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 안휘준安輝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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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학교 및 학위 :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특별논문 |
| 년도 : |
공재恭齋윤두서尹斗緒(1668-1715)의 회화,
어떻게 볼 것인가
안휘준安輝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I. 머리말
조선왕조시대의 회화시분 통틀어 공재恭齋윤두서尹斗緒(1668-1715)만큼 독특한 역사적 인물은 다시없을 것이다. 그는 한 시대를 마무리 짓고 다른 한 시대를 여는데 기여한 유일하고 대표적인 전환기적轉換期的 문인 출신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광주박물관이 대규모의 종합적인 전시회를 열고 그의 생애, 학문, 시와 서화, 후대에 미친 영향 등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조망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여간 의미가 크지 않다. 이는 기왕에 발표된 업적들과 더불어 큰 참고가 될 것이다.
한 인물을 제대로 조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평면적인 나열식 검토보다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져 놓고 대비시켜 살펴보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윤두서보다 불과 8년 연하인 겸재謙齋정선 鄭胍1676-1759)에 대하여「겸재 정선과 그의 진경 산수화,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졸문을 발표한 바 있다? 같은 성격의 질문을 윤두서에게 던져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뒤에 살펴보듯이 윤두서와 정선은 불과 8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화풍은 판이하게 다르고 따라서 시대를 가름하는데 많은 참고와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윤두서의 가계와 생애, 성리학·천문·지리·수학·의학·병법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세계, 시와 회화·서예·시·음악 등 예술, 후손들과 후대의 화가들에게 미친 구체적인 영향등에 관하여는 다른 여러 학자들이 전문적인 고찰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 필자는 그의 회화사적 위상과 화풍상의 특징 등에 관해서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총괄적으로 조망하고 그 의의를 찾아보는 일에 치중하고자 한다
Ⅱ. 윤두서는 한국회화사상 어느 시대의 화가인가
윤두서는 생년(1668)과 몰년(1715)이 모두 분명하게 밝혀져 있으므로 그가 어느 시대의 사람인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조선시대의 회화사에서 초기(152-약 1550)를 이은 중기 약 1550-91700의 후반에 태어나 후기(약 17000-약 1850)의 초엽까지 생존하였던 인물로서 중기와후기, 양시대에 걸쳐서 활약하였던 전환기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故이동주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그런 의미에서 윤공재가 중기의 꼬리 격이라고 한다면 정겸재는 후기의 앞장 격이라고 함직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어서 주목된다.4 즉 그는 윤두서를 조선 중기의 인물로, 정선을 후기의 인물로 분류하여 본 것이다. 과연 윤두서를 중기의 화가로 보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필자가 윤두서를 후기의 화가로 보고 있는 견해와도 상치되어 더욱 논의의 여지가 크다 즉 윤두서를 조선 중기의 화가로 볼 것인지, 혹은 후기의 화가로 볼 것인지가 쟁점인 것이다. 이 쟁점을 풀거나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윤두서의 회화, 곧 화풍을 살펴보는 것이 관건이라 하겠다
윤두서는 산수화, 초상화 도석인물화, 풍속인물화, 말 그림을 비롯한 동물화, 화조화·정물화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크게 보면 다음 장에서 살펴보듯이 조선 중기의 화풍을 계승하여 그린 보수적이고 전통적 인 것들과 새로운 경향을 추구한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것들로 구분된다. 전자의 경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중기의 절파계浙派系화풍과 묵법墨法을 구사하여 그린 산수화들과 도석 인물화道釋人物畵들이고, 후자에 해당되는 작품들은 남종화풍을 수용한 산수화 및 서양적 음영법陰影法을 소극적으로나마 보여주는 정물화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는 전에 없이 처음으로 그리기 시작한 본격 적인 자화상 및 풍속화들이다.
