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 문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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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학교 및 학위 : | 경희대학교 사학과 강사, 조선시대사 전공, 硏究論文 |
| 년도 : |
硏究論文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해남윤씨 윤선도 가계의 사례를 통하여
문숙자
경희대학교 사학과 강사, 조선시대사 전공 moonie8364@gmail.com
I. 머리말
Ⅱ. 해남윤씨 가계와 구성원들의 거주지
Ⅲ. 가사 조달과 경영
Ⅳ. 맺음말
I. 머리말
조선시대 양반가의 재산상속 문서는 한결같이 노비와 토지를 주요 재산 상속원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은 노비·토지를 빈번하게 매매하면서 가계 경영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양반가의 양대 재산을 칭할 때에도 당연히 노비와 토지를 거론한다. 반면 가사는 상속· 매매문기에서 노비·토지에 비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문서상에 노출되는 빈도가 적을 뿐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가사의 상속과 매매는 그 어떤 재산의 경영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특히 거주지를 빈번하게 옮기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매매보다는 상속을 통해 가사를 승계하는 등 가사 경영에서 상속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사의 상속은 제사 혹은 가계계 승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상속 시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항목이 기도 하였다.
나아가 가사 경영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가족구조와 거주율 등 보다 다양하고 근원적인 삶의 양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 다. 가사가 양반들의 삶의 형태와 연관된다는 점을 입증하기는 어렵지 않다. 예컨대, 지방에 세거해온 양반들은 관직살이를 위해 상경할 때경재(京齋)를 마련하는 경우도 있지만, 타인의 집을 임차하여 거주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요즘의 하숙처럼 방 한 칸을 빌려 쓰면서 숙식을 동시에 해결하는 경우도 있다. 호적에 등장하는 대입(代入)·차입(借入)·시입 등의 용어에서 그들의 생활방식을 일부 짐작할 수 있다. 1) 타향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양반도 마찬가지이다. 적객(謫客)이라는 표현에서 알수 있듯이 이들은 대부분 유배지에 오래 머무르며 정착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객(客)의 입장으로서 향리 등 하급관속의 집을 빌려 잠시 거주하거나 2) , 지방관 또는 지역민의 도움을 받아 임시 거처를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유배가 길어지면 온 가족을 불러들여
1) 代入은 대신 입주하는 것, 借入은 무상으로 임대하여 입주하는 것, 貰入은 유상으로 임대하여 입주하는 것, 時入은 비어 있는 타인의 집에 입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학성, 「조선후기 漢城府民의 戶籍자료에 보이는 ‘時入’의 성격‒한성부 주민의 住居 양상을 구명하기 위한 一試論‒」, ????고문서연구???? 24(2004), 311‒316쪽.
2) 일례로, 16세기 경상도 성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李文楗의 경우 유배 초기에 성주 龍山 里에 있는 향리 裵純의 집에 머물며 생활하였다. 이문건, <1547. 1. 1. 일기>, ????묵재일기???? 상 (국사편찬위원회, 1998),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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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를 지어 거주하는 등 장기적인 가사 경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가사 경영’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은 가사를 상속·매매 또는 조성(造成)하는 행위가 이와 같이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삶의 형태나 그것의 계승, 그리고 이를 포괄하는 가계 경영과 유관하다는 생각에서이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가사와 관련된 연구로는 건축사나 역사학 분야에서그 성과가 일부 축적되어 있다. 건축사 분야에서는 건물의 구조와 규모, 입지 등을 분석하는 차원에서 연구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풍수지리설이나 유학 사상과 연관 지어 양반가의 건축물 조성 경위 등을 설명하는 사례도 있으며, 양반가의 가사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입지나 경관에 대한 이해로 그 영역이 확장되고 있기도 하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가사 조성 과정에 대한 연구, 가사의 상속에 대한 연구, 그리고 가사 매매에 관한 연구가 있다. 가사 조성에 관한 연구로는 ????미암일기????를 토대로 미암 유희춘의 가사 조성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물력 동원 규모·양상을 상세히 소개한 연구가 있다. 3) 이 연구는 16세기의 양반들이 사저(私邸) 건축에 공적 재화와 인력을 투입했음을 밝히고, 그 실태를 정치하게 분석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 조선후기 양반가의 일기에서도 지역 내의 군정과 물력을 동원한 가사 조성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볼 때 4) , 가사 조성과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연관시켜 관찰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사 경영 전반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물력 동원을 통한 가사 조성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물력 동원 역시 보다 많은 사례연구의 축적을 통해 가사 조성 양상과그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가사의 상속에 관한 연구는 15‒16세기의 재산상속 문기를 통해 주로 영남지역 양반가의 가사 상속 양태를 분석한 논문이 알려져 있다. 5)
이 연구는 과거에 노비·토지와 구분 없이 조선시대 상속 관행 일반에 대한 언급에 묻혀 있던 가사 상속만 부각시켜 그 양상을 밝혔다는 데의미가 있다. 그러나 가사는 분재 문기에 드러나는 빈도가 낮으며, 조선후
3) 이성임, 「16세기 柳希春家의 海南造舍와 物力 동원」, ????인하사학???? 10(인하사학회, 2003), 403‒434쪽.
4) 17세기 말에 쓰인 尹爾厚의 ????지암일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쓰인 盧尙樞의 ????노상추일기???? 등에도 지역의 공적 인력과 물력을 동원한 가사 조성이 많이 나타난다.
5) 박현순, 「분재기를 통해 본 15‒16세기 사족층의 주택 소유와 상속」, ????역사와 현실???? 84(2012), 293‒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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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 갈수록 더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아직 가사의 상속 경향을 일반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므로, 다른 지역 사례와의 비교 등을 통해 일반화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편 가사 매매에 대해서는 17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의 한성부 중부지역 가사 매매문기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 매매 및 소유권 변동 절차, 가격의 추이 등에 대해 상세히 언급되었 다. 6) 이 역시 보다 많은 사례를 발굴하여 조선후기 가사 매매의 추이를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사 경영 전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그 안에서 상속·매매, 그리고 가사 신조(新造)의 기능 및시기적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글에서는 이런 문제에 착안하여 해남윤씨 윤선도(尹善道, 1587‒ 1671) 집안의 가사 경영 양상을 종적(縱的)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간적으로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200여 년에 걸치는 시기가 고찰 대상이다. 또 공간적으로는 관직살이를 위해 가사를 마련한 서울과 세거지 해남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자료가 불비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하 지는 못했으나 별업 소재지나 적거지까지도 부분적으로 언급하게 될것이다. 이를 통해 양반가의 거주지 변동과 그에 따른 가사의 형성 양상을 살펴보고, 가사의 조성과 유통·승계 등이 가계의 구조·계승 또는 양반의 가족생활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규명해보기로 하겠다.
Ⅱ. 해남윤씨 가계와 구성원들의 거주지
1. 가계와 이력
이 글에서 고찰 대상으로 하는 가계는 해남 연동의 해남윤씨 윤선도 가계이다. 이 가계는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1543) 때 처향 (妻鄕)인 해남에 들어온 이후 현재까지 전라도 해남에 세거하고 있다.
윤효정이 해남에 입향한 16세기부터 이 가계가 주거(住居)와 가사 경영을 어떻게 해왔는지 분석하게 될 것이다.
6) 양진석, 「조선후기 漢城府 中部 長通坊 丁萬石契 소재 가옥의 매매와 그 특징」, ????규장 각???? 32(2008), 3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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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은 입향 이후 해남윤씨의 가계 중 연동에 세거한 윤선도의 직계 후손 계열만 간략히 그린 것이다. 이 가계도에 수록된 주요 인물의 이력을 통해 이들의 거주지를 일부 유추할 수 있다. 먼저 가계도의맨 앞에 위치하고 있는 윤효정은 전라도 강진군 도암면에서 출생했으나 혼인과 동시에 처향인 해남으로 들어오면서 해남 입향조가 되었다. 7)
해남에 입향한 직후 그는 수성동 지역에 거주하다가 연동으로 옮겼고, 연동에서 그의 직계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수백 년에 걸친 해남에서의 세거는 윤효정이 입향하여 처가(妻家)의 사회 경제적 기반과, 해남 지방 사족의 학문적 연원이 된 최부(崔溥)와 연결된 학맥 등을 토대로 해남에서의 세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기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있다. 8)
7) 이병삼, 「15‒16세기 해남지방 재지사족의 형성과 성장에 대한 일고찰 ‒해남정씨가의 혼맥관계를 중심으로‒」, 목포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05), 18쪽.
