종 치세가 되어 관직이 내려와서 사직을 하거나, 국사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 서슴없이 자신의 정론을 피력하였다.

 

1) 존군尊君. 민귀론民貴論

 

윤선도에 있어서 군주는 만민을 살리는 하늘의 구실[저있을 감당하는 존재였다.") 그런 만큼 임금과 백성은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비강약 卑强弱과 대소경중划4腫이 달랐다尊君論이었다. 그러나 백성은 "가까이 하여야지 아래로 삼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실로 두려워야 하여야 하는 존재" 였다."-民貴論이다. 만인이 군주의 신하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군주는 하늘로부터 후대厚待를 기대해서 아니 된다. 만민을 살리 라는 하늘의 구실이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세움은 한 사람을 후대함이 아니라 만민萬民을 위함이며, 임금이 관리를 두고 직책을 나눔은 백관百官을 후대하자고 함이 아니라 만민萬民을 위하자는 것이다."74) 군君·관官은 만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爲民立君設官論, ,民本國家論이었다.

 

이렇듯 윤선도의 사상에서는爲民, 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자면得人이 가장 중요하였다. 안민安民과 자강自强의 요체가 득인得人이기 때문이다.75), 일현一賢을 등용하는 것이 백성百城을 쌓은 것보다 낫다 고도 하였다.76) 그러나 윤선도가 보기에 당대의 위정자들은 위민·안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편민便民이 아닌 학민虐民, 득민得民이 아닌 실민失民, 이민利民이 아닌 해민害民을 자행하고 오로지 영달을 일삼고 녹봉이 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77) 더구나 군주는 허약하기 그지없고 속수

 

70) 고산유고」권1, 挽仲嫂金氏.
78) 윤선도의 삼남禮美(1619~ 1669)와 손자 爾錫1626~1694)은 물론爾久도 후사가 없었다. 결국 현종 9년(1668)爾厚를 尹禮美의 후사로 삼고 爾厚의 셋째 아들 宗緖(1664 ~ 1697)는 爾久의 후사로 넷째 斗緒(1668-1715)는 爾錫을 잇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윤선언의 第三配 원주원씨가 이후를 예미의 후사로 삼는 것을 항의하는 소장을 올리기도 하였다r현종실록」권17, 10년 12월 14일), 尹宗緖는 숙종 22년(1796) 장희빈 私親의 묘소 작변에 따른 丙子黨獄에 휩싸여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고, 광주군 경안면 송정동에 묻혔다. 숙종실록」권30, 22년 7월 27일:尹昌緖,「第三弟進士君墓誌」, r해남윤씨문헌」)
72)『고산유고 권2, 陳時務八條疏,人君卽是天之役,
73) r고산 유고 권2,「時弊四條疏.臣聞書曰民可近不可下ㄡ日可畏非民ㄡ日愚夫24 能勝予…夫君者民之主也民者君之臣也"
74) 고산유고 권2. 辭工曹參議疏“ 蓋天之建國立君非厚一人也爲萬民也君之設官分熾非厚百官也爲萬民也"
75) 고산유고」권2, r應旨疏
76) 고산유괴 권2,「時弊四條疏..
77) r고산유괴 권2, r辭工曹參議疏. 337쪽

 

무책이었다. “임금은 위복威福을 행사하지 못하고 신하에게 정권政權이 있으니 임금은 위에서 고립孤立되었다." 서인의 독주에 따른君弱臣强을 지적한 것이다.

 

2) 파붕당론破朋黨論과 반북벌론反北伐論

 

