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명수록(銘髓錄)은 당악문헌(棠岳文獻) 중에 실려있는 것으로 고산선조의 7代孫인 윤종민(尹鍾敏:1798~1878字蒲參,號:琴陽) 어른께서 편집한 것으로 추정된 바 명수록에 기록된 정조대왕과 고산선조의 후손들과의 대화 내용을 여러 종친들이 알았으면 해서 번역 배포함
1997. 5.
孤山13代孫 尹泳杓
명수록(銘髓錄)
주상-정종(正宗: 정조)-이 즉위한 이래로 영우원(永祐園;사도세자의 처음 묘소)을 옮겨 모시려는 뜻을 두었다.
기유년(정조 13, 1789) 6월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말하였다
“수원부(水原府) 호장(戶長)의 집 뒷산이 만고토록 혈식(血食: 제사 받는다는 뜻)할 자리입니다.”
이보다 앞서 경자년(정조 4, 1780) 봄에 주상이 전라감사(全羅監司) 서유린(徐有隣)에게 명하여 <고산집(孤山集)>-10질-을 인쇄하여 내각(內閣: 규장각의 별칭)에 들이게 하였다. 대개, 주상이 수원에 영우원(永祐園)을 옮겨 모시려는 의사를 둔 것은 이때부터 비롯 되었던 것이다. 주상이 묵묵히 10년 동안 계획하다가 결단이 이미 정해졌는데, 박명원의 소가 나왔던 것이다.
이때 정자(正字) 신(臣) <윤>지범(持範)-뒤에 규범(奎範)으로 고쳤다- 이 서울에 있었다. 주상이 명하여 본가(本家)의 문헌으로서 산릉의(山陵議) 이외에 고거(考據)할 만한 것을 찾아보게 하였다
<기유년(1789)> 10월에 수원으로 현륭원(顯隆園:사도세자의 묘소.영우원을 고친 이름)을 옮겨 모셨다
기유년(1789) 6월에 지범(持範)이 입당(入堂)한 뒤로 사용(司勇)의 직에 임명되지 못하여 관대(冠帶)를 착용하고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때 이문원(李文源)이 병조판서로 있었다. 주상이 이르기를
"병조판서는 어찌하여 윤지범에게 군직(軍職)을 부쳐주지 아니하는가. 그 할아버지의 별장(別章)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정축년(영조 33, 1757)의 방례(邦禮)는 그 아버지(이천보(李天輔)가 정해서 바친 것이다."
1) 그 할아버지의 별장(別章) : 이문원 (李文源)의 선조(先祖), 이단상(李端相)의 아버지 이명한(李明漢) 이 간신 (奸臣) 이이첨(李爾瞻)을 전송할 때에 지어준 시가 있었는데, 이 별장(別章)은 곧 이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때 해가 이미 저물었다. 병조판서가 대궐 아래에 달려가서 구전(口傳)으로 사용(司勇)의 직을 부쳐주었다. - 이단상(李端相)의 별장(別章)은 <고산집(孤山集) >의 국시소(國是疏)에 보인다. 정축방례 (丁丑邦禮)는 대개 기해방례 (己亥邦禮)를 조술(祖述)한 것으로 우리집 (윤씨) 예론(禮論)인데 이천보(李天輔)가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있을 때에 결정하여 시행했기 때문이다 -
경술년(정조 14, 1790) 3월 알성과(謁聖科)에 지눌(持訥) - 뒤에 규응(奎應)으로 고쳤다.ㅡ 이 병과(丙科) 3등에 급제하여 입시하였다. 주상이 물었다
"너의 현족(顯族)은 누구이냐."
지눌이 대답하였다.
"지범(持範)이 재종형(侢從兄) 입니다."
주상이 말하였다
"너도 고산(孤山)의 손자이냐."
지눌이 대답하였다
“고산의 6세손입니다."
주상은 기쁨이 천안(天顏;임금의 얼굴)에 넘치었고, 명하여 진퇴부(進退賦)를 짓게 하였다. 진퇴부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방에 팔달산 주인(八達山主人)-이운행(李運行)-을 얻고 이번 방에 윤고산(尹孤山)의 손자를 얻었으므로 기뻐서 기이한 뜻을 기록하게 된다. [前榜得八達山主人-李運行-今榜得尹孤山孫喜而得職奇異之意]
지눌이 부(賦)를 올렸는데 낙구(落句)에,
“어머니가 당(堂)에 계시니 감읍(感泣) 하고, 성상(聖上)의 수가 남산처럼 장구하기를 빈다.[母在堂而见立祝聖壽於南山] 라는 글귀가 있었다.