8) 위의 논문, 5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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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정이 해남지역 내에서 윤씨 가계의 사회적 기반을 다진 것과 달리, 도1에서 윤효정의 아들로 확인되는 윤구(尹衢, 1495‒?)를 시작으로 윤효정의 후손들은 중앙 관계로 진출하여 다양한 정치 사회적 활동을 하였다. 윤씨 가계 구성원들의 관직 활동은 16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어 18세기까지 이어졌고, 그 범위는 중앙은 물론이고 다른 지방으로도 확대 되었다. 먼저 윤구는 홍문관교리·사헌부지평·예조정랑·성균관사성 등의 중앙 관직과 전라도사(全羅都事)·순창군수 등의 지방 관직을 역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묘사화로 인해 26세의 나이에 영암군 옥천면으로 유배되었고, 그 이후에는 고향에 은거하였다. 9) 윤구의 장남 윤홍중은 예조정랑·영광군수 등을 지냈고, 차남 윤의중도 호조·이조 참판, 공조·예조 판서, 좌참찬 등 여러 관직을 섭렵하였다. 양자로 들어가 윤홍중의 대를 이은 윤유기 역시 병조정랑·호조참의 등 중앙 관직을 지냈고, 안변·담양 등의 도호부사와 강원도 관찰사 등도 역임하였다. 윤유기의 아들 윤선도는 의금부도사·한성서윤·승지는 물론 공조와 예조의 참의 직까지 지냈으며, 안기 찰방·관서경시관 등으로 지방에 나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윤구로부터 4대를 연속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경재(京齋)를 포함하여 해남 이외 지역에 가사(家舍)를 경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587년(선조 20)에 윤선도가 서울의 연화방에서 출생했고, 그 아버지인 윤유기가 1619년(광해군 11)에 명례방 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10) 16세기 후반부터 서울 소재 가사(家舍) 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윤선도 이후에는 이전 시기만큼 중앙과 지방에서의 사환(仕宦)이 다양 하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선도의 손자 윤이석(尹爾錫)이 한성부 판관·종친부 전부(典簿)와 이산현감 등을 지냈고, 윤이석의 아우 윤이후 (尹爾厚) 역시 병조정랑·사헌부 지평·함평현감을 지내는 등 중앙 및지방 관직이 끊어지지 않았다.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尹斗緖)는 관직생 활보다는 개간에 앞장서며 토지 경영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등 전반적인 종가의 운영에 더 힘을 쏟았다. 그러나 윤두서 역시 서울에서 생활한 시기가 있으며, 그의 아들 윤덕희는 사옹원주부·정릉현감 등의 관직을
9) 이후 해남에 은거하면서 하서 김인후 등과 교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내옥, ????공재 윤두서????(시공사, 2003), 26쪽.
10) 윤선도 저, 이형대 외 옮김, ????국역 고산유고????(소명출판, 2004), 557‒5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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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하기도 하였다. 윤덕희가 관직생활을 마감하고 해남으로 낙향한 것은 18세기 중엽으로, 윤덕희 이후에는 상경하여 관직에 임하는 일없이 해남을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해남윤씨가(海南尹氏家)의 가사 경영에서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기는 윤씨가의 인물들이 관직생활을 꾸준히 이어온 시기로, 서울에서 태어났거나 생활한 흔적들이 고문서와 일기·문집 등의 기록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동시에 해남지역에서 전답을 매매, 경작하고, 노비를 관리하고 가솔을 거느리며 가계를 경영한 흔적 역시 고문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기이다. 해남과 서울에서의 이원적 가사 경영, 또는 타 지방까지 포함한 다원적 가사 경영이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윤씨가의 가사 문제에 대해 주거(住居)라는 삶의 문제와, 재산으로서의 가사 경영 양면에 주목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문서에 나타난 윤씨 구성원의 거주지
윤씨 가계와 그들의 이력을 통해 여러 군데에 가사를 경영했을 가능성이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16세기부터 4대 이상 지속되어온 서울에서의 관직생활과, 영·호남은 물론이고 강원·함경도 등 다양한 지방에서의 관직살이, 그리고 나아가 유배생활에 이르기까지 윤씨 가계의 구성원들은 생활 반경이 매우 넓었다. 또 본가 및 외가·처가로부터 가사를 상속받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직접 거주 여부와 관계없이 다양한 지역에 가사를 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관직생활이 수대(數代)를 이어오는 지속성을 지닌 반면 타 지방에서의 생활은 일시적 이거나 임시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역시 거주의 중심은 서울과 해남이 될 수밖에 없다. 임시적 거주의 성격을 띤 지방생활의 경우, 그 당시의 주거와 가사경영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윤씨가의 가사 경영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우선 고문서에 나타난 윤씨 구성원들의 거주지를 그들이 직접 문서상에 밝힌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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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권에 나타난 17세기 거주지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윤씨가에 소장된 시권에 기재한 그들의 거주지이 다. 시권에는 앞부분에 응시자의 이름과 나이·본관·거주지 등이 기재 되어 있다. 주로 17세기에 작성된 시권에서 윤씨 가계 구성원들의 거주지는 표1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11)
표1은 윤선도‒윤인미‒윤이석‒윤두서까지 4대에 걸친 인물들이 시권에 기재한 거주지이다. 앞의 도1 가계도에 나와 있듯이, 양자(養子)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장자(長子)로 이어지는 계보이다. 12) 그러므로 표1은 17세기 초인 1612년(광해군 4)부터 17세기 말인 1693년(숙종 19)까지 80여 년간 연동 윤씨 가계의 장남의 거주지 정보를 보여준다고할 수 있다. 이후 윤덕희부터 5대에 이르는 공백기를 거쳐 윤주흥 ‒ 윤관하로 이어지는 시권이 남아 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의 것이므로이 부분은 일단 제외하였다. 왜냐하면 18세기 중반 이후 이 가계의 구성원들은 거의 해남 주변으로 활동 반경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16·17세기와 같은 다원적 가사 경영 양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표1 -- 17세기 시권에 명시한 윤씨 거주지
이름 작성연대 나이 거주지
윤선도 1612 26 장흥 1623 37 서울 1623 37 서울 1633 47 해남
윤인미 1628 22 서울 1630 24 서울 1633 27 해남 1661 55 해남 1662 56 해남
윤이석 1654 29 해남 1657 32 해남 1663 38 해남 1665 40 해남 1666 41 해남
윤두서 1693 26 서울
11) 표1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서집성 3 ‒해남윤씨편‒????(1986) 所收 시권을 대상으로 작성한 것이다. 단, 같은 해에 2건의 시권이 있는 경우도 거주지 기재가 일치하므로 그중 1건만 표에 넣었다.
12) 윤선도가 윤유기의 양자로, 윤두서가 윤이석의 양자로 들어가 가계를 계승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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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표1에 수록된 윤선도의 첫 번째 시권은 그가 26세 되던 1612년에 작성된 것이다. 1612년은 윤선도가 진사시에 입격한 해이므로 13) 이시권이 바로 그 진사시 답안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권에 그의 거주지는 장흥으로 기재되어 있다. 윤선도는 서울의 동부 연화방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양부 윤유기를 계후하면서 윤유기가 살던 남부 명례방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성장했으며, 30세 즈음까지 서울에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14)
즉, 서울에 거주했을 것으로 알려진 시기에 윤선도의 시권은 거주지를 장흥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장흥은 <윤의중 자식 3남매 화회문기 (1596)>에 ‘모변전래’ 전답 다수가 소재하고 있던 지역이기도 하다. 15)
윤유기 등 윤의중의 자식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모변전래’로 지칭했으 므로, 이는 윤의중의 처변 재산을 말한다. 윤의중의 처(妻)는 곧 윤선도의 조모를 의미하므로, 윤선도가 26세 무렵 조모의 연고지 일대에 일시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권은 윤선도가 37세 되던 1623년 무렵에 서울에 거주한 사실을 보여준다. 윤선도는 30대부터 많은 곡절을 겪었다. 30세 되던 해인 1616년(광해군 8)에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려 함경도 경원에 안치되고, 2년 후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되었다.
37세 되던 해인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4월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어 상경했다가 7월에 사직하였다. 16) 이 시권은 바로 그해 8월 별시 초시에 합격할 당시의 것이다. 7월에 관직에서 사임하고, 8월에 작성한 시권에 거주 현황을 ‘거경(居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사직하고 바로 낙향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17) 또는 이미 전대(前代)부터 윤씨가는 경재를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18) 낙향했더라도 서울을 오가며 생활했을 가능성도 있다.
13) 「고산연보」, 윤선도 저, 이형대 외 옮김, 앞의 책, 557쪽.
14) 연화방은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이며, 명례방은 명동 일대이다. 명동성당 정문 건너편 대로변에 ‘윤선도 선생 집터’라는 標碑가 세워져 있다. 윤영표, ????녹우당의 가보????(1988), 45쪽.
15) 안승준, 「16‒18세기 해남윤씨가문의 토지·노비 소유실태와 경영」, ????청계사학???? 6(한국 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89), 175쪽.
16) 「고산연보」, 윤선도 저, 이형대 외 옮김, 앞의 책, 557‒558쪽.
17) 위 「고산연보」에는 7월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으며 8월에 별시 초시에 입격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8월에 응시한 시권에 ‘居京’으로 기록되어 있어 낙향한 시기와 맞지 않는다. 「고산연보」, 위의 주와 같음.
