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현의 객관에서 삼가 조부 이견당의 시에 차운하여 짓다 2수 〔殷山客館敬次祖父理遣堂韻 二首〕 이때 고산공이 경시관(京試官)으로 관서(關西)에 갔다.
홀연히 할아버지 글씨를 보고 나서 / 忽瞻先祖筆
관서의 이 행차가 비로소 흐뭇해라 / 始喜此行西
먼동이 트도록 잠 못 이루는 밤 / 明發未成夢
빈 방에 촛불 홀로 눈물 흘리네 / 空齋蠟燭啼
누구에게 지나간 일 물어보리오 / 憑誰問往事
오직 물만 동서로 흘러갈 따름 / 惟見水東西
지금도 영위의 새가 있는지 / 倘有令威鳥
은근히 나를 위해 울어 주누나 / 慇懃向我啼
내가 어렸을 때 이견(理遣) 조부(祖父)께서 관서(關西) 지방을 안찰(按察)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기도(箕都 평양)에 군자루(君子樓)를 세우셨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 기록이 〈평양지(平壤誌)〉에 실려 있다. 지난번에 기도에 와서 이른바 군자루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이는 필시 병화(兵火)로 인해 없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지금 이 은산현에 도착해서 객관의 들보 위에 걸린 조부의 오언절구를 홀연히 보게 되었는데, 필획(筆劃)이 완연한 그 시를 보고 있노라니 창연(愴然)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아, 내가 태어나 네 살이 되었을 적에 조부께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지금 그 용안(容顔)을 겨우 희미하게 기억할 수 있을 뿐이요, 어루만져 길러 주신 추억도 겨우 한두 가지만 생각날 뿐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로 조부께서 머무시던 경외(京外)의 제택(第宅) 중에 하나도 남아 있는 곳이 없으니, 어디에서 평일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 법도를 상상해 볼 수가 있겠는가. 이 제판(題板)을 보건대 분묵(粉墨 흑백)이 분명하여 금방 쓴 것만 같은데, 이 객관은 바로 그 당시의 옛 건물 그대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올라와서 휴식을 취하고 기거하며 담소하셨을 터인데, 이곳이야 어찌 옛날과 변함이 있겠는가. 배회하며 돌아보는 사이에 흡사 모습이 눈에 선하고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듯 하면서 애연(僾然)히 보이는 것이 있고 숙연(肅然)히 들리는 것이 있었다.
조부께서 이 현에 봄철의 순행을 하신 것이 바로 임신년(1572, 선조5) 3월이니, 지금으로부터 한 갑자(甲子)하고도 2년 전의 일이다. 옛날의 자취를 물어보고 싶어도 알 만한 자는 없고, 오직 산이 푸르게 서 있고 물이 유유히 흘러갈 따름이니, 멀리 사모하고 길이 생각하는 이 회포가 또 어떻다고 하겠는가.
나의 선고(先考)의 묘소는 해남(海南)에 있고 가루(家累 가속(家屬))도 그 지역에 있다. 금년 봄에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국휼(國恤)을 지내느라 영묘(榮墓)의 예를 행하지 못한 채 경화(京華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한 것이 5개월이나 되었다. 국휼을 마치고 나서 귀향하려는 뜻을 바야흐로 다잡고 있을 적에 홀연히 대궐에서 이렇게 유지(有旨)를 내리며 관서(關西)의 시험을 관장하게 하셨다. 이에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사람들도 내가 먼 길을 떠나게 된 것을 탄식하였다.
그러다가 오늘에 와서야 남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으로 오게 된 것이 바로 신명(神明)의 도우심이요 성상(聖上)의 막중한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객관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야, 드러나고 존재하여 잊히지 않는〔著存不忘〕 나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번 길을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 객관을 볼 수 있었겠으며, 성상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번 길을 올 수 있었겠는가. 감탄하고 탄식한 끝에 언어로 형용하지 않을 수 없기에 졸렬함을 잊고 삼가 원운(元韻)에 따라 시를 지으면서, 이와 함께 나의 무궁한 뜻을 뒤에 붙이게 되었다.