윤선도는 당대를 위망危亡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심지어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면 위에서 하늘이 노하는 것은 만고에 변하지 않는 상리常理"라거나, "하늘은 임금을 개도改圖할 수 있으니 임금이 관리를 임명하고 교체할 수 있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고까지 하였다.79)
이러한 위망의 진원은 붕당이었다. 1652년值종 3) 18년 만에 상경하여 예조참의가 되었을 때 .畏天,治じ辨人才 明賞罰 振綱紀 破朋黨 強國有道 典學有要, 8개조의 방책을 올릴 때 말하였다. “무릇 붕당이 있으면 시비非가 전도顛倒되고 현사賢邪가 뒤섞여 군자는 모두 불러 나고 소인이 모두 나서게 되어 임금은 이미 임금이 아니고 신하는 이미 신하가 아니다." 붕당이君君臣臣' 의 명분조차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붕당 전제專制의 상황에서는 조정에 인재가 모일 수 없었다. "한 당이 뜻을 얻으면 다른 당은 모두 배척을 당하기 때문이다" 윤선도의 분개는 격렬하였다. "하늘에서 인재를 낼 때 상上·중中, 하下 삼품이 있는데 중품中品이 처음부터 많고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적은 것인데, 금세今世에 등용되는 사람은 모두 하품下品입니다. 비록 하품을 택하고 싶다고 하여도 어떻게 하품을 이리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모두 하품을 얻은 소이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한 붕당 상황에서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내세운 북벌론北伐論은 허구였다. 그래서 “붕당을 없애지 않고 결코 하북河北의 적을 무찌를 수 없다"고 하면서孟子」의 “以大事小者는樂天者요以小事大者는畏天者라,樂天者는保天畏天者는保其國이라"를 인용하였다. 북벌 정책이 나라와 백성이 아니라 붕당 본위이며 붕당 주도임을 들춰낸 것이다. 이보다 급한 것은 군주 수신을 통한 득인得人과 인정仁政이었다."

 

3) 안민론安民論과 노비제도개선돈奴婢制度改善論

 

효종 6년 조정에서 해도민海島民구축驅逐. 연해어민의 강화도 이주 . 성루城壘축조 및 해도금속정책海島禁松政策등을 추진한 바 있었다. 효종 6년(1655) 10월 해남에서 올린時弊四條疏는 이러한 정책을、失民으로 규탄한 상소였다. 이렇게 말하였다. “실민失民의 정책이 전하의 본심이 아닐 진대, 그렇다면 하늘이 그렇게 하라고 한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한 일이란 말입 니까? 혹여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날마다 간극間隙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유암한

 

78) r고산유고 권3상·「國是疏.
79) 고산유고 권2、"時弊四倏疏및 r應旨疏.
80) r고산유고 권2,「陳時務八條疏J
81) r고산유고" 권2, r應旨疏.
82) r고산유괴 권2, 應旨疏.
83)고산 유과 권2,「己丑疏,'爲治之道 則爲政在人取人以身修身以道修道以仁"

 

곳에 숨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것이 아닌지 두려울 따름입니다.에 무척 날카롭고 직선적이다
여기에서 윤선도는 평지를 통하여 진격하는 적을 막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산성 축조를 반대하는 한편 해도와 연안의 어부를 강화도로 옮겨 성루를 쌓고 격군 등으로 동원하는 것은 백성의 삶의 터전을 박탈하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통박하였다. 또한 금송,,과 방도防盜를 이유로 섬에서 주민을 축출하자는데 이는 '국가가 백성을 애휼 하지 않고 송목을 우선 돌보는 소치나 다름이 없다"고 하면서 “섬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벌채를 누가 감시할 것이며, 그렇다면 양송자 도 기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진도와 노화도에서의 간척과 보길도의 원림조성에 따른 해도의 생활과 경험이 녹아나는 반론이었다. 더구나 '육지에 전려田廬와 산업産業이 없기 때문에 섬에 들어와 고기를 잡고 얼마간의 토지를 개간하여 살아가는 해도민을 도적으로 취급하는 인식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일갈하였다. "섬에는 도적이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실제로 없다."


결국 도민 축출과 연해어민의 이주 및 축성 문제는 철회되었다." 그런데 이때 윤선도는 반대만 하지 않았다. 대안을 제시하였다. 즉 "도민이 개간하여 짓는 농토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이들에게 또한 송목,, 벌채를 막도록 하자"는 양송養松과 거민보호居民保護의 동시 추진이었다. 또한 노비 문제에서는 도망노비 추쇄와 모록자冒錄者의 환천 賤이 법령에 있지만, 그러한 법의 집행도 시의時宜와 완급緩急과 상략詳略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현행 60년의 추쇄기한을 향후 30년으로 단축하고, 노비의 신공,,도 1/3로 감액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奴婢制度改善論에는 노비를 잃고 민심을 얻는 것이 낫다는 현실 판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민도 나라의 백성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있었다. "국가의 노비가 비록 다른 것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고 하여도 모두 나라의 백성[國民]입니다. 하필 다시 노비로 삼아 나라를 섬기게 한 연후에 나라에 득이 되고 보탬이 되겠습니까?" 도망노비라도 그냥 살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비가 언제까지 노비일 수 없다는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귀천이 주어진 분수라고 하여 끝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옛날의 공경公卿의 후예가 서인庶人이 되고 서민의 후예가 공경이 되었다는 것은 모두 빈 말이겠습니까. 천지간 만물이 일정하게 변하지 않을 이치가 없는데… 어찌 유독 노예만 만대로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이치가 있겠습니까?"80) 실로 파격이었다. 천지만물이 변화하듯이 신분도 일정불변一定不變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것이다. 어느덧 노비제의 소멸을 예견하였던 것일까?