18) 서울의 동부 연화방·중부 명례방 등에 가사를 소유하고 있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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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42세 되던 1628년(인조 6)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에 제수되고, 공조좌랑·호조정랑 등을 겸하던 윤선도는 나이 46세 되던 1632년(인조 10)에 직을 모두 사임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19) 그리고 그이듬해인 1633년(인조 11)에 47세의 나이로 증광별시에 급제하였는데, 위의 마지막 시권이 이에 해당한다. 증광별시는 해남으로 돌아온 이듬해에 치렀으므로 거주지를 해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윤선도의 아들 윤인미이다. 윤인미는 아버지인 윤선도가 젊은 시절을 보낸 서울 명례방에서 1607년(선조 40)에 태어났다. 이후 윤인미의 거주지는 표1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윤선도의 행적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1630년(인조 8) 시권까지 거주지가 서울로 되어 있고, 1633년 이후 3건의 시권은 모두 해남으로 되어 있다. 윤선도가 1632년에 해남으로 내려갔으므로, 윤인미 역시 같은 시기에 아버지를 따라가서 고향에서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윤선도의 손자 윤이석은 1654년(효종 5)부터 1666년(현종 7)까지 5건의 시권에 모두 거주지가 해남으로 되어 있다. 즉, 적어도 29세부터 41세까지 고향에서 지냈다는 뜻이다. 그 역시 아버지인 윤인미와 주거 궤적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윤이석의 경우 나이 50대 이후 서울에서 생활한 기록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그때 양자(養子) 윤두서가 그를 따라 함께 서울로 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표1의 마지막 부분에 수록된 윤두서의 시권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윤두서의 것으로는 유일하게 전하는 시권이다. 그의 나이 26세때 작성된 것으로, 거주지를 서울로 명시하고 있다. 즉, 윤두서는 양부(養 父) 윤이석을 따라 상경한 후 청년기를 서울에서 보낸 것이다. 그의호 중 하나인 종애(種厓)는 종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주지 주변 지명을 사용하여 호를 만들었다. 20) 종현은 서울의 중부 명례방에 있던 윤선도 생가의 소재지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남윤씨 집안의 시권에 기재된 거주지 정보를 가지고 그들의 거주 경로를 도출해보면 표2와 같다. 21) 표2에 기재한 지명은 해당 인물의
19) 「고산연보」, 윤선도 저, 이형대 외 옮김, 앞의 책, 557‒558쪽.
20) 박은순, ????공재 윤두서????(돌베개, 2010), 41쪽.
21) 연도와 지명은 시권이 작성된 시기와 해당 시권에 기록된 거주지이다. 그리고 각 시기에 거주한 인물을 장흥·서울·해남 지역으로 구분하여 서로 다르게 표시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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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 시권으로 본 윤씨 구성원의 거주 경로
1612 1623 1628 1630 1633 1654 1657 1661 1662 1663 1665 …… 1693
윤선도 장흥 서울 해남
윤인미 서울 서울 해남 해남 해남
윤이석 해남 해남 해남 해남
윤두서 서울
시권에 거주지로 밝힌 것이고, 시권과 기타 기록을 토대로 거주지가 추정되는 경우 이를 빈칸에 표시하여 서울과 해남·기타 지역을 구분하 였다.
그 결과 윤선도가 장흥에 잠시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 것을 제외하면, 서울과 해남에 비교적 장기간 거주했음이 드러난다. 특히 시권에 기재된 거주지 기록과, 전후 시권의 시간적 간격 등을 토대로 표시해본 결과 윤선도 ‒ 윤인미 부자(父子), 윤인미 ‒ 윤이석 부자, 윤이석 ‒ 윤두서 부자 등이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 거주한 궤적이 그려진다. 대체로 아버지를 따라 상경 또는 낙향하는 패턴임을 알 수 있다.
2)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의 소지(所志)와 불망기(不忘記)에서
시권 외의 고문서에서도 표3과 같이 윤씨 가계 구성원의 거주지 정보를 수록한 사례가 있다. 17세기 시권이 보여준 거주지 정보에 이를 덧붙이면 거주지 변동 상황을 보다 세밀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표3은 소지(所志)와 불망기(不忘記)에 거주지를 밝힌 사례만 뽑아본 것으로 윤선도·윤두서 등의 거주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22) 윤선도·윤 두서는 표1에 제시한 바와 같이 시권을 통해서도 거주지 이력을 파악할수 있었다. 그런데 표3의 이력은 표1과 시기가 맞물리지 않으므로, 그들의 거주지 이력을 보완하고 더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시권은 1633년까지 윤선도의 거주지 정보만 준 반면, 소지·불망기는 1660년(현종 1)과 1661년(현종 2)의 거주지 정보를 준다. 또 윤두서의 1693년 거주지 정보를 준 시권에 이어, 표3은 1700년대 초반의 거주지 정보를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표3을 통해 1660년대부터 1710년 전후한 시기까지 50여 년간의 거주지 변동을 알 수 있다.
22) 표3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에 수록된 청원서류 문서 중 거주지와 발급 자를 밝힌 경우만을 대상으로 작성한 것이다.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83
No 문서 유형 작성연도 발급자 문서에 기재한 발급자명 수취자 내용
1 소지 1660 윤선도 양주 사는 윤참의댁 호노 산복 衿川官主 奴 양처병산 소생을 둘러싼 소유권 다툼
2 소지 1660 윤선도 양주 사는 윤참의댁 호노 산복 형조 노 말룡과 양처 안심의 소생을 둘러싼 소유권 다툼
3 소지 辛丑 1661 윤선도 삼수군 謫居 윤참의댁 노 립 兵使道 奴娶良女 소생 奴가 良役에 자원한 것에 대한 해결 요청
4 소지 丙戌 (1706) 윤두서 남부 명례동 윤진사댁노 을룡 掌隷院 贖身한 노비 2구 斜給 요청
5 불망기丙戌 (1706) 윤두서 경중 윤진사댁 노 득렴 영광 거주 司果 梁以濟 영광 거주 노비 방매 후 奴婢價 일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 확인
6 불망기丙戌 (1706) 윤두서 사과 양이제 京中 윤진사댁노 득렴 노비 매입 후 奴婢價 일부를 내년 3월까지 내겠다는 확인
7 소지 己丑 (1709?) 윤두서 과천 사는 윤진사댁 묘직노 일립 廣州使道 哨軍으로 被定된 것을 풀어달라는 청원
표3 -- 소지와 불망기에 명시한 거주지
먼저 일련번호 1‒3까지 3건의 소지는 ‘윤참의댁’ 노(奴) 명의로 작성한 것이다. 윤참의는 윤선도를 지칭한다. 윤선도는 1652년(효종 3)에 66세의 나이로 예조참의에 제수되었고, 1658년(효종 9)에는 72세로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23) 이 때문에 그를 윤참의로 지칭하고, 연동 윤씨 종가를 윤참의댁으로 칭한 사례가 많다. 윤참의댁 노 이름으로 작성된 3건의 소지는 1660년에 윤선도가 양주에 살았고, 이듬해인 1661년에는 삼수에서 유배생활을 했음을 보여준다. 「연보」에 따르면 윤선도는 1659년에 첨지에 제수되어 효종의 산릉을 간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러나 윤선도가 추천한 수원이 산릉으로 채택되었다가 취소되면서 파직되었고, 이듬해 2월에 고산에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24) 그러므로 1660년 2월에 돌아왔다는 고산이 바로 양주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5) 그
23) 1652년 8월에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11월에 原平府院君 元斗杓의 비리를 논한 상소 때문에 삭탈관직되어 해남으로 돌아왔고, 1658년 3월에 공조참의에 제수되 었으나 4월에 소를 올려 체직하고 고산에 머물렀다. 「고산연보」, 윤선도 저, 이형대외 옮김, 앞의 책, 560‒561쪽.
24) 「고산연보」, 위의 책, 561쪽.
25) 고산이 양주를 지칭한다는 것은 이미 윤승현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尹承鉉, ????孤山尹 善道硏究‒孤山村 발견과 고산연구를 위한 기초자료‒????(홍익재, 1999), 3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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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윤선도는 1660년 4월에 인조 계비의 복제 문제와 관련하여 삼년설을 주장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함경도 삼수군에 안치되었다. 26) 위의 소지 3건은 장흥·서울·해남에 이은 윤선도의 거주지 이전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양주·삼수라는 거주지 기록은 「연보」 등 다른 사료와 일치한다.
표3 중 일련번호 4‒7까지의 4건은 모두 윤두서의 노명(奴名)으로 작성 되었거나, 윤두서의 노가 수취인으로 설정되어 있는 문서이다. 2건은 소지이고 2건은 불망기인데, 작성연대는 병술·기축 등 간지로만 표기하 였다. 이 중 병술년에 작성된 3건은 공통적으로 상전(上典)을 ‘윤진사’로 쓰고 있다. 윤두서가 진사시에 합격한 1693년 이후에 작성된 문서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4번 문기에서 ‘남부 명례동 윤진사’라고 칭한 것에서 윤두서임이 명확해진다. 즉, 전술했듯이 명례동은 윤선도가 윤유 기의 양자가 되어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며, 아들 윤인미를 낳은 곳이다.