이처럼 두 가지 상반되는 경향이 함께 나타날 경우 회화사나 미술사에서 편년을 할 때에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경향이다. 대개의 경우 앞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될 회화나 미술계의 동향은 새로이 배태되고 출현하는새로운 경향에 좌우되고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윤두서의 작품들에서 처음으로 간취되는 남종화풍과 풍속화가 그 이후,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풍미하게 되었던 것은 그 분명한 증거이다. 바꾸어 말하면 윤두서는 새로운 화풍들이 풍미하게 되는 조선 후기 회화의 단초端初를 연 첫 번째 대표적인 화가라 하겠다. 그러므로 윤두서는 조선 중기의 화가로 보기보다는 후기의 화가로 보고 분류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고 하겠다
사실 정선 1676-1759)이 종래의 실경산수화 전통을 바탕으로 남종화법을 적극적으로 융합하고 활용하여 파격 적인 자신의 독자적 진경산수화풍을 창출할 수 있었던 근저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남종화풍 의 수용과 실학적 경향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실마리를 다소나마 윤두서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윤두서가 보여주는 새로운 경향은 정선의 경우처럼 완연하고 드라마틱하지 않을 뿐이다. 앞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해볼 필요가 있는 과제라 하겠다
Ⅲ. 윤두서의 화풍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윤두서의 회화를 총체적으로 보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듯한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즉 대부분의 산수화와 도석인물화 釋人物흩에서 볼 수 있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측면과 일부 남종화적 성향의 산수화, 파격 적인 자화상 새로운 풍속인물화들에서 간취되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경향이 대조를 보여 준다. 이러한 상반되는 경향은 새로운 시대를 연 대표적인 화가나 작가들에서는 다소간을 막론하고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윤두서의 경우처럼 그렇게 두드러지고 완연한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윤두서를 한국회화사에서 각별한 존재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경향들 중에서 전자의 경우는 보편성이 강하고 널리 알려져 있으 므로 되도록 간결하게 언급하고 비교적 충분히 규명되지 못한 후자의 경우를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I. 보수적 전통주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경향의 화풍은 윤두서의 많은 작품들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므로 굳이 상론을 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윤두서의 보수적 산수화풍과 인물화풍을 아울러 엿보는데 참고가 되는 작품 한 점만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윤두서의 <무송관수도撫松勛圖)가 그것이다, 이 산수인물화에는 근경에 비스듬한 도현倒懸의 언덕과 산들이 흑백의 대조가 강한 묵법으로 그려져 있고 다소 과장된 형태의 구부러진 큰 소나무가 한 바위산의 옆구리에서 배태되듯이 위태롭게 솟아 있다 어떻게 그렇게 크고 무거운 소나무가 그처럼 연약한 뿌리로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기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말그림 등에서 추구했던 윤두서의 사실주의적 경향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의 사실주의는 산수화보다는 말 그림과 초상화 등 인물화의 몫이었다고 믿어진다 어쨌든 이 산과 소나무의 뒤에는 각각 한 명씩의 동자와 고사가 숨듯이 반신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들의 모습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절파계浙派系문인화가였던 이경윤 李慶胤(1545-1646)의 전칭傳稱작품인 〈시주도詩酒圖)도2에 보이는 인물들과 생김새와 차림새가 너무도 비슷하다. 이처럼 윤두서가 전 시대인 조선 중기의 절파게 화풍을 많이 참고하고 구사하였음이 확인된다
중국 명대明代에 화원인 대진戴進(15세기 전반)을 개조로 하여 형성된 직업화가들의 화풍인 절파계 화풍을 원화院畵를 배척하던 사인士人화가인 윤두서가 수용하여 구사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왕실 출신의 이경윤을 비롯한 문인화가들이나 화원들이나 대부분 신분상의 차이와 무관하게 그 화풍을 따름으로써 조선 중기의 주류 화풍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6 어쨌든 이러한 경향은 윤두서가 추구하였던 고학古學이나 고화해의 세계와 합치되는 것으로 풀이되기도 한다.7
윤두서가 참고하였던 조선 중기 화단에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절파계 화풍과 함께 조선 초기로부터 물려받은 안견파 화풍이 여전히 계승되고 있었으므로 윤두서도 그 화풍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8 그러나 그 영향의 잔은 너무나 미미하여 본격적으로 거론할 바가 못 된다. 이는 이경윤을 제외한 김시金 影1524~1593), 이경윤의 아들 이징(1581-1645 이후), 김명국金明國(1600-1662 이후) 등 조선 중기의 대표적 화가들이 앞 시대로 부터 전해 받은 안견파 화풍과 함께 새로이 유행하던 절파계 화풍을 함께 구사했던 사실과 대비해 보아도 예외적인 사례라 하겠다.9 이처럼 윤두서가 안견파 화풍을 절파계 화풍처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던 데에는 아마도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윤두서가 참고했던 이경윤이 왕실 출신의 화가로서 거의 유일하게 안견파 화풍을 외면하고 오로지 절파계 화풍만을 구사했던 사실에서 영향을 받았던 결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와 더불어 안견이 화원으로서 윤두서가 외면하던 윈체화院体畵의 대표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화풍을 외면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듯하다. 이 밖에 윤두서가 안견에 대하여 지녔던 일종의 편견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안견에 대한 윤두서의 편견은 그의 저술인 r기졸記拙」의 제2권「화평畵評」에서 잘 드러난다.10 윤두서는 안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11
侒堅)(안건)
넓으면서도 그리 넓지 않고 힘이 있으면서도 그리 굳세지 않으며, 산에는 기복이 없고 나무는 앞뒤 로 어려서 그 고고高古한 곳이 썰렁한 저잣거리 같다. 낡은 집. 무너질 듯한 다리, 침엽수 나무, 바위 주름과 안개구름이 꽉 들어차 있기도 하고 어슴푸레하기도 하다 독자적으로 동방의 거장으로 손꼽기에는 미치지 못하나 김시(醉眠)에 필적할 만하다.[博而不廣剛而不健山無起伏樹少面背然其高古處如寒墟小市古屋危橋樹枝枝針石坡雲蒸森然黯然自不可及殆東方之巨擘醉眠之亞匹].