주상은 특별히 운다는 '읍(泣)' 자를 격(激)자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주상이 지눌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가 사람됨이 정명(精明)하니, 무슨 벼슬인들 하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 날로 명하여 가함(假啣;임시관직)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튿날 어사화(御賜花)를 꽂고 입당(入堂) 한 뒤에 인견(引見) 한 것이 여러번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세째 날에 주상이 춘당대(春塘臺) 장원봉(壯元峰)에 올라 승지를 시켜 신은(新恩:새로 급제한 사람)한 사람을 인도하여 알성(謁聖:성균관의 문묘(文廟)를 뵙게하는 것) 하였다. 그날 비천당(丕闡堂)에서 삼일제(三日製)"를 베풀고 이어서 신은(新恩)들에게 담장과 집을 돌게 함으로써 그들을 영화롭게 하였다
지눌이 알성(謁聖) 할 때에 혹 시기하는 사람이 가로 막음이 있을까 염려하여 승지에게 명하여 전도(前導)하게 하였다. 이미 알성(謁聖)하고 나서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 정동충(鄭東忠)-유풍주(兪豊柱)가 통문(通文)을 내고, 당시 대간(臺諫) 권유(權裕)가 소를 올려 무욕(誣辱)하자, 특명으로 삭과 (削科)하여 파면하고 온소(原疏)는 내려 보내지 않았다
4월에 주상이 의소묘(懿昭墓)3)에 거둥하였다. 이때 지승(持昇) - 뒤에 규한(奎漢)으로 고쳤다- 의 아들 악산(岳山)의 나이 13살이었는데, 길가 높은 곳에서 관광(觀光)하였다. 주상이 갑자기 그의 단정하고 주밀하여 사랑함직한 것을 바라보고 특별히 어뢰자(御牢子:궁궐 안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를 보내어 대가(大駕) 앞에 안아 올리게 하였다. 주상이 물었다
2) 삼일제(三日製) : 절일제(節日製)의 하나로 삼월초사흘 날에 보이는 과거
3) 의소묘 (懿昭墓) :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의소세손(懿昭世孫) 정(淀) 의 무덤
“네 성명은 무엇이냐."
악산이 대답하였다.
“윤악산입니다."
“네 아비는 누구이냐.”
“윤지승(尹持昇) 입니다.”
“너는 누구의 자손이냐.”
"윤고산(尹孤山)의 7세손입니다."
주상이 희롱삼아 말하기를,
“고산은 고을 이름이냐.”
하니, 윤악산이 대답하였다.
"전하께서 윤고산을 모르십니까.”
주상이 웃으며 기이하게 여기고 말하기를
"길에서 줄만한 물건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하고 군졸에게 명하여 안아서 서있던 곳에 도로 놓아두게 하였다
주상이 경연(經筵)에서 심환지(沈煥之)에게 일러 말하였다.
"윤지눌(尹持訥)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천운이다. 윤악산으로써 살펴보면 어찌기이하지 않는가."내가 어찌 일찍이 악산을 알았겠는가."
주상이 한번은 얼굴에 부스럼이 났었는데, 이해 여름에 더욱 심하였다 . 특별히 윤지범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묻기를
“너희 집에 문집(文集) 이외에 특별히 다른 문적(文籍)이 없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더러 있기는 하나, 특별히 고거(考據)할 만한 문자(文字)는 없습니다."
하였다. 주상이 물었다.
“네가 의도(醫道)를 아느냐."
윤지범이 대답하였다.
“본래 모릅니다."
주상이 물었다
"네가 생단목(生檀木)을 아느냐."
윤지범이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주상이 말하였다
생단목의 열매로 기름을 짜면 소용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창종(瘡腫: 부스럼)에서나 혹은 부인의 산병(產病)에 좋은 약인데 너는 어찌 듣지 못했느냐."
윤지범이 대답하였다
"신이 일체의 기예(技藝) 에는 서투르며, 이것 또한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주상이 웃으며 말하였다
"자기 조상의 일을 어찌 이처럼 모르느냐."
또 말하였다.
“이 나무는 해남(海南) 및 보길도(甫吉島)-고산이 일찍이 살던 섬이다-에 생산된다."
윤지범이 물러 나자, 승지 윤행임(尹行恁)이 나와서 수죄(數罪)하기를,
“주상께서 반드시 존가(尊家; 상대방의 집에 대한 존칭)의 장고(掌故; 고사)를 들으려 하셨는데, 대답하는 바가 어찌 그다지 소략하오.”
하므로, 윤지범이 대답하였다
“설사 명확하지 않게 듣고 본 바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님 앞에서 어찌 그 모르는 바를 억지로 대답할 수 있겠소."
하니, 윤행임이 감탄하였다
6월에 성상(聖上: 순조를 말함)이 탄생한 뒤에 지철(持哲)-뒤에 규철(奎哲)로 고쳤다.ㅡ. 지운(持運)이 수원(水原)에 집을 샀는데, 축실록안(築室錄案)에 들어갔다.
8월 초 10일에 본부(本府;수원)에서 과거를 베풀어 응제(應製:임금의 특명에 의해 치르는 과거)했는데 부(賦) 의 제목이 상황이 와서 놀다[上皇來遊] 였고, 표(表)의 제목은 한나라는 신풍(新豊)으로 수도를 옮김을 하례 한다. [漢賀移新豊]'였다.