윤인미의 아들 윤이석 역시 명례동에 거주하였다. 표1의 시권 분석에서 윤이석의 40세까지의 거주 이력은 해남으로만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윤이석은 그 이후인 1678년(숙종 4)에 53세의 나이로 이산현감에 임명되 었다. 또 그로부터 2년 후인 1680년에는 노모와 자신의 병(病)을 이유로 이산현감의 면직을 요청하였다. 면직이 허락된 후 그는 해남으로 간것이 아니라 가솔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27) 그 후 사복시 주부, 한성부 판관, 종친부 전부 등의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윤이석이 서울로 이주할 당시 윤두서의 나이 13세였다. 윤이석은 윤두서 등 가속을 이끌고 다시 자신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명례동으로 돌아왔다. 윤두서 역시 부친을 따라와 생활하게 되면서 부 ‒ 자 2대가 거주지 궤적을 함께하는 양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윤이석이 사망하자 그들은 명례동을 떠난다. 윤이석이 아우인 윤이후가 쓴 ????지암일기????에는 윤이석의 사망과 사망을 전후한 시기 그 가족의 거주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몇 군데 나와 있다.
a) 오후에 會洞의 인편이 왔는데, 전부(典簿) 형님이 宿疾로 1월 24일에 별세했다고 한다. 통곡하고 통곡한다. 지난 가을에 風漸 증세가 가볍지 않다고 듣고 상경하여
26) 「고산연보」, 윤선도 저, 이형대 외 옮김, 앞의 책, 561쪽.
27) 박은순, 앞의 책, 41쪽.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85
문안드렸는데, 풍점이 아니라 氣와 血이 모두 다해서 그런 것이었다. …… 28)
(1694년 2월 4일)
b) 형수님 댁의 奴가 서울에서 돌아와 9일에 보낸 여러 아이들의 안부편지를 받았다. 會洞의 典簿宅 집을 팔고 齋洞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29) (1694년 10월 18일)
a)에서 형님은 전부 윤이석을 가리킨다. 따라서 회동의 30) 인편이란 윤이석의 집에서 온 심부름꾼을 말한다. 윤이후는 형님인 윤이석의 사망 소식을 열흘 만에 전해 들은 것이다. 31) b)는 윤이석이 세상을 떠난 후이므로, 형님 댁이 아니라 형수님 댁 노(奴)로 심부름꾼을 지칭하고 있다. 노가 와서 서울 소식을 전했는데, 전부댁이 회동 집을 팔고 재동으로 32) 이사했다는 내용이다. 즉, a)와 b)를 토대로 윤이석이 만년에 가족을 거느리고 서울 회동에 살았으며, 그가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은 회동 집을 팔고 재동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윤두서의 노명으로 작성된 4건의 문기 중 7번 문기만 기축년에 작성되어 앞의 3건과 작성연대가 다르다. 이 문서는 윤진사를 과천에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과천에 사는 윤진사 역시 윤두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윤두서의 초배(初配) 전주이씨가 과천현감이 었던 이현기의 여동생이었는데, 이를 인연으로 1685년(숙종 11)에 과천현 감의 관사에서 장남 윤덕희를 낳기도 하였다. 33) 그런데 문제는 ‘기축’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문서의 작성연대이다. 기축년은 1709년(숙종 35)으로, 이현기의 여동생이었던 첫 부인이 1689년(숙종 15)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미 20년이 지난 시점인 것이다. 윤두서는 첫 부인 사망 후 이형징(李衡
28) “午後會洞便來到 典簿兄主以宿疾正月二十四日別世 痛哭痛哭 去秋?聞以風漸症勢非輕 及至上京拜候 則非風漸也 乃氣血俱盡所致也……”[윤이후, ????지암일기????, 1694년 2월 4 일(壬申), 한국학중앙연구원 MF 35‒3117] (※ ?는 원문서 마멸로 MF 필름상에서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 글자임).
29) “嫂主宅奴自京還得諸兒初九出平書 會洞典簿宅家舍斥賣 移寓於齋洞云”[윤이후, ????지암 일기????, 1694년 10월 18일(壬子), 위의 주와 같음].
30) 회동은 명례방에 위치한 지역이다. 박은순, 앞의 책, 112쪽.
31) 당시 윤이후는 영암 팔마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기의 시작 부분에 ‘在八馬’라고 명기되어 있다.
32) 재동은 북쪽으로 嘉會洞, 동쪽으로 桂洞, 남쪽으로 慶雲洞, 서쪽으로 安國洞과 접해 있는 곳이다. 조선초기까지 한성부 북부 가회방이 있었고, 1751년(영조 27)에는 嘉會 洞契가 재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33) 이내옥, 앞의 책,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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徵) 의 딸을 계배(繼配)로 맞이하였다. 이형징 역시 본관은 전주인데, 그 집안은 인천에 세거(世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4) 윤두서는 첫째 부인이 사망한 후에도 그 오빠인 이현기와 계속 교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과연 이현기와의 교분 때문에 1709년 기축년에 과천에 거주한 것이 맞는지 정확히 판단이 되지 않는다. 35)
표1과 표3에 수록된 시권·소지·불망기를 통해 윤씨 가계 구성원들의 서울·해남, 그리고 과천·양주 등에서의 거주가 확인되었다. 그중 17세 기부터 18세기 초까지는 거주의 중심이 서울과 해남에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는 종가 구성원들이 자리 잡은 명례방을 중심으로 윤선도의 생가가 있던 연화방과, 윤이석 사후 그 가족들이 옮겨간 가회방 등으로 생활 영역이 마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윤이후의 가족이 맹교, 묵사동 등에 거주하는 등 가족·친지들이 서울에 다양하게 포진한 가운데 서울에서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36)
Ⅲ. 가사 조달과 경영
1. 가대( 家代)· 가사( 家舍) 의 상속과 흐름
윤씨 가계 구성원들이 다양한 지역에 거주한 이력이 있으나 지속적으로 거주가 이루어진 곳은 서울과 해남 지역임을 살펴보았다. 이들이 해남에서 서울로 이주한 경우는 관직생활을 위한 단신 부임이나 단기간의 거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가솔을 거느리고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관직과 무관하게 서울에 이주하는 등 일정 시기까지는 서울 거주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물론 같은 시기 고향인 해남에서는 토지를 개간·매
34) 위의 책, 50쪽.
35) 이 밖에도 어의동 윤생원의 노명으로 작성된 소지가 4점 있다. 이 역시 17세기 후반경에 작성된 문서로 보이나, 윤생원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즉, 병진년 (1676)과 정사년(1677)에 작성된 문서이나, 이 시기 생원은 윤인미 외에는 찾을 수없다. 하지만 윤인미의 경우 이미 1662년에 문과에 급제했기 때문에 생원으로 지칭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윤씨 일족 중 누군가가 그 시기 어의동에 거주했고, 그 문서가 종가에 보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니면 干支가 잘못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36) 앞의 ????지암일기????에 昌緖가 墨寺洞으로부터 宗緖의 盲橋 寓舍로 이사하여 같이 살고 있음이 언급된다. 윤이후, ????지암일기????, 1696년 5월 15일(庚午).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87
득하면서 해남에서의 사회 경제적 세력 확장을 동시에 꾀하고 있었다. 37)
이렇게 서울과 해남, 그리고 그 외 다른 지역까지 다원적 거주가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각 지역에서의 가사 조달 방식에 관한 것이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의 현황은 이 집안의 재산상속 문기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표4는 해남윤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 분재 문기 중 가사를 상속한 내역이 수록된 것만 뽑은 것이다. 별급(別給)이나 승중조(承重條)로 한채의 가사(家舍)를 특별히 증여한 경우는 제외하고, 자녀들에게 균분 상속의 개념으로 노비·전답처럼 가사 또는 가대를 분할해준 사례만 뽑았다. 가사의 상속 사례는 3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계의 가사·가대 상속 내역으로서 3건은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596년에 작성된 <윤의중 자식 3남매 화회문기> 이다. 38) 윤의중의 적자녀 3남매가 부모의 재산을 화회분집한 문기이다.
상속인은 윤유심·윤유기 형제와, 그들의 누이인 윤공(尹鞏)의 처(妻) 등 3명이다. 이 중 윤유기는 후사가 없는 백부(伯父) 윤홍중에게 출계(出 系) 하였으나, 윤의중 사후(死後) 윤유심과 함께 생부(生父)의 재산을 상속 받은 것이다. 39) 그들은 균분 원칙에 의거하여 부모의 재산을 분할 상속하 였는데, 노비·전답과 함께 가사가 상속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로 가사를 상속한 분재기는 다음 대(代)인 <윤유심 자식 3남매 화회문기
표4 -- 가사를 상속한 분재 문기
작성연대 財主 상속인
1596 윤의중 2남: 윤유심, 윤유기 1녀: 尹鞏
1615 윤유심 2남: 윤선언, 윤선도 1녀: 김응복
1619 윤유기 妻父 2남: 具旭, 具昶 2녀: 윤유기, 姜翊 기타: 孼女 1명
37) 필자는 다른 논문에서 이를 가리켜 정치적 지향은 서울에 두고, 사회 경제적 지향은 해남에 두었다고 표현한 바 있다. 문숙자, 「17‒18세기 海南尹氏家의 토지 확장 방식과 사회·경제적 지향」, ????고문서연구???? 40(2012), 40‒41쪽.