전반적인 평은 물론 안견의 화풍을 계승하고 절파계 화풍도 앞장서 수용하였던 김시보다도 못하다(亞四라고 본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윤두서가 같은「화평」에서 김시와 이경윤에 대하여 내린 평가를 보면,그런 느낌을 더욱 떨굴 수가 없다12
伺圃)(사포 김시)
“진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넓으면서도 멀리까지 깊이감이 있으며, 낡음과 건장함이 뚜렷하고 섬세하면서도 정교하다. 동방의 대가로서 당대의 독보라고 부를 만하다.[濃膽閻達老健纖巧nr謂東方大家昭代獨步].
〈鶴林正)(학림정 이경윤)
“힘차면서 견실하고 단아하면서 깨끗하다. 그런데 헙소한 점이 아쉽다
[剛緊雅潔而恨其狹小].
특히 김시에 대한 평가의 끝부분은 김시에게보다는 오히려 안견에게 돌리는 것이 훨씬 순리일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김시와 이경윤이 문인 출신의 화가들이고 안견이 화원 출신임을 감안해도 여전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윤두서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많은 문화재들이 회진되거나 일실되었던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와 같은 안견의 걸작들은 더 이상 접하지 못하고 수준이 떨어지는 전칭작들만 볼 수 있었던 데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13
이러한 문헌기록과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로 보면 윤두서의 보수적이고 전동적인 화풍은 조선 초기보다는 바로 앞 시대인 조선 중기의 화풍을 참고하고 계승한 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판단된다
2, 진취적 진보주의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공재 윤두서를 특히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앞에서 잠시 살펴본 보수적인 전통주의 경향보다는 그가 보여주기 시작한 진취적이고 진보주의적인 화풍 때문이다 윤두서의 진취적이고 진보주의적인 화풍은 그의 남종산수화, 자화상, 풍속인물화, 정물화 등에서 완연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이 분야들의 대표작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요구된다
(1) 남종산수화
윤두서는 조선 후기의 화가들 중에서 제일 먼저 남종산수화풍을 수용하여 구사하기 시작했던 인물이어서 주목된다. 그는 종래의 실경산수화 전통을 계승하고 남종산수화 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결합해서 독자적, 독창적 진경산수화 풍을 창출한 18세기 최고의 산수화가인 8년 연하의 겸재 정선보다도 앞서서 남종화풍을 비록 소극적으로나마 수용하였던 것이다. 사실 남종화풍은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수용되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되었으나 윤두서의 시대까지도 아직 유예기나 다름없던 때여서 그의 남종화에 대한 관심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14
윤두서는 기록상으로는 북송의 묵죽화가 소식蘇軾, 원대元代초기의 전선錢選과 조맹부趙孟頫, 원말의 4대가(황공망黃公望, 오진吳鎭, 예찬倪瓚, 왕몽王蒙) 등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폭넓게 받아들인 것으로 짐작되나,15 실제로 남아있는 작품들에 의거하여 보면 그 수용의 폭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일례로 그는 황공망의 사산수걸寫山水訣을 베끼기까지 했지만 황공망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등의 대표작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피마준법 披麻皴法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구사한 작품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16
이점은 윤두서가 제일 선호하고 자주 참고하였던 예찬倪瓚의 화풍을 수용함에 있어서도 엇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즉 윤두서의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도3, 〈춘경산수도春景山水圖) .<모정산수도茅亭山水圖) 도5, 〈강안산수도江岸由水圖) 도6, 〈수애모정도水涯茅亭圖)도7를 비롯한 남종산수화들을 보면 전체 적인 구도, 포치, 수지법樹枝法등에서는 예찬의 영향이 감지되나 그의 전형 적인 절대준법折帶皴法은 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오직 윤두서의 <수하휴게도樹下休憩圖>도8 등 지극히 일부의 작품에서만 희미하게 감지될 뿐이다.17 오진의 화풍과 왕몽의 우모준법牛毛皴法도 윤두서의 작품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윤두서가 원말 4대가를 비롯한 중국의 대표적인 남종화가들의 격조 높은 원작들을 직접 접하고 그 영향을 온몸으로 짙게 받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판단된다 당시의 시대적 여건이나 윤두서의 주변 환경 등도 그림에 관한한 문화적으로 척박하고 제한적이었던 데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풀이된다. 그는 오히려 곁에 지니고 있던『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畫譜」에 많이 의존하였던 듯하다18
전반적인 구도와 구성, 수지법. 옥우법屋字法등은 분명하게 담고 있으면서도 각종 준법의 표현은 한계를 지니고 있는 화보의 제한성을 윤두서의 남종화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윤두서가『고씨 화보』를 많이 참조했다는 사실은 그가 그린 <수하모정도樹下茅亭圖)도9가 이 화보에 실려 있는 명대 오파吳派의 대표적 화가인 문징명文徵明의 작품도10을 방한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에서도 거듭 확인된다.19
이밖에 흥미롭게도 윤두서의 이 작품에서 나무의 옆에 있는 바위가 남종화풍과는 무관한 절파계화풍으로 그려져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윤두서 남종화의 절충적 성격과 한계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반드시 윤두서의 기량技倆부족이나 남종화풍에 대한 이해의 미흡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단지 뛰어난 중국의 남종화 진작들을 직접 충분히 보지 못했던 사실 자체를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제한된 여건 속에서 윤두서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종화풍에 눈을 돌리고 실험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가 그처럼 남종화의 길을 열었기에 곧 이어서 조선 후기 화단에서 남종화가 풍미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윤두서의 남종화는 이처럼 일정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윤두서의 남종산수화수용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이중적, 절충적 복합적 태도이다. 