숭정(崇禎) 6년 계유년(1633, 인조11) 7월 26일 손자 선도(善道) 씀.
이견당의 원운〔理遣堂元韻〕
은산 고을에 병들어 누운 몸 / 病臥殷山縣
외로운 회포 냇물 따라 서쪽으로 / 孤懷澗水西
작은 뜨락 비바람 치는 속에 / 小庭風雨裏
꽃은 지고 새는 부질없이 우네 / 花落鳥空啼
[주-D001] 이견당(理遣堂) : 윤의중(尹毅中, 1524~?)의 당호(堂號)이다. 정랑(正郞) 윤구(尹衢)의 아들로 자(字)는 치원(致遠)이며, 낙촌(駱村)이라는 호로 많이 알려졌다. 1548년(명종3)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이조 참의, 병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 호조 참판으로 안주 영위사(安州迎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명종이 죽자 이조 참판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직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후 평안도 관찰사, 병조 참판, 대사헌, 대사간, 예조 참판을 거쳐 1576년(선조9)에 형조 판서에 올랐다. 동인(東人)으로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 때 삭출(削黜)되었다가 1610년(광해군2)에 복관(復官)되었다. 이견(理遣)은 진(晉)나라 위개(衛玠)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리에 입각해 마음을 다스려서 슬픔이나 원통한 마음을 풀어 없애는 등 감정을 잘 조절하며 관후하고 화평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 영위(令威)의 새 : 정영위(丁令威)의 새라는 말로, 학을 가리킨다.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가 고향을 떠나 신선이 되고 나서 1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찾아 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내려앉았는데, 소년 하나가 활을 쏘려고 하자 허공으로 날아 올라가 배회하면서 “옛날 정영위가 한 마리 새가 되어,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 처음 돌아왔소.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바뀌었나니, 신선술 왜 안 배우고 무덤만 이리도 즐비한고.〔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탄식하고는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後記 卷1》
[주-D003] 흡사 …… 있었다 : 《예기》 〈제의(祭義)〉의 “제삿날에 방에 들어가면 애연히 자리에 모습이 보이는 것이 반드시 있고, 주선(周旋)하며 문을 나가면 숙연히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반드시 있고, 문을 나가 들으면 개연히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반드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왕의 효는 눈에서 모습이 떠나지 않고, 귀에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마음에서 심지와 기욕이 잊히지 않는 것이다. 애모(愛慕)함이 극에 이르면 엄연히 존재하는 듯하고, 성각(誠慤)함이 극에 이르면 눈앞에 드러나서, 드러나고 존재하는 것이 마음에 잊히지 않는 법이니,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祭之日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 是故先王之孝也 色不忘乎目 聲不絶乎耳 心志嗜欲不忘乎心 致愛則存 致慤則著 著存不忘乎心矣 夫安得不敬乎〕”라는 말을 발췌하여 인용한 것이다.
[주-D004] 국휼(國恤) :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의 국상(國喪)을 말한다. 1632년(인조10) 6월에 승하(昇遐)하였다.[주-D005] 영묘(榮墓) : 돌아가신 어버이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며 과거 급제의 영광을 고해 올리는 것을 말한다. 보통 영분(榮墳)이라고 한다.[주-D006] 드러나고 …… 마음 : 《예기》 〈제의(祭義)〉의 “제삿날에 방에 들어가면 애연히 자리에 모습이 보이는 것이 반드시 있고, 주선(周旋)하며 문을 나가면 숙연히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반드시 있고, 문을 나가 들으면 개연히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반드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왕의 효는 눈에서 모습이 떠나지 않고, 귀에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마음에서 심지와 기욕이 잊히지 않는 것이다. 애모(愛慕)함이 극에 이르면 엄연히 존재하는 듯하고, 성각(誠慤)함이 극에 이르면 눈앞에 드러나서, 드러나고 존재하는 것이 마음에 잊히지 않는 법이니,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祭之日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 是故先王之孝也 色不忘乎目 聲不絶乎耳 心志嗜欲不忘乎心 致愛則存 致慤則著 著存不忘乎心矣 夫安得不敬乎〕”라는 말을 발췌하여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