3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 142‒147쪽.
39) 도1의 가계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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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이다. 40) 상속인은 모두 3명으로 사위 김응복과 장남 윤선언, 차남 윤선도이다. 여기서는 윤선도가 생부 윤유심으로부터 출계하여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간 상태에서 생가의 재산상속에 참여하고 있다. 41)
세 번째 분재기는 <윤유기처 능성구씨 남매 화회문기(1619)>이다. 42)
즉, 윤선도의 양부 윤유기가 처가의 재산상속에 참여하여 처부모의 재산을 분할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상속인은 아들 2명과 사위 2명, 그리고 얼녀 1명인데, 윤유기는 이 집안의 맏사위였다. 실질적인 재산분할은 1600년에 이루어졌지만, 1619년에야 정식으로 분재기를 작성하였다. 43)
따라서 문서 작성 시점에는 상속인 4명이 모두 사망하였거나, 다른 사정으로 참석지 못하고 배우자 또는 자식이 대리인으로 참석하였다.
윤씨가에서는 윤유기를 대신하여 아들인 윤선도가 참석하였다.
먼저 1596년에 작성된 <윤의중 자식 3남매 화회문기>의 가사 및가대 상속 내역은 표5와 같다. 표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분재 문기에는 상속인을 택호(宅號)로 표기하고 있다. 옥천댁(沃川宅)은 장남 윤유심을, 첨지댁(僉知宅)은 차남 윤유기를, 그리고 별좌댁은 사위 윤공을 가리킨다.
이들 3남매는 각기 가대(家代) 한 곳과 가사 1좌(坐)씩을 나눠 가졌다.
가대는 모두 서울에 있는 것으로 장남은 승중조 명목으로 연지동 가대를, 차남은 어의동 가대를, 그리고 사위는 마포 가대를 상속하였다. 이는이 상속이 이루어진 16세기 후반에 이미 윤씨 가계가 서울 곳곳에 가대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가대가 모두 서울에 소재한 것과 달리 이때 상속한 가사는 세 곳 모두 지방에 소재하고 있다. 장남은 해남 백련동 가사를, 차남은 남양에 있는 와가(瓦家)를, 그리고 사위는
표5 -- 1596년 가사·가대 상속 내역
상속인 家代 家舍
沃川宅(윤유심) 蓮池洞 家代(승중조) 해남 白蓮洞 家舍 1坐
僉知宅(윤유기) 於義洞 家代 남양 亇 道 소재 瓦家 12間 (空代 포함)
別坐宅(尹鞏) 麻浦 家代 장흥 瓦家 1坐
4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 150‒152쪽.
41) 도1의 가계도 참조.
4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 156‒159쪽.
43) “右文爲 祖上田民往在庚子年五月已爲和會平均分衿 而有故遷延未成文記矣 今因當時 草記 寫完文記事”(<윤유기처 능성구씨 남매 화회문기(161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 156쪽).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89
장흥에 있는 와가를 상속하였다. 해남 백련동은 윤씨 종가 소재지이므로이 주변에 가대나 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된다. 또 장흥은 모변 전답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곳이었으므로 그런 연고로 와가를 소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양 소재 가사와 가대 역시 모변 또는 다른 전래 경로로 이 집안에 유입된 재산으로 추측된다. 이 중 장남에게 해남에 있는 가사를 상속하고, 차남과 사위에게는 다른 지역에 있는 가사를 상속한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종가 주변 재산을 장남 계열로 계승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표6은 두 번째 분재 문기인 <윤유심 자식 3남매 화회문기(1615)>의 가대와 가사 상속 내역이다. 이 분재 문기에도 역시 상속인을 택호로 표기하였다. 첨지댁은 사위 김응복을, 생원댁은 장남 윤선언을, 진사댁은 출계한 차남 윤선도를 지칭한다. 윤선도는 1612년(광해군 4) 2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이 재산상속이 이루어진 1615년은 문과급제 이전이므로 그의 택호가 진사댁이 된 것이다. 44)
가사 상속 내용을 보면 표5에서 살펴본 전대(前代)의 상속 내용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즉, 전대에 가대와 가사를 각 한 군데씩 상속한 것과 달리 이번 상속에서는 가대 위주로 상속이 이루어졌다. 사위 김응복은 서울 동부와 장흥에 있는 가대 각 한 군데씩을 상속하였다. 재주(財主) 윤유심은 표5에서 보듯이 1596년에 서울 연지동 가대를 상속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사위 김응복이 상속한 서울 동부 소재 가대는 그것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윤유심이 상속한 연지동 가대는 승중조 명목이었고, 사위가 균분 상속을 받는다 하더라도 아들을
표6 -- 1615년 가사·가대 상속 내역
상속인 例分 承重條
僉知宅 (김응복) 서울: 東部 越邊 路傍 家代 장흥: 新基 家代
生員宅 (윤선언) 해남: 白蓮洞 家代 承重條: 芮慶禧에게 買得한 蓮池洞 家代 外邊承重條: 傳來한 倉洞 家代
進士宅 (윤선도) 서울: 家舍一座 尹安中에게 買得한 蓮池洞 家代
44) 윤선도가 문과에 급제한 것은 1628년(인조 6)이다. 「고산연보」, 윤선도 저, 이형대외 옮김, 앞의 책, 5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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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쳐두고 승중조를 상속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씨는 서울에서 가대를 계속 확장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가 받은 또 한 곳의 가대 역시 분재기에는 ‘신기(新基) 가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장흥에 소재한 것으로, 장흥 소재 토지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윤유심 형제의 외가 쪽에서 전래한 것이다. 내외변 가리지 않고 연고가 있는 지역 곳곳에 가대를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대의 확장은 상속을 통해 후손들의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타 가문보다 상속 문기에서 훨씬 광역의 가대나 다수의 가사가 발견되는 것은 이런 노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장남 윤선언은 해남 백련동의 가대를 받았다. 다시 앞에 제시한 도1을 참조해보자. 윤효정‒구‒홍중‒유기‒선도로 이어지는 계열이 큰 종가 계열이고, 홍중의 아우인 의중‒유심‒선언으로 이어지는 계열은 지차(之 次) 에 해당한다. 지차 계열인데도 장남 윤선언이 백련동 가대를 상속함으 로써 종가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윤선언은 장남이므로 승중조도 받았는데, 새로 매입한 서울 연지동 소재 가대를 받았다. 또 외변 승중조도 받았는데, 외가의 제사를 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외손봉사를 행한 것이다. 외변 승중조로 받은 가대 역시 서울에 있는 것으로, 이전부터 전래된 것이다. 이로서 윤선언은 해남 연동 가대와, 서울 두 곳의 가대를 상속받게 되었다.
차남 윤선도 역시 서울 소재 가대를 받았다. 그가 받은 가대는 서울 연지동에 소재한 것으로 이 역시 다른 사람으로부터 매득한 것이다.
윤선도는 전술한 바 있듯이 연지동에서 태어나 백부에게 양자로 입양되면서 명례방 쪽으로 이주하여 생활했는데, 다시 생부로부터 연지동 가대를 상속한 것이다. 그리고 윤선도는 다른 2명의 형제와 달리 가사 1채도 상속하였다. 장남도 아닌 윤선도가, 그것도 생가로부터 나와서 백부를 입후한 상황에서 가사를 추가로 상속한 이유는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가 상속한 가대가 다른 형제의 것보다 규모가 작아 가사로 보상받은 것이거나, 윤선도에게 더 우대 상속할 만한 사유가 있어서 가사를 더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윤선도는 우대 상속을 하지 않아도 이미 재산상속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이미 점하고 있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가(生家)로부터 재산을 상속한 데다가, 양가(養家)에서의 재산상속이 추가될 것이 분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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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다. 현재 양부모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은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아들이 없어 입양을 통해 계후를 완성한 경우, 상속 관행상 양가로부터의 재산상속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출후(出后)한 이후 생가의 재산상속에서 다른 형제들과 동등한 상속권을 준 해남윤씨 집안의 재산상속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표5의 상속에서도 차남 윤유기는 생부 윤의중의 재산을 동복(同腹) 남매와 함께 상속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윤씨 집안의 전통이 다음 대(代)의 윤선도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표4의 세 번째 분재기는 윤유기가 처부모인 구운한(具雲翰) 부부의 재산을 처가의 다른 상속인과 함께 상속할 때 작성된 것이다. 분재 문기는 모두 여섯 항목으로 상속 내역을 기재하고 있다. 봉사조와 4명의 적자녀, 그리고 1명의 얼녀에 대한 상속 내역이다. 이 여섯 항목 중얼녀 몫을 제외한 다섯 가지 항목에 각각 와가 1채씩이 포함되어 있다.
