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유고(恭齋遺稿)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緒, 1668-1715)의 시문집이다. 그는 어초은공漁樵隱公 윤효정의 7대손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의 증손이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외증조이다. 장남인 낙서駱西 윤덕희(尹徳熙1685-1766)와 손자인 청고靑皐 윤용(1708-1740)도 화업畫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가 되었다. 그는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 현재玄齋 심사정(1707-1769)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공재는 1668년 5월 20일 해남 연동蓮洞에서 지암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윤선도의 종손 윤이석(尹爾錫1626-1694)에게 입양되었다. 윤이석이 후사가 없자 조부 윤선도는 공재의 형제들이 태어날 때마다 점을 쳤는데 그 중 공재가 가장 길하여 종손으로 삼기로 하였다 한다
그는 25세(숙종18)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 당시는 서인西人이 득세得勢하고 있어 남인南人인 해남 윤씨에게는 뜻을 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직의 뜻을 버리고 친구들과 학문에 열중하며 다양한 식견을 넓혔다
공재는 같은 처지의 남인 집안의 자제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정재定齋 심득경(沈得經(1673-1710). 섬계剡溪 이잠(李潛, 1660~1706). 옥동玉洞 이서(李淑1662-1723),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등과 절친했는데, 그의 학문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후기 실학을 대성했던 성호 집안과 공재 집안과의 교우이다. 이는 후기 실학의 대표적 학자 이익이나 정약용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공재유고」에는 서문과 발문이 없고. 시 97편 153수와 운문韻文2편을 실은 41쪽 해서체楷書體의 미간행 필사본이다. 시에는 시경체詩經體4언 시가 6수, 초사체楚辭體가 1수, 5언 고시가 1수, 7언 고시가 1수 5언절구가 48수, 5언 율시가 15수, 7언 절구가 47수, 7언 율시가 31수, 7언 장률長律이 3수 있다
그런데 그의 시문집으로는 현재 두 가지가 녹우당에 전한다. 하나는 필사본 문집 r기졸記拙 1책이고, 다른 하나는 필사본 문집 r공재유고. 1책이다. 시문집인 두 책의 내용이 상당 부분 겹치지만, 현재까지 두 종류의 작품집이 남아있는 셈이다 r기졸은 공재 자신의 필사본 문집으로 여겨 진다. 땅악문헌」권16에 실린 윤덕희가 쓴 공대공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공재가 남긴 유고가 두 권이 있었는데, 서울과 해남으로 이사다니다가 그중 한권이 유실되었으니 애통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남은 한 권이 현재 전하고 있는 기졸로 보인다. 그 한 책밖에 남지 않은「기졸에서 한시를 먼저 정리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공재유고」이다. 이 책은 공재의 장남 낙서 윤덕희가 공재의 글인「기졸에서 시 위주로 발췌하여 편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문집을 간행하기 위한 정리본으로 생각되지만, 이도 한시만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완전한 것은 아니다. 한시만을 정리하여 공재유고」라는 이름을 붙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산문 편을 추가하여「공재유고를 완성하고자 하였을 것인데 미완성인 채로 남겨지고 말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