이 과거에서 4인을 뽑아 원자탄강중광회시(元子誕降增廣會試)에 나아가게 했다.
지철(持哲)의 부권(賦券; 부(賦)를 지은 시험답안지)을 특별히 낙방(落榜)한 권축(卷軸; 두루말이 ) 속에서 뽑아 올려 초시(初試) 3등으로 합격시켜 급분(給分)하고, 시권(試券)을 좌상 채제공(蔡濟恭)에게 내어주어 채제공으로 하여금 지철을 불러 보고 그 시권을 친히 줌으로써 성상의 은혜로운 뜻을 선전하게 하였다
지눌(持訥)은 문과에 급제한 뒤 곧바로 한림(翰林: 예문관 검열 예文館檢閱) 의 병칭)의 천망(薦望)에 들었고, 4월에 해남(海南)의 고향으로 영소(榮掃;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에 임명되어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하였는데, 주상이 밀교(密教: 비밀 전교)를 내려 서울에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6월에 지눌이 서울로 돌아왔다. 7월에 실주서(實注書)의 천망(薦望)과 규장각(奎章閣), 초계 문신 (抄啓文臣)에 들어가고, 병조浜曺) : 공조(工曺)의 좌랑(佐郞): 성균관 전적(成均-典籍)을 거쳐 정언(正言), 지평(持平)에 이르렀는데, 하루에 벼슬자리를 다섯 번 옮겼다
9월에 또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패소(牌召; 왕명으로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더니, 특명으로 외직인 상원군수(祥原郡守)에 보임(補任)하였다.
사은(謝恩)하고 조정을 하직할 적에 은교(恩敎:임금의 말씀) 가 간절하였다.
4) 급분(給分):문과 초시(初試)에서 시험성적이 합격 점수에 미달하였으나 성적이 비교적 양호한 자에 대하여 적당한 점수를 주었다가 다음 시험의 성적과 합산하여 합격 점수에 달하면 초시합격자와 같은 자격으로 복시(覆試)에 응하게 하는것
12월 초 7일. 제술시(製述試)의 칠언고시(七言古詩)에 응시하였는데, 제목은 부상대견가(扶桑大繭歌)였다. 지철(持哲)이 삼하(三下)로 입격하니, 어필(御筆)로 시권(試券)의 배면(背面)에 공중의사(公中之私)'라고 큼직하게 썼다.
초 8일에 장용내영(壯勇内營)으로부터 수원부도호(水原府都護) 조심태(趙心泰)에게 영을 전하였는데, 아래와 같다
"경이 본부(本府)의 신치(新治)에 제치(制置)한 공이 있어 경의 집안 사람으로 수원으로 이접(移接) 하였거나 서울에 거주하였거나를 막론하고 이미 허통(許通) 하였고, 또한 본부의 과시(科試)에 같이 응시하게 하였으니, 하물며 윤씨(尹氏) 임에다 또 더구나 해남(海南)은 수원[隋城]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음에랴. 근일 시권(試券)에 녹명(錄名)한 사람을 살펴보면, 윤지홍(尹持弘)-윤지철(尹持哲) . 윤지운(尹持運) . 윤지섬(尹持暹) . 윤지상(尹持常) 윤지익(尹持翼), 윤지민(尹持敏) . 윤지식(尹持軾) 8인의 성명이 있고, 이밖에 권솔(眷率: 식구)이 녹명(錄名)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리길에서 운반하느라 아직까지 정거(定居)하지 못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식목조(植木條)의 별록전(別錄錢) 1천 냥을 특별히 획급(劃給; 지정해 줌)하되 경이 친히 감독과 시찰을 집행하여, 혹 집을 사서 주기도 하고 혹은 물력(物力)을 사서 주기도 하여 곧 가옥이 즐비하여 마을이 이루어지도록 하라. 순제(旬題: 열흘마다 보이는 시험)와 앞으로의 과시(科試)에 비록 식구를 거느리고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그 할아버지(윤고산을 지칭)의 직손(直孫)이면 모두 과시에 응시하도록 할 일로 자세히 알라. 이 전지(傳旨) 1통을 본가에 베껴서 주는 것이 마땅한 일."
5)삼하(三) : 시문(試文)을 꼲는 12등급 중의 아홉째급
6)허동(許通) : 벼슬길을 열어줌
-윤지상(尹持常)은 뒤에 규상(奎常)으로, 지섬(持暹)은 규동(奎東)으로 고쳤다.ㅡ
좌상 채제공이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지(傳旨) 1통이 하늘(입금)로부터 떨어졌으니, 생각컨데 일문(一門)이 모여 읽고 감격의 눈물이 무궁(無窮)하여 청동(靑銅 : 동전)의 한닢, 한닢이 모두 성은(聖恩) 이 배어 있을 듯 합니다. 그 규모는 비록 집을 연대어 짓고 담이 잇달게 하기는 어려우나 요컨대, 빙 둘러 모여서 저대로 윤씨 일촌(一村)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상의 뜻이 이와 같으심을 들었으므로 이에 글을 써서 알립니다."