즉, 봉사조와 4명의 적자(嫡子) 몫으로 각각 와가(瓦家)가 상속되어 모두 5채의 와가가 분할 상속된 것이다. 해남윤씨 가계와 비슷한 시기에그 사돈가 역시 자녀들에게 가대 혹은 가사를 분할 상속하면서 경제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윤유기의 사망을 앞두고 그의 양자가된 윤선도가 참석한 것으로 보아 이때 상속한 와가는 자연스럽게 윤선도 에게 승계되었을 것이다. 당시 상속한 와가는 서울 중부(中部) 정선방(貞善 坊) 에 있는 것이었다.
<1596년> <1615년>
윤의중 윤유심 연지동 가대(승중) 백련동 가사 윤선언 연지동 가대(승중) 백련동 가대 창동 가대(외변 승중)
윤유기 어의동 가대 남양 가사 윤선도 연지동 가대 연지동 가사 ←[생부 윤유심]
어의동 가대 남양 가사 ←[양부 윤유기]
중부 정선방 가사 ←[외가(1619년)]
도2. 16세기 후반 -- 17세기 초반 윤씨 가계의 가사·가대 흐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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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3건의 상속 사례에 나타난, 윤의중에서 윤선도까지 3대에 걸친 가사·가대의 흐름은 도2와 같이 정리된다. 단, 도2의 대상은 사위를 제외하고 윤씨 가계의 가사·가대가 아들로 이어진 경우만으로 한정하였 다. 사위에게 간 재산은 또 윤씨가로 계승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가사·가대가 승계된 것은 서울과 해남이며, 남양은 가사만 승계되었 다. 같은 시기 구성원들의 거주의 중심이 서울과 해남이었던 것처럼, 주거와 관련된 재산인 가사·가대 역시 서울과 해남을 중심으로 상속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서울은 동부 연지동이 중심이 되면서 어의동이 가세했고, 해남은 현재 종가가 있는 백련동이 가대와 가사 상속의 핵심 지역이었다. 특히 서울 연지동의 경우, 윤유심‒윤선언으로 이어지는 계열에서 승중조로 확보한 가대가 모두 이 지역에 있다. 또 윤선언의 친동생이지만 윤유기의 양자가 된 윤선도 역시 연지동 소재 가대를 상속하고, 이를 자신의 장남인 윤인미에게 상속하였다. 윤선도가 윤유기의 양자가 되면서 동부 연화방에서 남부 명례방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윤선도와 그 후손의 생활 영역이 명례방 쪽으로 완전히 옮겨졌다고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윤유심·윤유기 형제 모두 그 후손에게 계속 연지동 가대를 상속함으로써 귤정공(橘亭公) 윤구(尹衢)의 후손이라면 어느 계열이든 연지동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윤유심·윤 유기 두 계열 모두 연지동 가대를 상속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매득을 통해 연지동 가대를 확장하고 있음을 표5와 표6에서 확인할수 있다. 윤인미가 아버지 윤선도로부터 상속한 연지동 가대가 무려 500여 칸에 달하게 된 것은 상속받은 가대에 매득한 가대가 합쳐진 결과로 추측된다. 45)
그런데 윤선언·윤선도 형제 이후로 그 다음 대부터는 선대(先代)에서와 같은 가대·가사 상속은 찾을 수 없다. 즉, 상속인 전원에게 가사나 가대를 동등하게 상속하려는 경향은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분재 문기상의 재산 항목은 노비·토지만으로 일관하게 되었다. 다만 윤선도 부부의 재산을 자녀들이 상속하면서 작성한 <윤선도 자식 5남매 화회문기
45) 1673년에 윤선도의 자식들이 화회분집한 분재기에는 윤인미, 즉 正字宅 몫으로 “ … 代 京中蓮花坊家代五百間”이 수록되어 있다. 앞부분이 마멸되어 확인이 어려우나 소재처 불명의 가대와 서울 연화봉 소재 가대 500칸이 확인된다. <윤선도 자식 5남매 화회문기(167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 171‒175쪽.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93
(1673)>에서 가대와 가사가 장남 윤인미에게 단독 상속되고 있다. 46)
이는 17세기 중엽 이후 균분 상속이 점차 와해되는 분위기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가사나 가대는 승중을 전제로 장남 등 특정인에게 상속하는 특수 상속물로 그 성격이 바뀌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경우 윤선도의 조부(祖父) 대(代)인 16세기 후반부터 윤선도가 재산을 상속받은 17세기 초반까지 서울에 여러 군데의 가대와 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가대·가사를 자식들에게 상속하는 동시에 매득을 통해 그 규모를 더욱 확장해나갔다. 윤선도의 증손(曾孫) 또는 현손(玄孫) 대까지 윤씨 가계가 서울에 상당 기간 동안 가솔을 거느리고 거주하면서, 주변에 포진한 가족·친지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2. 매득과 정착, 그리고 별업( 別業) 구축
윤씨가가 균분 상속을 시행하는 중에도 가대·가사의 규모가 증가한 것은 상속 외에 적극적인 매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상속 대상물로서 언급된 가사나 가대의 소종래(所從來)로 ‘매득’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매득이 재산 형성에 기여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윤씨 집안에 보관된 수백 점의 매매문기는 노비와 토지 매매 사례만 보여줄 뿐, 가사를 매입한 사례는 다음의 2건이 전부이다.
표7은 매매문기에서 확인되는 윤씨가의 가사 매입 사례이다. 하나는 윤선도의 아들 윤인미가 자신의 노 애순 명의로 백련동 소재 와가 5칸을 매입한 것으로 47) , 이때 가사를 성조(成造)할 수 있는 가기(家基)도 함께
표7 -- 윤씨가의 가사 매입 현황
시기(년) 매입자 문서상 매입 명의 방매인 매입물 가격
1657 윤인미 윤별좌댁 노 愛順 幼學 崔坤望 白蓮洞 瓦家5間 家基 牟種 2斗落 木 2同
1680 윤이석 尹尼山宅 노 洪烈 水軍 姜千白 白蓮洞 瓦家10間 海南一道 소재 畓 9斗落 木 60필
46) <윤선도 자식 5남매 화회문기(1673)>, 위의 책, 171‒175쪽.
47) 윤별좌는 윤인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별좌 벼슬을 역임한 데에서 비롯된 호칭이다.
애순은 그의 戶奴로 이 매매문기 외에도 애순 명의로 토지를 매입하여 작성한 매매문기가 다수 남아 있다. <가옥문기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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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입하였다. 그다음 사례는 윤인미의 아들 윤이석이 백련동 소재 와가 10칸을 매입한 것이다. 48) 앞에 언급했듯이, 윤인미는 1673년의 재산상속 에서 서울 연화방 소재 500칸 가대를 상속한 바 있다. 이와 비교하면 윤인미와 윤이석이 매입한 백련동 가사의 규모는 매우 보잘것없는 수준이 다. 다만 윤선도는 물론이고 그의 아들·손자에 이르기까지도 오랜 기간 서울살이를 하던 시기에 해남 백련동 주변에 가사를 매입해두고 있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는 윤인미 때에 본격화되는 해남 인근의 토지 매입과 궤를 함께하는 것으로 49) , 윤씨 일가가 서울 관직생활에 그치지 않고 해남에서의 경제적 기반을 확장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2를 다시 관찰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1596년 분재 문기에 이미 윤씨 집안은 백련동 소재 가사를 한 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장남 윤유심이 상속한 것으로 나온다. 또 그다음 대인 1615년 분재 문기에는 백련동 가대가 나오며, 이것을 윤유심의 장남 윤선언이 상속하였다. 즉, 백련동은 윤효정 → 윤구 → 윤의중 → 윤유심 → 윤선언 으로 이어지는 차남 계열로 가사와 가대가 세전(世傳)되었고, 여기에 윤효정 → 윤구 → 윤홍중 → 윤유기 → 윤선도로 이어지는 장남 계열이 매득을 통해 백련동의 가사 확보에 가세하는 양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씨가의 경우 윤의중의 아들 윤유기가 윤홍중을 계후하고 다시 윤선도가 윤유기를 계후하는 등 출후와 입후가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윤홍중계와 윤의중계는 실질적으로 계열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서로 양자(養子)의 공급원 역할을 하면서 가계를 계승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자(長子)와 차자(次子)의 후손들이 모두 백련동에 가사와 가대를 상속 또는 매득하면서 백련동에 세거할 수 있는 공간적 기반을 마련해나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가사 상속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여타 가문들처럼 점차 장남을 중심으로 세전(世傳)되는 방식 으로 변화하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48) 윤이산은 윤이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이산현감을 제수받은 적이 있으므로 그를 지칭하는 別號가 되었다. 洪烈 역시 戶奴로서 윤씨가의 매매문기나 소지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가옥문기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 367쪽.