예를 들어 그의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를 살펴보면 그 점이 잘 드러난다. 강을 사이에 두고 원경과 근경이 나뉘는 구도와 구성, 근경에 서 있는 세 그루 나무들의 종류와 형태 등 수지법 등은 분명히 예찬 계통의 남종산수화의 영향을 보여주나 원경의 산들을 표현한 묵법은 조선 중기 김식銂의 전칭 작품인 〈고목우도枯木牛圖)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윤두서는 새로운 남종화풍을 받아들이는 진취적 경향과 조선 중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보수적 태도를 함께 보여준다. 이러한 윤두서의 이중적 복합적 화풍은 그의 <조어도釣魚圖) 도12 등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다소간의 차이를 막론하고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보수적 태도와 진보적 태도를 동일 작품들에서 이처럼 강하고 끈덕지게 드러내는 다른 화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윤두서의 독특한 회화세계라 하겠다 윤두서는전통주의자였던 반면에 조선 후기 남종화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2) 자화상
윤두서의 화가로서의 파격성, 진취성' 관찰력, 빼어난 기량과 재능 등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은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도 13 이 자화상은 워낙 유명하고 여러 학자들이 각종 저술을 통해 특징들을 언급한 바 있으며 필자 자신도 졸견을 적은 바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자세한 구체적 서술은 피하고자 한다.20 그 대신 이 자화상의 회화사적 의의를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윤두서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것은 고려 말의 공민왕恭愍王(1330-1374 재위 1351-1374)과 조선 초기의 김시습(1435~1493) 이래 2백 수 십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어서 회화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21 조선시대의 화가로는 15세기 김시습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실제로 작품이 남아 있는 것은 18세기 초 이전의 화가로는 유일하다. 왜 그가 자화상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실학자적 입장에서 자아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시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여겨 진다. 어쨌든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린 것은 한국회화사상 일대 파격 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윤두서의 진취성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임도 분명하다
그런데 윤두서는 언제 이 자화상을 그렸을까? 기록상으로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일부 연구자들은 윤두서가 해남으로 낙향했던 1713년이나 그 이전으로 보고 있다 22 제작 연대만이 아니라 제작하게 된 동기도 불분명하다. 필자의 졸견으로는 아마도 윤두서가 친구였던 심득경沈得經(1673-1710)이 1710년 8월에 사망하자 그의 사후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에 완성하였던 것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도14.23 이미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앞에서 실제로 볼 수 없게 된 친구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그릴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도 초상화를 남기지 않고 죽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절감하게 되어 내친김에 자신의 자화상도 그리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된다. 이렇게 본다면 윤두서의 자화상은 윤두서가 심특경상을 완성한 1710년 11월 이후에 착수하여 다음 해인 1711년경에 완성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믿어진다. 더 늦추었다면 제작 의지가 약화되고 무산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두서의 자화상이 기억을 되살려 그린 심득경상보다 훨씬 더 응축되고 밀도가 높은 것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 속에 들여다보면서 차분하고 느긋하게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어쨌든 이 자화상이 1710년에 제작된 심득경 초상화보다 앞서서 그려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둘째로, 의관을 정제한 품위 있고 권위 있는 모습이 아닌, 흑건을 쓴 꾸미지 않은 야인의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그려낸 윤두서의 대범합과 솔직함이 돋보이는 점이다. 허세나 권위를 드러내거나 자신을 미화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전의 어떤 초상화와도 비교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초상화를 창출하였다 윤두서의 파격성과 독창성, 진취성이 단연 돋보인다 특이하기 그지없다 오죽하면 친구인 이하곤李夏坤( 1669~?)이 “긴 수염이 나부끼고, 얼굴은 윤택하고 붉어서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선인仙人이나 검사劍士로 의심한다”라고까지 언급하였겠는가24
셋째로, 윤두서가 본래 의도했든 안했든 결과적으로는 중요한 부분과 덜 중요한 부분을 차등 표현한 점이 주목된다. 아주 특이하게도 중요하게 여긴 눈, 코, 입, 수염, 흑건은 정밀묘사를 분명하게 한 반면에 귀와 옷깃은 제대로 성심을 다하지 않아 현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특수 촬영을 동해서만 그 흔적이 엿보일 뿐이다25 귀는 색선色線이나 가는 먹선으로, 옷깃은 분명한 먹선으로 확실하게 드러나도록 표현하지 않았다. 옷깃은 유탄약사柳炭略寫를 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눈, 코, 입. 수염' 흑건처럼 중요하게 여겼다면 먹선으로 분명하게 마무리하지 않은 채 앞으로 지워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방치할 수 있었을가 이러한 상황이 생기게 된 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믿기지는 않지만 중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차별하여 표현했을 가능성, ② 미완성의 작품, 즉 초본이었을 가능성, ③ 눈, 코, 입, 수염 등 정면관의 얼굴 부분은 윤두서 자신이 그렸으나 귀와 옷깃은 누군가가 후에 배선법背線法과 배채법背彩法등을 사용하여 보필補筆하였을 가능성 등이다.