신해년(정조 15, 1791) 정월에 주상이 현륭원(顯隆園;사도세자의 묘소)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본부에 머물렀다. 밤에 공신루(拱宸樓)에 임어 하여 윤굉(尹굉)-윤굉은 지홍(持弘)·지철(持哲의 아버지이다.ㅡ 등 20인-이 때 소명(召命)이 있어 일제히 나아갔다-을 인견(引見) 하였다. 윤굉(尹굉)이 어전에서 성명을 대답하니 , 주상은 앞에 나아오게 하여 얼굴을 들게 하고는 이르기를,
“네 상이 좋다. 이처럼 좋은 상으로 어찌 과거를 보지 않았느냐."
하였다. 진사(進士) 서(惰)가 다음으로 성명을 대답하니 주상은
“익히는 학업이 무엇이며 과거 응시의 회수는 얼마냐"
라고 물었다. 지승(持昇)이 다음으로 대답하니, 주상은 얼굴을들게 하고 사뭇 칭찬하고, 과업(科業)에 대해서는 위의 서(서)에게 물은 바와 같았다. 또,
“네가 바로 지난번 윤악산(尹岳山)-악산의 관명(冠名)은 종렴 - 의 아비냐"
하므로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하나하나 위와 같이 인견(引見) 하고 물었다 지철에게 이르러 또 얼굴을 들게 하고 칭찬하며 말하기를,
"네 문장이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모름지지 힘쓸지어다".
하고, 다음에,
“윤굉은 앞에 나아오라."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많이 올라왔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하므로 윤굉이 대답하기를
“성은(聖恩)이 망극하여 온 가문이 감축(感祝) 하옵니다. 천안(天顔)을 한번 뵙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또 종경(鍾慶: 윤고산 7대종손)-윤지상(尹持常)의 아들-에게 명하기를,
“내가 물품을 주겠다. 네 집에서 재주와 학업 및 재력(財力)이 감당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이곳에 정거(定居) 하게 하였으나, 네 종손에 이르러서는 누대(累代)의 안정된 땅을 가벼이 떠나지 말라"
하였다. 주상이 다시 정승 채제공과 화성(華城)에 관한 일을 말하다가, 윤씨가문(尹氏家門)을 가리켜 '화성주인(華城主人)'이라 하였다
이튿날 장남헌(壯南軒) 뜰에서 도과(道科)를 베풀었는데, 부(賦)의 제목은, "문왕(文王)의 손자 본손 . 지손(支孫) 이 백세(百世)토록 전한다[文王孫子本支百世) 하였다. 지승(持昇), 지홍(持弘)이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곧바로 회시(會試)에 나아갔다. 이날밤에 채상(蔡相)의 사제俬第)-채로헌(采露軒)-에서 음악을 하사하고 여러 윤씨들과 같이 즐겼다.
3월에 토목공사의 일을 처음 시작하였다. 지승(持昇)이 감독하여 4구역의 집을 지었는데, 합하여 42간이다. 9월에 와서 공사를 마쳤다-그뒤 갑인년(정조 18, 1794 ) 여름에 지운(持運), 지회(持誨). 지옥(持郁)·지철(持哲)이 각각 재물을 내어 각각의 집을 중수(重修)하였다-
6월 18일 성철웅제시(聖節應製試)에 서(偦) 및 지양(持讓), 지철(持哲)이 입격하였는데, 모두 급분(給分)하여회시(會試)에 나아가게 하였다.
8월 진산(珍山)의 변괴사건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 상내지 않은 일)이 일어나서-천주학(天主學)을 말함-공주의 유통(儒通: 유생끼리 통지하는 글)이 성균관(成均館)에 당도하였다
대개, 진산(珍山)은 외진 골짜기에 있어서 해남·수원과는 성기(聲氣)가 끊어져서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주의 유통(儒通)이 나온 뒤에 그 곡절을 비로소 자세히 알고 슬퍼하고 분개하여 여러 지친(至親) 들이 연명(聯名)으로 글을 보내어 절의(絕義)하기를 고하고 혹시라도 느껴 깨치기를 바랐다. 도신(道臣) 정민시(鄭民始)가 추국(推鞫) 하기를 계문(啓聞) 하게 되어서는, 주상이 좌상 채제공에게 적용해야 할 율전(律典)을 문의하니 , 채제공이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11월에 죄인(윤지충)이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졌다. 주상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 손으로 윤고산(尹孤山)의 손자를 죽인단 말인가"
-율전(律典)이 이미 내려지자, 주상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형벌을 완화하여 반드시 그 사람을 감화시키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여러 지친(至親) 이 채정승에게 글을 올려, 주상에게 여쭈어서 보씨(輔氏)처럼 씨(氏)를 구별하기를 청하니 ,
좌상이 성상에 "여러 윤씨가 ‘지(持)' 자를 고쳐 이름을 짓겠다"는 뜻으로 여쭈니, 주상이 말하였다
“이는 본디 청족(淸族)으로 간사하고 더러운 물건이 불행하게 요즘 나왔다. 이른바 일족을 구별한다는 것은 진실로 그만 둘 수 없거니와 이름을 고침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역적과는 다름이 있으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임자년(정조 16, 1792) 3월에 굉(굉) 이 늙고 병든 것을 이유로 해남으로 돌아갔다.