49)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해남윤씨 집안의 토지 매입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윤인미 때가 가장 집중적으로 토지를 확장하는 시기이다. 문숙자, 앞의 논문, 43쪽.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95
한편 가족과 함께 세거할 목적은 아니지만 거주지와는 별도로 가대를 매득하여 정사(亭舍)를 건립하고 별업(別業)을 구축하는 사례도 볼 수있다. 윤선도의 손자인 윤이후가 죽도(竹島)에 별업을 마련하고 그곳에 정사를 짓는 등의 활동을 한 내역을 그의 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해남(海南)의 남쪽에 화산(花山)이 있고 화산 아래에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양이 누운 소와 같고 동서로 300보(步)가 채 되지 않으며 남북으로는 겨우 100여 보(步)이다.
예부터 온 섬에 대나무가 무리지어 나 있으니, 섬 이름을 죽도(竹島)라고 한 것은이 때문이다. 지난 경인년(1650 ‒ 필자)에 창녕 성씨 성준익(成峻翼) 공(公)이 처음으로 섬의 동쪽과 서쪽 모퉁이에 제방을 쌓아 육지와 연결된 땅으로 만들어 섬의 남쪽 기슭에 거처했다. 그 뒤 38년이 지난 정묘년(1687 ‒ 필자)에 큰 흉년이 들자 성(成) 공(公)이 이를 팔아 구명(救命)하고자 하기에, 내가 육지의 땅과 바꾸었다. 성 공은 서울의 명망 높은 집안 출신인데, 이곳까지 흘러와 살며 우리 집안사람인 윤상은(尹相 殷)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죽도는 원래 윤상은의 소유였다가 성 공이 장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것이 흘러 흘러 마침내 나에게 귀속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물엔 각기 주인이 있는 법’이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 50)
이 인용문은 윤이후의 ????지암일기????에 수록된 <죽부초려기> 중 일부이 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그는 해남 남쪽의 죽도 땅 일부를 성준익으로부터 매득(買得)하였다. 이 땅은 원래 해남윤씨 일가인 윤상은의 소유였다.
그런데 윤상은이 이를 데릴사위 성준익에게 주었고, 성준익이 그곳에 제방을 쌓고 거처하다가 38년 후인 1687년에 윤이후에게 넘긴 것이다.
그해에 흉년이 들자 사정이 어려워진 성준익이 윤이후가 소유한 육지의 농장과 이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거래가 성사된 모양이다. 양반가에서 상속을 통해 토지를 확보한 후 제방을 쌓고 이를 경영하다가 흉년으로 인해 다시 매매하는 일련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윤이후는 그곳을 죽도 별업 또는 별서(別墅)라 칭하였다. 제언을 보수하고 직접 관리하였으며 51) , 그곳에 정사(亭舍)를 지을 계획을 세우고 터를 닦고자 하였다. 52) 그러나 흉년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자 정사를 지으려던 계획을 보류하고, 우선 초당을 지어 정사를 짓기 위해 왕래할 거점으로 삼기로 하였다. 53) 초당의 터를 닦고 안쪽의 벽을 바르는 등의
50) 윤이후, <竹阜草廬記>, ????지암일기????, 1695년 12월 4일(壬辰).
51) 윤이후, ????지암일기????, 1692년 3월 19일(戊辰).
52) 윤이후, ????지암일기????, 1695년 9월 4일(癸亥).
53) 윤이후, ????지암일기????, 1695년 10월 4일(癸巳).
96 정신문화연구 제39권 제4호
과정을 노(奴)를 동원하여 직접 수행한 끝에 54) , 두 달여 만에 세 칸짜리 초당을 완성하였다. 윤이후는 이를 초당 혹은 초려라 지칭하고 있는데, 자신이 직접 <죽부초려기>와 시문을 지어 기념하기도 하였다. 55) 뿐만 아니라 진도에 유배 중이던 정유악(鄭維岳)이 <죽도서기(竹島序記)>를 지어 보냈고 56) , 여러 학자들로부터 죽도에 관한 시문을 차운(次韻)해 받고 이를 <죽도창수(竹島唱酬)>로 엮으면서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57) 윤이후가 구축한 것은 가솔들이 편안히 거처하고 대대로 승계할 목적의 가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속받은 토지를 교환하고, 이를 토대로 정사나 초당을 신축하는 것에서 볼 때, 가사의 건축도 이런 과정으로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윤이후가 자신의 노를 동원하여 제언을 구축(構築)하고 초당의 터를 닦는 데에서 보듯이, 자신이 소유한 노비 등 다양한 노동력을 동원하면 가사 신축 역시 가능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로, 연동에 있는 해남윤씨 종가 외에 백포 소재 윤씨 가사(家舍)를 들 수 있다. 현재 ‘윤두서 고택’으로 불리는 이 와가(瓦家)는 윤선도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두서가 매득과 해언전(海堰田) 개발을 통해 백포(白浦) 일대의 토지 확장에 주력할 때, 연동 종가와 백포를 왕래하며 지냈고 그 당시 이 집에 머무른 것으로 보인다. 윤이후가 죽도에 지은 초당과는 달리 이 와가는 규모를 갖춘 전형적인 반가라할 수 있다. 구체적인 가사의 신축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종가와 별도로 가사를 구축하여 얻은 결과물임은 분명하다. 이 가사를 비롯하여 백포 소재 토지와 산림 등의 자산은 연동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하나 18세기 중엽에 가계 구성원들이 완의(完議)를 작성하면서 종가 소유임을 재차 확인한 바 있다. 종손 윤덕희(尹德熙, 1685‒1766)를 비롯한 9형제가 1746년에 합의하여 작성한 완의가 그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백포에 있는 가대, 전답, 사면산의 산림 및 사면산 주위의 사전(私田) 등은 종가 소유였으나 윤덕희 대에 와서 재산이 영세해지자 그중 토지를
54) 1695년 10월 4일, 1695년 11월 11일
55) 윤이후, <竹阜草廬記>, ????지암일기????, 1695년 12월 4일(壬辰). <죽부초려기>에 자신을 ‘竹阜散人 支翁’이라고 썼다. 시문은 1695년 10월 21일, 1695년 10월 23일 일기에 수록 되어 있다.
56) <죽도서기>는 1696년 3월 12일 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57) 윤이후, ????지암일기????, 1696년 2월 14일(庚子).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97
분할하게 되었다. 하지만 분할하지 않은 제위전(祭位田), 우곡산(牛谷山), 두모포 자산, 초사동 방축 등은 여전히 연동 종가 소유임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58)
해남윤씨가는 17세기 초반 이전에는 서울의 곳곳에 가사를 상속하였으 나, 17세기 중엽 이후는 가사 상속이 줄고 점차 거주 기반을 해남과그 주변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해남과 그 주변 지역에 와가나 별업 등을 만들면서 거주 기반을 확장하는 반면 서울 거주는 점차 규모를 줄이거나 임시거주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특히 윤선도 때부터 그증손자인 윤두서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해남을 오가며 생활했던 것과 달리, 윤덕희가 가솔을 이끌고 해남으로 낙향한 이후는 서울에서 더이상 가사나 가대의 확장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윤덕희를 호주(戶主)로 한 준호구는 해남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발급되었다. 현재 표8과 같이 3건이 남아 있다.
표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윤덕희는 해남에 있다가 한때 상경하였으며, 다시 해남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서울 주소가 동부 건덕방이라는 사실이다. 윤씨 종가 구성원들은 서울에서 주로 남부 명례방 쪽에 거점을 잡고 있었으며, 윤선도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부 연화방에도 거점이 있었다. 그 밖에도 윤이석의 생가 동생인 윤이후와 그 자식들이 재동 일대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윤덕희는 종손이므로 명례방에 기거하거나, 윤선도가 생가·양가 양쪽에서 가사와 가대를 상속한 것을 인연으로 연화방 부근에 자리를 잡는 것이 자연스럽 다. 그런데 그는 건덕방계에 적을 두었을 뿐 아니라 위의 1738년 준호구에 호주 이름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59)
표8 -- 윤덕희의 호적
문서 종류 호주 작성연대 발급·수취자 주소
호적단자 윤덕희 1729 해남현 해남 현내 일도 제1 백련동리
준호구 윤덕희 1738 한성부 한성 동부 건덕방계
준호구 윤덕희 1765 해남현 해남 현일면 백련동리
58) <완의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1986), 453‒454쪽.
59) 위의 책, 35‒36쪽.