이 세 가지 가능성들을 면밀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세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희미한 붉은 선으로 그려진 귀의 모양은 너무 단순하고 어색하며 도13-1. 눈,코, 입, 수염 등의 표현에 비하여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점이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귀 그림을 윤두서가 그린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심득경 초상화 속의 왼쪽 귀 표현과 비교해보면 더욱 수긍이 안 된다. 심득경의 잘 생긴 왼쪽 귀는 귓털을 포함하여 모든 부분이 세밀하고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되 4-1 윤두서의 화법과 기량에 걸맞는 솜씨와 정성이 드러나 있다.
이 비교를 통하여 보듯이 윤두서 자화상의 귀 표현은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뒤진다.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누군가가 귀와 옷깃을 보필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듯하다. 이 의심쩍은 귀와 옷깃의 표현을 배제하면 나미 지는 똑떨어지는 윤두서의 솜씨이다. 결국 현재에도 분명하게 모습과 솜씨를 드러내는 눈, 코 입, 수염, 흑건 등의 얼굴 부분만이 윤두서의 솜씨라고 믿어진다. 즉 윤두서는 처음부터 부수적인 귀와 옷깃의 표현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얼굴 부분만 집중하여 표현하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현재 보이는 부분이 윤두서가 본래 의도했던 원래의 진상眞像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윤두서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파격 적인 자화상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초상화는 묘사의 완결성이 높아서 단순한 초본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또한 전형 적인 의관을 갖춘 제대로 된 초상화 제작을 염두에 둔 초본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초본처럼 보이는 완결된 자화상이라 하겠다
넷째로, 사실적 표현과 과장법을 혼용한 점도 눈길을 끈다. 눈과 눈썹, 코, 입의 표현은 합리적이고 무리가 없다고 생각되나 구렛나루, 콧수염, 턱수염 등은 아무래도 과장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떨굴 수가 없다. 수염의 무성합과 길이가 보통 한국남성의 통례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양쪽 구렛나루의 수염들이 밑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위쪽을 향하여 뻗쳐 있는 것은 윤두서가 자의적으로 표현한 결과라고 믿어진다. 아마도 야취를 고조시키고 남성성을 제고시키고자 하였던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이 그림 을 보면 윤두서의 친구 옥동 이서(1662-1723)가 제문祭文에서 윤두서는 재상宰相의 재질과 장군의 재목을 갖추었다고 한 말에 공감이 간다26 윤두서가 말을 좋아하고 말 그림을 많이 그렸던 사실과도 부합한다. 어쨌든 위로 뻗친 무성한 구렛나루 속에 귀가 숨겨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섯째로, 심리묘사心理描寫를 시도한 낌새가 보인다. 쌍꺼풀진 길고 적당히 큰 눈들, 또렷한 눈동자들, 눈 주위를 감싼 듯한 붉은 색조의 눈 사위 등을 보면 기운생동氣韻生動하면서도 거울 속에 비친 윤두서 자신의 표정에서는 알 듯 모를 듯한 심리가 감지된다. 자연스럽게 다문 입과 입술도 일조를 하고 있다
여섯째로, 한국회화사상 가장 많은 자화상을 남긴 표암豹菴강세황姜世晃(1713-1791)에게 미쳤을 윤두서의 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27 윤두서와 강세황은 생년으로 보면 45년의 차이가 난다. 얼핏 생각하면 영향을 주고받기에는 연대 차이가 커 보인다. 그러나 영향이란 수백 년 뒤에도 미칠 수 있는 것이어서 반세기 정도의 차이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하다. 강세황이 윤두서의 영향을 받았음은 그가 그린 (방공재춘강연우도做恭齋春エ煙雨圖)도15에 의해 입증된다 즉 그림의 상단에 쓰인 대로 강세황이 공재 윤두서의 〈춘강연우도>를
방하여 그린 작품이어서 강세황이 윤두서의 산수화를 공부했음이 분명하게 밝혀 진다. 현재 윤두서의 원작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의 다른 작품인 <조어도釣魚圖>도12와 강세황의 방작을 비교해보면 전체적인 구도와 구성, 조어 장면, 산들의 모습 등 모든 면에서 매우 흡사하여 상호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
산수화에 보이는 윤두서와 강세황의 친연성은 자화상의 표현에 있어서도 대동소이하게 간취된다. 일례로 강세황의 자화상들 중에서 개인 소장의 유지초본油紙草本의 <자화상>과 비교하여 보면 흑건의 상부가 잘려나간 듯한 모습, 눈, 코, 입·수염 등 안면 묘사법과 옷깃의 표현방법 등 여러 면에서 상통한다. 굳이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다만 강세황은 이 초본 자화상에서 처음에는 윤두서의 자화상에서처럼 건의 윗 부분을 잘려나간 모습으로 표현했다가 뒤에 먹선으로 잘려나간 부분을 그려서 원래의 형태대로 되살린 것이 눈에 띤다.