주상이 말을 듣고 근신 (近臣)에게 일러 말하였다.
"윤굉이 어찌하여 조금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돌아갔느냐.”
5월 영남 만인소(萬人疏)가 나왔다.
부사(府使) 조심태(趙心泰)가 경연(經筵)에 올라가니, 주상이 말하였다.
"윤지철의 형제가 향중(鄕中) 생활을 잘하고, 독서와 조행이 맑고 아담하며 간약하고 조용하여 지극히 사랑스럽다.”
-이때 유생(儒生)의 폐단이 있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계축년(정조 17, 1793) 정월 12일에 주상이 원소(園所:사도세자의 묘소)에 참배하고 도과(道科)를 베풀었다. 부(賦)의 제목은 '인정은 성왕(聖王) 의 전지이다. [人情聖主之田]'라고 하였다. 지승(持昇)이 장원을 차지하니, 급제를 내리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네 과문(科文)이 좋았다"
하고, 이어서 음악을 하사하였다.
2월에 지철 . 지익(持翼)이 아버지 상을 당하여 해남(海南)으로 분꼭(奔哭)하였다.
주상이 그 말을 듣고,
"아! 안타깝고! 안타깝다.”
하였다.
갑인년 (정조 18, 1794) 겨울철[冬等] 응제시(應製試)에 서(서)가 우등으로 교예(較藝; 기에 비교)에 들어가니, 주상이 각신(閣臣) 이병모(李秉模) ·채제공 등에게 명하여 시권(試券) 배면(背面에 비평을 쓰게 하였다
병진년,(정조 20, 1796) 정월 25일, 주상이 원침(園寢;사도세 자의 묘소)을 참배하고 행궁(行宮)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그날밤에 지운(持運) . 지철(持哲)을 유여댁(維與宅)에서 특별히 불렀다. 주상이 앞에 나아오게 하여 얼굴을 들도록 하였다. 지범이 잇달아 들어가니, 주상이 손을 창문에 짚고 있다가 지범이 종종걸음으로 나아오는 것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저 손[客]이 요즘은 전보다 사뭇 낫다"
하고 얼굴을 들게 하고 분부하기를
"이 사람은 문학(文學)과 행덕(行德)이 있는데도 오늘날까지 헛되이 늙었으니 세로(世路)가 한탄할 만하다.”
하였다. 승지 채홍원(蔡弘遠)이 아뢰기를,
“윤지범이 요즘 낙남헌송(洛南軒頌)을 지었는데, 문장이 매우 기이 하였습니다.”
하니, 주상이 좌상 채제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경도 그 글을 보았는가.”
하매, 채제공이 대답하기를,
"일전에 신에게 고람(考覽)을 받았는데, 문장 기운이 웅장하고 미려하여 참으로 걸작이었습니다."
하였다. 인견을 마치고 물러나자, 주상이 조용히 좌상에게 말하기를
“윤지범은 용모가 청수(淸秀)하다. 듣건대, 그는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다 하니 고을의 수령이 그에게는 명환(名宦)보다 급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윤지철(尹持哲)에게 음사(蔭仕)를 임명하고자 한다."
하니 좌상이 대답하기를,
“지철은 크게 현달(顯達) 할 재목입니다. 그들 가문의 후진 중에 걸출합니다. 나이 아직 젊은데, 음직(蔭職)으로진출하는 것은 매우 애석함직 합니다. 반드시 과거로 출신(出身)하여 쓰게 될 것입니다."
주상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이튿날 전교(傳敎) 하기를
"전 정랑 윤지범은 인품이 본디 정상(精詳)하니 시종(侍從)의 직에 두어야 합당한데, 과거에 오른 지 수십 년 동안에 이처럼 침체하였다. 지평(持平)에 궐원(闕員)이 있거든 대신 제수하여 패초(牌招 : 패로 부름)하여 어가(御駕)를 수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가. 지범이 관대(冠带)와 의복을 갖추지 못한 것을 넌즈시 여쭈우니, 특명으로 갓과 도포차림으로 어가를 따르게 하였다. 지지대(遲遲臺에 이르러 주상이 어가(御駕)를 멈추고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읊었다. 그리고 시신(侍臣)에게 명하여 갱진(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지어 올림)하게 하고, 승지를 시켜 지범(持範)도 갱진(갱진)하게 하였다.
시흥(始興)의 행궁(行宮)에 이르러 분부하였다.