 

4)國是疏와論禮疏

 

윤선도의 상소에 대하여 효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대경大經, 대법大法이 여기에 있는데 말마다 절실하고 글자마다 간절하다"하고 반가워하였다." 그럴수록 서인의 배척은 집요해졌다. 효종도 공조참의로 제수하면서는 이렇게 질타

 

84) r고산유고 권2,「時弊四條疏, 319-326쪽.
85) 허목 r記言」별집 권19,海翁尹參議碑 時用事者方議盡出島民沿海諸漁子于江都築諸城壘又有量田號牌之議四方騷擾A極言不便上寵答之而朝廷不用也島民築城事上特罷之it谜3沿海諸漁子亦多議不果移.
80'고산유고」권2, r時弊四條疏J, 320쪽
87)「효종실록 권9, 3년 10월 22일

 

하였다 "이 사람은 아첨해서 뜻을 이루는 자가 아니다. 인신人臣에게 죄를 얻게 되면 떼를 지어 일어난다는 말이 과연 헛말이 아니구나!"그러나 서인의 공세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선도는 서인의 태생적 한계를 들췄다.

 

효종 9년(1568)의「國是疏였다."89) 여기에서 기축옥을 ·정여립鄭汝立 모반을 기화로 정철鄭澈이 조정의 선류善類와 초야의 이기지인異己之人을 장살戕殺하고 영감逞感하려고 일으킨 옥사라고 규정하면서 “지금 정철에게 드리워진 살사殺士의 악명惡名을 벗겨주기 위하여 정개청이 화를 자취自取하였다고 조작하는데 이는 기축己丑해보다 더한 무함  陷이다"라고 규탄하였다.")

 

상소는 효종에게 기축옥의 실상을 알리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정개청鄭价淸이 排節의 혐의로 희생된 사실을 통하여 서인의 모함과 음해가 국가의 원기元氣즉 국시國是를 해쳤다는 점을 상기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개청 서원의 훼철 명분은 향리 혹은 관속의 후예'로 삼은 데에 대하여 이렇게 반론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향리,,의 자손으로 공경公卿이 되어 혁세관면赫世冠冕한 자는 이루 셀 수 없습니다… 하물며 서원의 건립여부는 다만 인물의 현부賢否만을 논해야 마땅하지 인물의 세계世系를 논할 필요는 없다." 설사 향리의 후예라도 흠이 되지 않으며, 이 것이 서원에 배향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종 원년(1660) 4월 윤선도는 효종을 위한 대비의 상복을 기년복朞年服으로 관철시킨 송시열宋時烈(1607-1689)·송준길宋浚吉(1606~ 1672) 등을 통박하였다.") 즉體而不正, 즉 종통宗統이지만 적통嫡統은 아니라는 논리는貳宗卑主, 즉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나누고 임금을 낮추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임금의 권세와 나라의 홍복 즉 주세  勢와 國祥의 향배에 관련되는 만고萬古에 없는 국가의 변變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두 사람의 학식과 심술은 능히 알 수 없지만 그 사적鞑을 살피면 불인지 아니면 불지不智하다.


허목과 윤휴가 제기한 예송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결국 윤선도는 76세에 세 번째 유배를 떠났는데, 예미에게 보낸 편지에 임금은 반듯이 측연惻然하게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 하였다.92) 이즈음 r현종실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허목은 예禮의 본의를 논했을 뿐 한 마디도 송시열을 침해한 말이 없었는데, 극도로 미워하여 끝내 외직에 보임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15년 동안 이름이 사적 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의 시기심이 이와 같았으니 윤선도가 먼 변방에 안치된 것이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아, 너무 심하다”93,


예송은 단순한 의례 논쟁이 아니 었다. 존왕론尊王論과 신권론臣權論의 파열이며, 육경고학파六經古學派와 주자순정주의耔醇正主義의 학문 대립, 시대인식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었다.