두 자화상 사이의 불가분의 연관성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강세황이 윤두서의 자화상을 실견한 데에서 비롯된 것인지, 누군가에게서 윤두서의 자화상에 관하여 들은 바가 있어서 그렇게 그려본 결과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어쨌든 윤두서가 문인화가로서 자화상을 그렸던 사실과 그가 구사한 표현방법 둥은 후대의 강세황에게 좋은 선례가 되었음이 분명하다고 믿어진다
(3) 풍속인물화
공재 윤두서가 진취성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의 회화 발전에 기여한 또 다른 업적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속화 또는 풍속인물화를 처음으로 그림으로써 그 초석을 놓고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윤두서 이전에도 넓은 의미에서의 풍속화라 할 수 있는 궁중기록화, 문인들의 계회도 등 인간의 생활이나 활동을 그리는 회화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28 서민들의 일상생활 양태 등을 주제로 한 좁은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윤두서가 효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윤두서가 그리기 시작하고 조영석, 강회언, 김두량 등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그 기반이 다져지고 그 터전 위에서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의 화원출신 대가들이 풍속화의 꽃을 만발하게 하였던 것이다"
윤두서가 그린 풍속화들 중에서 맨 먼저 주목이 되는 작품은 첫 번째 단계에 속하는 경전목우도耕田牧牛圖>이다. 도17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는 농부의 모습을 대경 산수 속에 화면의 중심이 되도록 포치하여 표현하였다. 근경 왼편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들이 근경과 후경의 산들을 시각적으로 연결시켜 주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밭갈이 장면에 쏠리게 한다. 자연은 위대하고 인간과 동물은 하찮아 보여서 이 그림과는 무관한 중국 거 비파巨碑派화가들의 자연관이 떠오르게 한다. 남종화풍의 영향은 안 보이고 조선 중기 화풍의 잔흔이 감지된다
밭갈이 장면 못지않게 흥미로운 장면이 오른쪽 하단부의 근경에 숨기듯그려져 있다 되7-1 풀을 뜯는 두 마리의 소들을 앞에 두고 풀단을 베게 삼아 누워서 자고 있는 목동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 장면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보너스와도 같다.
주의 깊은 감상자가 아니면 밭갈이 장면에 시선을 뺏긴 채 간과하기 쉽다. 오직 그림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감상자의 눈에만 뜨이는 보너스 장면인 것이다. 바로 덤으로 주어지는 이 장면을 키우고 강조해서 그린 작품이 윤두서의 제자로 밝혀진 김두량金斗樑(1696-1763)의 〈목동오수도牧童午睡圖>이다. 되830 풀 베개를 베고 달콤한 낮잠에 빠져 있는 목동과 소는 더 이상 윤두서의 그림에서처럼 숨겨진 듯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그려지던 존재들이 아니다. 스승과는 달리 제자인 김두량은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묘파하였다. 목동과 소가 함께 배부른 상태인데 볼록한 배의 표현에는 서양적 음영법陰影法이 적극적으로 구사되어 있어서 사제 간의 시대적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음영 법 자체는 김두량이 스승인 윤두서로부터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그림의 위편에는 윤두서를 공부한 표암 강세황의 찬문이 곁들어져 있어서 윤두서·김두량·강세황 3인의 회화사적 관계를 짐작케 한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나물캐는 두 여인들을 주제로 한「채 애도採艾圖」에서 크게 변화하여 아주 작게 소극적으로만 그려진 <경전목우도>에서와는 달리 예애도에서는 인물이 산수 배경과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인공인 여인들이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크게 그려져 있어서 오히려 배경의 산보다도 비중이 커보인다. 경전목우도에 비하면 파격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림의 주인공을 농촌의 평범한 여인들로 삼은 점, 여인들의 나물캐는 모습을 주제로 한 점, 여인들의 정면이 아닌 측면과 뒷모습을 표현한 점 등도 한국 회화사상 최초의 이례적인 사례여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배경의 산을 그려낸 묵법은 김식의 〈고목우도>도11에서 보듯이 조선 중기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따르고 있다. 조선 중기의 전통적인 묵법과 참신한 진취적 풍속화가 한 화면에서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왼편 상단의 여백에 작고 검은 꾀꼬리를 그려 넣어 허전함을 메꾸고 두 번째 여인이 머리를 들어 그 새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표현하여 새와 여인 사이의 교감과 화창한 봄날의 화평한 분위기가 함께 보는 이에게 감지된다