"윤지범의 지평(持平) 임명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고 정언(正言)으로 고쳐 부표(付標; 문서 가운데 특별히 유념해야 할 사항에 표지를 붙임)하고 이어서 전대로 어가를 수행하도록 하라."
3월 전라감사 서정수(徐鼎修)에게 명하여 <고산집(孤山集)>을 인쇄하여 올리게 하였다. 주상이 간본(刊本)의 잘못되고 빠진 곳을 보고 판본을 고치도록 명하였다.
서정수가 가까운 막비(幕裨)를 해남현으로 보내어, 백련동(白蓮洞)의 장판(藏板)을 현아(縣衙)로 운반해 가서 수십 판(板)을 대략 고쳐 개간(改刊)하여 신인(新印)한 것으로 아뢰었는데, 인출(印出)한 것은 모두 15질이었다. 주상이 명하여, 내각(內閣)에 장치(藏置)하게 하고 또, 유여댁서루(維與宅書樓)에 1건을 나누어 간직하게하고, 좌상 채제공에게 1건을 하사하게 하였다. 본손가에 하사한 제1권의 권수(卷首)에 다음과 같이 썼다.
“화성에 사는 윤고산 후손집에 <고산집>", 신간 6책을 내사한다. [內賜華城居尹孤山後孫家孤山集新刊六册]”
-정조가 친필로 썼다. -
주상이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말이 고산(孤山)에 이르자, 매우 자세하고 간절하였다.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이 사람(윤고산)은 선정(先正; 송시열을 지칭한 둣)에게 죄를 얻었습니다."
하니, 주상이 말하였다
“선정(先正)은 오늘날의 선정이지, 어찌 당시의 선정이겠는가 다만, 같은 조정의 사람으로 의리가 각각 스스로 같지 않았을뿐이다."
주상이 일찍이 조용히 좌상 채제공에게 말하기를.
“고산이 국가를 위하여 산릉(山陵)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의논하여 후인으로 하여 환희 알기 쉽게 하였으니 어찌 감사함이 많지 않겠는가”
하고 또 말하였다
“내 의견으로는, 현륭원(顯隆園)의 유궁(幽宮:무덤)이 편안하신 듯하니, 마음에 매우 위안된다. 지난밤 꿈에 현륭원을 모시고 평일처럼 기쁘게 지냈는데, 나에게 분부하시기를, 네가 해남 윤씨에게 어찌 저처럼 버려두느냐,「이상하고 이상하다」라고 하셨다
내가 이 때문에 유궁(幽宮)이 편안하신 줄 알았다."
지범(持範) 의 고조(高祖) 묘소가 과천(果川) 신원(新院)에 있었는데, 액정서(掖庭署)의 소속관리인 김성(金姓) 가진 자가 청룡(산의 왼쪽) 근처에 투장(남의 묘소에 몰래 장사지냄)하였으니 정사년(정조 21, 1797) 2월 이었다. 과천현감은 세혐(世嫌:대대로 서로 혐의가 있는 것)이 있다 하여 시흥(始興)-안산侒山) 등의 고을에 옮겨 소송하였는데, 송관(訟官)이 손을 쓰기 어려워서 전혀 시일만 오래 끌기를 힘쓸 뿐이므로 이에 도신(道臣) 이면응(李冕膺)에게 소장(訴狀)을 올렸다.
주상이 그 말을 듣고 정약용(丁若鏞) -외손이기 때문이다.ㅡ 에게 명하여 곡절을 자세히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주상이 말하기를
"네가 이 집 선대의 일에 더우기 어찌 범연(泛然)히 해서야 되겠느냐"
하고 이에 액정서의 소속관리를 엄히 꾸짖고 곧 파내어 가게 하였다.
지눌이 이때 공동(公洞)의 자택에 살고 있었는데, 늙은 중인(中人)한 사람이 금권비대(金圈緋带: 금으로 된 머리테, 비단 띠)의 차림으로 스스로 '액정서 소속 관리의 애비'라 말하고, 섬돌 아래에 서서 말마다 사죄하고 애걸하기를, 2월에 무덤을 팔 수 없으니 4월이 되면 곧 파내어 가겠습니다. 하였다. 4월이 되기 전에 파내 간 것은 그 사이에 또다시 파내 가기를 재촉하는 성상의 엄한 분부가 계셨기 때문이다. 김(金)가의 3부자가 모두 액정서의 소속이라 한다
2월에 지범을 특별히 사간원 정언으로 제수하였는데 , 패초(牌招)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튿날 패초(牌招)에도 나아가지 않고 또 다시 패초하여도 나아가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당하관(堂下官) 이 하루 두번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은 기율(紀律)에 관계 됨이 있다. 정언 윤지범을 임천군수(林川郡守)로 보외(輔外) 하라.”
하였다. 지범이 이튿날 사은(謝恩) 하니, 주상이 인견(引見)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대신(臺臣)을 외직에 보임(補任) 하는 것은 기율 때문만은 아니라, 한편으로는 네가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은 사정을 참작한 것 이다. 임천(林川)이 비록20면(面)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실은 작은 고을로서 다스리기가 쉽다. 부임하여 잘 다스리어 내 귀에 치적이 들림이 있도록 하라."