 

88)「효종실록」권20, 효종 9년 4월 16일. 이 해에 효종이 윤선도가 도성 가까이 머물 수 있도록 수원에 저택을 지어주고綠雨堂이란 편액을 내렸다
89) r고산유고」권3(상),「國1是疏. 본문만 거의 만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로 여기에 정 개청의 '衖群와r柬漢節義晉宋淸詬悦을 첨부하였다 그러나 승정원은 상소를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90) 한편 윤선도는權諰(1604~1672)에게 정철은 萬古小人이며, 沙翁·宋君(김장생과 송준길: 필자)이 일종의邪論을 편파로 듣고 정밀하게 살피지 못하면서 그릇됨을 돕고 바름을 남김없이 해쳤으니己丑姦臣의 소위보다 배나 더 심하다 고 하였다(고산유고 권4, r答權贊善 金長生宋浚吉 李端相등이 정개정은 향리 혹은 관속의 후예이며 朴淳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背師하였으며 정여립과 山寺에서 회합하였다 는 등의 의론에 동조하고 이를 부추킴을 비판한 것이다.
91) 고산유고 권3(상),論禮疏. 이 상소는 올라가지 못하고,俞棨가 아뢰어 불태웠다
92)『고산유고」74,「寄小兒禮美書」。
93) r현종실록」권3, 현종 1년 9월 24일

 

V. 맺음말

 

지금까지 16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시기 해남 윤씨가의 학문과 붕당정치에서의 이 가문의 역할과 위상을 서술하였다. 가학家學은 아직 정의가 분명하지 않고 시대 상황과 당대의 학풍과 연관하여 살펴야 하므로 이에 대한 탐구는 수월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2세기 정도는 한 편의 글에 소화하기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17세기 후반 이후의 학문과 활동을 아예 다루지 못하였다(다만 송정동의 한 주인공인 윤종서만 [주 70]에서 간단히 언급하였다. 지금까지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흔히 고산 윤선도는 시인으로만 주목되었는데, 여기에서 그의 근본 원칙주의적인 유교정치憎의 저변에 깔린 존왕론尊王論과 민귀론民貴論, 그에 따른 구체적 민생안정방안 등을 살폈다. 그러나 경륜을 펴지 못하였다. 그의 융화하지 못하는 기질 탓도 있었지만, 반정공신과 서인산림과의 대결의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면에는 그의 가문이 겪었던 붕당정치의 상흔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과 배척에도 불구하고 윤선도가 박학과 자득의 학문을 이루고, 사환을 떠나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15세기 후반 이래 전라도 연안을 무대로 한 경제적 기반만이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가문의 학문과 활동, 및 가동이 밑거름이 되었다.


향후 윤씨가의 가학이 당대의 학풍과 어떻게 교감하며 변화하였으며, 윤선도 이후의 활동 및 예술과 기저에 깔린 학문과 사상의 성격을 과제로 삼고자 한다.


「朝鮮王朝實錄」.
r海南尹氏文獻」.
「古文書集成3:海南尹氏編古典資料叢書86-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尹善道,「孤山遺稿」,韓國文集刊(민족문화추진회)
金世弸, r十淸軒集」.
朴祥, r訥齋集」.
金安國,「慕齋集」.
金正國,「思齋集」.
梁彭孫,「學圃集』.
奇遵,「德陽遺稿』.
尹衢, r橘亭遺稿.
宋純,「俛仰集」.
柳希春 「眉巖集」.
朴淳,「思庵集」.
盧禛,「玉溪集」.
李珥,「栗谷集」.
白光勳,「玉峯集」.
趙憲, r重峯梟.
許穆, r記言』.
安璐,「己卯錄補遺」.
송일기 외,「海南綠雨堂의古文獻. 전라남도, 2003.
이종범, 고산 윤선도의 출처관과 정론, 대구사학74, 2004.
이영춘, 고산 윤선도의 학문과 예론」, r국학연구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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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file

저자 문숙자 

출신학교 및 학위 경희대학교 사학과 강사, 조선시대사 전공, 硏究論文 

년도  

3

孤山 尹善道의 時調에 나타난 思想性 硏究

저자 崔 美 愛, 指導敎授 柳 年 錫 

출신학교 및 학위 順天大學校大學院 國語國文學科, 文學 碩士學位 論文 

년도  

2

孤山 尹善道 文學硏究-고산의 儒者指向的 意識에 관하여-

저자 하 필 랑, 指導敎授 장 성 진 

출신학교 및 학위 昌原大學校 敎育大學院 國語敎育 專攻, 敎育學 碩士學位論文 

년도 2003年 12月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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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南尹氏家의 學問과 朋黨政治

저자 이종범 

출신학교 및 학위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 단국대석주선기념박물관 학술지 한국 복식 27호 (2009. 05. 02) 

년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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