윤두서 의 이 작품은 그의 손자인 윤용(1708-1740) 의 눈에 띠어く협롱채춘도挟籠採春圖>을 낳게 하였다. 도20 바구니를 옆에 끼고 다른 한손에 호미를 든 나물 캐는 젊은 여성을 주제로 삼은 점, 뒷모습을 표현한 점 등이 영락없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드러낸다
산수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묘사에 집중한 점이 새로운 큰 차이라 하겠다.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 가법家法의 전수가 분명하게 이루어졌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후대의 다른 화가들에게만이 아니라 자손에게도 대물림 된 것이다
윤두서의 풍속인물화 두 번째 단계 또는 범주를 보여 주는 대표작은 <짚신짜기織履>이다도21 소경小景산수를 배경으로 풍속 인물을 표현한 것이 윤두서 의 두 번째 단계 풍속화인데, 이く짚신짜기>에서는 나무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풀방석을 깔고 앉아 짚신을 짜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그렸다. 일종의 수하인물도樹下人物圖범주에 속하는 그림이기도하다 전반적으로 산수나 인물 의 표현에는 조선 중기의 전통이 강하게 배어있다. 대중 서민의 생활상의 한 면을 담아냈다는 접과 평범한 서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이 참신하다.
그런데 짚신 짜기를 주제로 하여 새로운 경지를 이룬 것이 바로 김득신(1754-1822)이다. 그의 〈성하직 리盛夏織履는 산이나 나무가 아닌 집 울타리를 배경으로 하여 짚신을 짜고 있는 남자와 그의 식솔들을 묘사하였다.도22 더위를 식히기 위해 웃통을 벗고 열심히 짚신을 짜고 있는 남자와 그의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키우고 있는 강아지까지 등장하였다 짚신을 짜는 한 사람만 등장시켰던 윤두서와 달리 김득신은 아낙을 제외한 전 식솔들의 자연스러운 생활모습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묘파하였다. 윤두서가 없었어도 짚신 짜기가 이처럼 풍속화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고 김득신의 작품같은 가작을 낳게 되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
윤두서 풍속화의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또 다른 대표작은く석공공석도石工攻石圖>이다.523 나무 밑에서 돌을 깨고 있는 두 남자를 주제로 표현하였다 깰 바위 위에 연모를 고정시킨 채 다칠까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돌린 중년 남자와 쇠뭉치로 내리치려는 눈을 부릅 뜬 청년의 표정이 모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의 옆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수집가 김광국의 찬문이 곁들여져 있다 같은주제의 거의 똑같은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바로 강희언姜熙彦(1738-1784 이후)의 작품이다-524 강희언이 윤두서의 그림을 똑같이 방做한 것임에 틀림없다. 윤두서 풍속화의 영향력이 감지된다
윤두서 풍속화의 세 번째 범주는 일체의 배경 없이 풍속 장면만을 표현한 것이다. 선차도旋車圖)가 그 좋은 예이다.525 두 나이 먹은 남자들이 간단한 기계를 사용하여 목기를 깎고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 그렸다. 윤두서의 실학적 경향이 반영된 작품이다. 윤두서의 외증손인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화성華城축조시에 발명하여 사용하였던 기계들이 윤두서의 이런 그림들과 런 관계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윤두서 의 연차도>가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수공선자도手エ旋車圖)에 미친 영향만큼은 부인 하기 어려을 것이다돼 조영석의 작품에서는 윤두서의 두 번째 범주의 풍속화들에서처럼 L부를 그려 넣어 일종의 수하인물도 형식을 따른 점이 두드러진 차이일 뿐이다. 이래저래 윤두서의 영향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조영석의 이 〈수공선차도>는 강희언의 사인 삼경첩士人三景帖 중에서 <사인 휘회도士人揮毫圖), 도27와 구도 및 나무의 형태가 매우 흡사하여 두 사람 사이의 영향 관계를 엿보게 된다31 그 시발이 윤두서 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윤두서→조영석-광희언의 계보가 확인되는 셈이다. 이상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윤두서의 풍속화는 손자인 윤용은 물론 제자인 김두량을 비롯하여 김득신, 강희 언, 조영석 둥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이 확인된다
이 글에서 직접 비교 고찰은 하지 않았지만 윤두서 풍속화의 영향은 아들인 윤덕희와 풍속화를 풍미하게 한 대표적 화가 김홍도에게까지 간접적으로나마 미쳤음이 분명하여 그 폭은 훨씬 컸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윤두서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개척자 효시, 아버지 등으로 불리어도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4) 정물화