하고 또 분부하기를,
“대신(臺臣)이 살고 있는 집이 기와집이냐, 초가집이냐"
하므로 , 대답하기를 .
“기와집입니다."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집이 어떠하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헐고 누추합니다."
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장차 개조(改造) 하려 합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지금 곧 성실하게 수리하여 아들을 기르고 손자를 키우는 터로 삼으라"
하고 , 다시 유시(諭示)하였다
"가서 잘 다스리라."
3월. 관부사(判府事) 채제공이 윤지범 의 임소(任所)에 편지를 보내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체로 선비가 밝은 때를 만나 사판(仕版) 에 이름이 올려 벼슬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나 국은이 미친 바가 아님이 없지만, 존가(尊家)와 같이 당인(黨人)이 눈을 부릅뜨고 시기하는 속에서 뽑아 올려 청운(靑雲) 의 평탄한 위에 올려놓은 예는 있지 않으니, 이는 특이한 은혜, 융숭한 총애가 보통보다 아주 뛰어난 것입니다 비록 내가 다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존좌(尊座)가 어찌 마음에 새기지 않겠습니까
전일 경연(經筵)에 올라갔을 때에 성상께서 분부하시기를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부임한 뒤로 윤성(尹姓)으로서 화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수삼 집이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성상이 또 분부하기를, "내가 윤성(尹姓) 가진 자에게 어찌 혹시라도 잊겠는가.
그러나, 한둘 급제한 사람이 모두 낭패하여 떨치지 못하고 오직 윤지범이 청수(淸秀)한 기운이 있는 듯 하므로, 백리(百里)의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에 임명한 것이니 만일 능히 잘 다스리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시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윤씨집 근일의 일은 마치 강엄(江淹) 이전에 있는 것과 같으니, 한부 (恨賦)" 속에 거두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성상께서 덮어주고 아껴주는것은 거의 속담에 이른바,「불면 날아갈까, 잡으면 터질까 염려된다는 격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잘 대양(對揚) 하지 못하고 스스로 불운을 초래하니 만일 한스러움을 논한다면 무엇이 이보다 지나겠습니까? 지범은 성은을 저버리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윤씨의 집에 어찌 이와 같이 하고 그만두어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날로 계산하면 부족하고 해[歲]로 계산하면 남음이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실처럼 이어지는 간절한 성상의 말씀을 비록 편지 속에 다 쓸 수 없으나 대략 이와 같습니다. 존좌(尊座)가 이에 대해 더욱 감격 하여 눈물을 홀리며 일반분(-半分)이라도 은혜를 갚을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12월, 임천군수 지범이 응지소(應旨疏)를 올렸는데 모두 7조였다.
주상은 가납(嘉納) 하고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는데, 비답이 무릇 수백 마디 말이 었 다. 채정승이 보내온 편지는 다음과 같다.
“성상의 하교에 그가 언제 소장(疏章)을 익혔기에 곧 이와 같이 잘 짓는가. 어찌 기특하지 않으랴. 이러한 문장으로 무엇을 한들 불가하겠는가. ? 하물며 진술한 바는 모두 이치가 있음에라, 하였습니다."
문장에뛰어 이전에 한부 (恨賦) : 강엄(江淹) 은 남조(南朝) 양()나라 사람. 문장에 뛰어났다. 한부(恨賦)를 지었다.
경신년(정조 24, 1800) 3월에 춘당대(春塘臺)에서 인일제(人日製)를 추설 (追設) 하였는데 , 제목은, ‘호경 (鎬京)의 벽옹(벽雍)에서 <강학(講學)하고 예를 행하니, 서쪽이며 동쪽이며 남쪽이며 북쪽이며 모두 복종한다. [鎬京벽雍自 西自東自南自北)"라고 하였다
지수(持秀)는 초시(初試) 를 치르고 세자책봉정시(世子册封正試)외 회시(會試)에 곧바로 나아가고, 지철이 입격(入格) 하였다. 입격한 유생(儒生) 을 편전(便殿)에 입시(入侍) 하게 하였다.
지수가 어전에 나아가 성명을 아뢰니, 주상이 묻기를
“현재 어느 지방에 사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해남에 살고 있습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회시(會試)에 힘을 다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지철(持哲)이 어전에 나아가 성명을 대답하니, 주상이 말하였다
“네가 어디에 갔다가 이제까지 과거를 보지 않았느냐."
-지철이 이때 나이 이미 32세였다.ㅡ
지철이 이보다 앞서 응제시(應製試)의 초시(初試)에 합격 하여 병진별시회시(丙辰別試會試: 정조 20, 1796)의 응시를 허락받아 이미 내각(內閣)의 소첩(小帖) 을 받았으나, 백형(伯兄;지홍)의 상을 당하여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때 와서 다시 소첩을 받아 정시회시(庭試會試)에 응시하였다. 예조(禮曹)가 이것을 초기(草記: 간단한 요지만 적어 아뢰는 것)하니,
주상이 말하였다
"윤지철의 일은 내가 알고 있다.”
-왕이 고사(考査) 한 초시(初試)에 소시 첩(小試帖) 이 있으므로 제술(製述)을 할때에 진시(陳試)를 정소(呈訴)하지 않았던 것인데 예조에서 문적(文籍)이 없다 하여 초기(草記)가 있게 되었다 내각(內閣)의 방안책(榜眼册)에 홀로 성명을 효주(爻周)하지 않았다-
인일제(人日製) : 인일(人日)인 정월 초7일에 가절(佳節)이라고 하여 보는 과거, 성균관 유생(儒生) 이 주대상임.
주상이 일찍이 근신 (近臣)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만일 윤지 범 이 전라도백이 되게 하면 참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이 된다."
주상이 여러 차례 내영(內營)의 관리를 보내어 해남 문소동(聞의 형태를 그려서 올리게 하였는데 - 고산의 묘소이다-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일찍이 근시(近侍)에게 물었다
"해남 문소동의 묘석(墓石)의 누른이끼[黃苔]가 요즘은 어떠한가."·
-전해오는 말에 “묘석(墓石)에 누른이끼가 나오면 자손이 반드시 과환(科宦:과거 급제와 벼슬)과 특이한 일이 있다."한다. 이 말이 어떻게 하여 궐내에 흘러들어 갔는지 모르겠다-.
주상이 말하였다
“윤고산은-시호(諡號)와 호가 저대로 있는데, 사람들이 반드시 그 이름(윤선도)을 바로 부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심한 자는 그 성을 버리고 이름만을 부르기까지 하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랴. 내가 이 사람(윤고산)에게 감사함이 깊다. 일상으로 말할 적에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고산으로 부르며, 고산으로 특별히 부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윤고산(尹孤山)' 세 글자로 부르니 그 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후일 국가에 큰 경사가 있으면 고산의 자손이 어찌 국가와 더불어 그 경복(慶福)을 같이 하지 않겠느냐"
-이 한 단락은 <홍재 집(弘齋集)>, <일득록(日得錄)>과, <직제학채록(直提學蔡錄: 채홍원(蔡弘遠)의 기록인 듯함) >등에 나온다-
경신년(정조 24, 1800) 2월에 주상이 현륭원(顯隆園)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어보련(御步輦: 임금의 수레)이 청룡(靑龍) 건너편에 올라 나무를 베어내어 비석을 세우고 표지(標識) 하였다.
6월에 주상이 승하하자, 8월에 표지한 지점에 건릉(健陵:정조의 능)의 터로 잡고 초 2일에 능역倣域)을 팠다. 원상(院相) 심환지(沈煥之)가 빈청(賓廳)에 앉아 <고산집(孤山集)>을 열람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 잡은 땅은 건너편이 아니다.”
하니 윤행임이 말하기를,
"내가 행행(幸行; 임금의 행차)을 따라다닌 지 여러 해였다. 산의 순행(巡行)을 모시고 다닐 적마다 선왕께서 이미 표정(標定)한 곳이 있었는데, 제공(諸公)들이 어찌 건너편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하였다. 심환지가 고산의 성명을 바로 부르자, 윤행임(尹行恁)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정조) 께서 일찍이 성명을 바로 부르지 않고 매양 고산(孤山)이라 부른 것은 이미 익히 들었습니 다. 지금 선왕이 승하 하신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대감이 이 자리에 앉아 이일을 하면서 고산의 이름을 바로 부르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니, 환지 가 멋쩍어하며 얼굴이 벌겋게 변하여 사과하였다
“입에 나오는 대로 경솔하게 망발하였습니다."
신유년(순조 1, 1801) 도당록 (都堂錄) 때에 주문(主文:대제학)인 윤행임(尹行恁) 이 윤지 범 을 관록(館錄)에 넣는 의론을 힘껏 주장하자 어떤 사람이 저지하기를,
“윤모(尹某; 윤선도를 지칭)의 손자를 어찌 관록(館録)에 넣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윤행임이 정색을 하며 꾸짖기를,
“공들은 선조(先朝)의 신하가 아니냐?
이것은 내 의사가 아니라, 곧 선조(先朝)의 유의(遺意)이다. 우리들이 선조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야 마땅한데, 선조의 능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공들이 갑자기 선조의 일을 잊어버리고, 고산의 이름을 바로 부르기를 마치 당인(黨人)의 방자한 버릇과 같이한단 말인가."
하니,그 사람이 말문이 막혀 이에 말하기를,
“윤지범이 바야흐로 복을 입고 있다."
하므로 윤행임이 말하기를
“상록(喪錄)은 홀로 할 수 없는 것인가.
하였다. 그 사람이 심환지에게 고하니, 환지가 극력 저지하여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