윤두서의 진취적 성향은 위에서 살펴본 분야들 이외에 정물화에서도 드러난다. 예과도栗果圖, <석류매지도石榴梅枝圖>가 그 예이다. 쌍폭인 이 그림은 각각 여름과일과 겨울 과일을 주제로 하고 있어서 각각 하과도夏果圖와 동과도冬果圖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그릇에 담긴 수박과 그 주변의 참외, 가지 등을 그린 예과도의 참외모양으로 굴곡진 금속재金屬製인듯한 그릇에 담긴 석류와 유자, 이름 모를 과일들과 함께 매화가지를표현한 <석류매지도>는 전무후무한 이례적인 작품들이다 어디에서 이런 정물화를 그릴 발상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수박 그림에서 가장 뚜렷하게 간취되는 서양식 음영법이 서양 정물화와의 간접적인 연관성을 상상하게 하지만 막연할 뿐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윤두서의 이러한 서양적 음영 법이 제자인 김두량에게 전해져 더욱 발전했음은 앞에서 소개한 김두량의 <목동오수도>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어쨌든 소극적으로나마 정물화를 남겼다는 사실은 윤두서가 그의 학문에서처럼 그림에서도 관심이 사방에 미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N. 맺음말
이상 윤두서 회화의 이모저모를 문제의식을 가지고 요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 밝힌 새로운 졸견들을 논의한 순서에 따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윤두서는 조선 중기가 아닌 후기의 화가로 보아야 한다.
②그 이유는 그가 조선 후기 회화의 새로운 경향인 남종화를 앞서서 받아들였고, 풍속화의 길을 닦았으며, 파격 적인 자화상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으로 정물화도 남겼기 때문이다
③ 윤두서가 그의 r기졸記拙』에서 안견을 김시金禔보다도 낮게 평가한 것은 그가 〈몽유도원도>같은 안견의 걸작을 보지 못하고 오직 전칭傳稱작품들만 볼 수 있었던 시대적 여건 때문이라고 보았다.
④ 윤두서의 회화는 보수적 전통주의와·진취적 진보주의로 대별되는데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는 조선 중기의 절파계断派系화풍의 영향을 계승한 산수화와 전동적인 도서화들이 있으며, 후자의 경향을 드러내는 것은 남종산수화 전혀 새로운 자화상 풍속인물화·정물화 등이라 하겠다.
⑤ 윤두서는 조선후기 화가들 중에서 처음으로 남종산수화풍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나 높은 수준의 중국 남종화 진작들은 보지 못하고『고씨 화보」나 r당시화보唐詩畵해」등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에 일정한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중국 남종화에 보이는 전형적인 피마준披麻皴, 절대준折帶皴, 우모준牛毛皴등의 준법들이 윤두서의 남종산수화들에서는 눈에 띠지 않는 점이 그 증거이다
⑥ 윤두서의 자화상 중에서 귀와 옷깃은 누군가가 후대에 배선법背線法이나 배채법을 써서 보필한 것으로서 윤두서 자신의 필로 보기 어렵다. 특히 귀의 표현은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윤두서가 그린 것으로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이 미심쩍은 귀와 옷깃을 뺀 얼굴부분 즉 현재까지 남아서 분명하게 보이는 부분만이 윤두서의 진괼 로 믿어진다. 따라서 윤두서는 동양에서 가장 파격 적인 자화상을 남긴 문인 화가로 평가받을 만하다
⑦ 윤두서의 자화상은 산수화와 더불어 강세황에게 이어졌다.
⑧ 윤두서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길을 닦은 개척자 효시라 할 수 있다
⑨ 윤두서의 풍속화는 대경大景산수 속의 풍속 장면→소경小景산수 밑의 수하인물도樹下人物圖같은 풍속 인물 산수 배경을 배제한 풍속 인물로 변화해 갔을 가능성 이 높다.
⑩ 윤두서의 풍속화는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 이외에 김두량, 조영석, 강희언, 김득신 등 문인화가들과 화원들에게 폭 넓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한국적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⑩ 윤두서는 정물화도 그렸고 서양적 음영 법陰影法도 수용하였다. 윤두서의 제자 김두량이 그의 〈목동오수도> 도18에서 서양적 음영 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한 것도 윤두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상의 여러 가지 업적으로만 보아도 윤두서가 조선후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얼마나 비중이 큰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이번의 서거 300주년 기념 전시회와 학술대회를 통하여 그의 생애와 가계, 다양한 학문·시와 서, 회화의 제 양상 후대에 미친 영향의 실상 등이 훨씬 구체적으로 밝혀져 앞으로의 보다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연구에 큰 토대가 되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