98 정신문화연구 제39권 제4호
‘東部 建德坊契 第十四統 第二戶 前承旨呂善長家代入幼學尹德熙 年五十四乙丑 生 本海南’
즉, 윤덕희는 동부 건덕방계에 있는 전(前) 승지 여선장(呂善長)의 집에 ‘대입(代入)’하고 있는 것이다. 임학성은 한성부 호적을 통해 시입(時 入)· 차입(借入)·세입(貰入) 등의 용어를 분석한 바 있는데, ‘대입(代入)’ 에 대해서는 ‘타인의 가옥에 대신 입주함’이라는 어의(語義)만 제시하였 다. 60) ‘대입’이 어떤 거주 형태를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자신이 매득하거나 신축한 것이 아닌 타인의 가사에 입주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서울에 더 이상 집을 소유하지 않거나 확장하지 않고 타인의 집에 임시거주 형태로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에서 가솔을 이끌고 해남으로 낙향한 윤덕희 이후 윤씨가의 가사 경영은 서울보다는 해남과 그 일대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해남 지역에서의 가사나 가대 규모가 확대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 중엽 이후 더 이상 가사 경영 양상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 이를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런데 1906년에 작성된 윤덕희의 6세손인 윤관하(1841‒1926)의 호적표에 흥미로운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기존의 호구단자와 달리 신호적법에 맞춰 새로운 양식으로 작성된 그의 호적표에는 4명의 기구(寄口)가 등재되어 있으며, 와가 10칸, 초가 7칸으로 연동 종가의 규모를 수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종가의 규모이다. 서울에서 500칸의 가사를 상속한 것과 달리 해남 연동에서는 7칸 또는 10칸 정도의 와가를 매득했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서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소박한 규모로 와가를 매매·상속 또는 소유하던 윤씨가의 전통이 20세기 초 윤관하 때까지도 이어진 것으로볼 수 있다.
60) 임학성, 앞의 논문, 314쪽.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99
Ⅳ. 맺음말
1540년에 사노 복만이 작성한 분재기에는 와가(瓦家) 1채가 등장한다.
복만은 이 와가 1채를 상변(上邊)과 하변(下邊)으로 나누어 두 딸에게 균분 상속한다. 하변은 장녀 옥금(玉今) 몫으로, 상변은 차녀 복금(福今) 몫으로 준 것이다. 61) 그의 두 딸은 이렇게 상속받은 와가에 들어가 함께 거주했을까. 아니면 이를 매매하거나 또 다른 방식을 동원하여 경영했을까. 그보다도 사노(私奴) 신분임에도 초가(草家)도 아닌 와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양반 신분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재산과 함께 자녀에게 상속한 것이 더 주목된다. 게다가 사노 복만의 두 딸은 복만과는 소유주가 다른 사비(私婢) 신분이었다. 복만의 분재기와 비슷한 시기, 즉 16세기에 작성된 많은 양반 가계의 분재기에는 가사(家舍)를 균분 상속하는 사례가 종종 발견된다. 이런 경향은 가계에 따라 17세기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62)
자녀들에게 균분 상속을 할 만큼 복수(複數)의 가사를 소유하는 것이 양반가에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남아 있는 분재 문기에 노비·토지와 달리 가사 상속 내역이 수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사 상속 내역이 수록된 경우만 보면 17세기 초까지는 균등 분할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후에는 장남에게 주거나 봉사조에만 와가나 가대(家代)를 포함시키는 사례가 늘고 있다. 봉사조를 늘리거나 장남을 중심으로 한 재산상속이 시작될 무렵이므로, 가사 상속 방식 역시 이에 발맞추어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글에서는 해남윤씨 윤선도 가계를 중심으로 양반가의 가사 경영과 주거 양상을 살펴보았다. 윤씨가의 경우 족보나 문집 등을 통해 살펴보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관직이나 적거(謫居) 등을 이유로 서울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으로 주거가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중 고향인 해남과 관직생활을 위한 해남에서의 거주가 중심이 된다. 이때 가사를 어떻게 조달했을지 실제 자료를 통해 입증해보고자 하였다. 먼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의 분재 문기에서 가사·가대가 균분 상속되고
6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서집성 41 ‒안동 주촌 진성이씨편(1)‒????(1999), 487‒488쪽.
62) 일례로, 영해 재령이씨가의 경우 1634년에 작성된 분재기에 봉사조로 家代와 瓦家를, 4남매에게 각각 家代를 분급하였다.
100 정신문화연구 제39권 제4호
있다. 이때 상속 대상에는 서울과 해남의 가사·가대를 중심으로 외가나 처가와 관련이 있는 지역까지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서울의 경우 윤선도가 출생하는 16세기 후반 이전에 이미 여러 곳에 가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상속을 전후한 시기에 수차례 매득을 통해서 이를 확장하는 단계에 있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해남에서 거주하는 시기가 늘면서 서울지역의 가사 확장은 감소하고 해남에서 주거 기반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세기 중엽 윤덕희 대에 해남으로 주거를 옮기면서 서울과 해남에서의 이원적 가사 경영 양상은 사라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해남윤씨 집안의 가사 경영 또는 주거 양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첫째, 부자(父子) 양대가 상경 또는 낙향을 함께 하면서 주거하는 경향이 많다는 점이다. 윤선도가 아버지를 따라와 서울에서 태어났고, 그 아들 윤인미도 아버지를 따라 낙향하는 등 몇 대에 걸쳐 부자의 족적이 일치한다.
둘째, 분재 문기에는 가사나 가대를 균분 상속한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데 가사 조달 방법을 유추하기 어렵다. 실제 분재 문기에 매득한 가사·가대가 많이 언급되는 데 반해 실제 가사 매매문기는 몇 건 남아 있지 않다.
가대가 상속되었으나 별업(別業)·초당(草堂) 등 소규모의 가사를 제외하 고는 특별히 가사를 조성한 기록도 잘 찾을 수 없다. 다원적 가사 경영을 했음이 분명하나 가사 조달 방식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한계로 받아들여진다. 셋째, 서울과 해남에서의 가사 경영 방식과 규모는그 양상이 달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윤인미가 아버지 윤선도로부터 상속한 서울 연지동 소재 가대는 무려 500여 칸에 달했다. 반면 해남의 경우 매득하는 가사의 규모가 몇 칸에 불과하고, 1900년대 초반 호적에 기재된 연동 종가의 규모 역시 크지 않았다. 규모뿐 아니라 서울의 경우 빈번히 매매가 가능했다든지 지방과는 다른 가사 경영 방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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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정신문화연구 제39권 제4호
국 문 초 록
이 글은 해남윤씨 윤선도 가계를 중심으로 양반가의 가사 경영과 주거 양상을 살펴보고,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율 및 주거 형태에 따른 가사 경영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하였다. 해남윤씨 가계는 17세기까지 경재(京齋) 여러 채를 비롯하여 곳곳에 가사(家舍)와 가대(家代)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사와 가대는 자녀들에게 균분 상속되다가 17세기 이후 점차 장남 등 특정인이 세전(世傳)하는 형태로 승계방식이 변화되었 다. 이는 윤씨 가계의 중심적 활동무대가 서울이었다가, 점차 해남으로 변화하는 것과 그 시기를 함께한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해남윤씨 집안의 가사 경영 또는 주거 양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첫째, 부자(父子) 양대가 상경 또는 낙향을 함께 하면서 주거를 하는 경향이 많다는 점이다. 윤선도가 아버지를 따라와 서울에서 태어났고, 그 아들 윤인미도 아버지를 따라 낙향하는 등 몇 대에 걸쳐 부자의 족적이 일치하고 있다. 둘째, 서울과 해남에서의 가사 경영 방식과 규모는 그 양상이 달랐다. 윤인미가 아버지 윤선도로부터 상속한 서울 연지동 소재 가대는 무려 500여 칸에 달했다. 반면 해남의 경우 매득하는 가사의 규모가 몇 칸에 불과하고, 1900년대 초반 호적에 기재된 연동 종가의 규모 역시 크지 않았다.
한편 17세기까지는 분재 문기에서 가사나 가대를 균분 상속한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렇게 많은 가사를 어떻게 조달했는지 의문이다.
실제 분재 문기에 매득한 가사·가대가 많이 언급되는 데 반해 실제 가사 매매문기는 몇 건 남아 있지 않다. 가대가 상속되었으나 별업(別業)· 초당(草堂) 등 소규모의 가사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가사를 조성한 기록도잘 찾을 수 없다. 다원적 가사 경영을 했음이 분명하나 가사 조달 방식을 파악하지 못한 점이 한계이며, 이는 추후 풀어야 할 과제이다.
투고일 2016. 9. 19.
심사일 2016. 10. 28.
게재 확정일 2016. 11. 14.
주제어(keyword) 가사(家舍) 경영(house management), 가사 조달(house procurement), 별업(別業) 조성(construction of a vacation home), 부자(父子)의 족적(足跡)(marks of father and son)
Abstracts
A Study on the House Management and Dwelling of Yangban Families in the Late Joseon based on Old Documents: With the Case of Haenam Yun Seon‒do Family
Moon, Sook-ja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house management and dwelling patterns of yangban families with a focus on Yun Seon‒do’s family from Haenam and the patterns of their house management according to the occupancy ratio and dwelling forms of yangban class in Joseon. The Yun family of Haenam owned a house and lot in many places including several Gyeongjaes(京齋) until the 17th century. The houses and lots were evenly passed down to sons and daughters, which tradition gradually gave way to a new one of the oldest son inheriting them after the 17th century. The timing corresponds to the point when the central stage of Yun family’s activities moved from Seoul to Haenam.
The house management or dwelling patterns of the family exhibited the following characteristics in that atmosphere: first, there was a strong tendency of father and son moving to the capital or the country together and living together. The marks of fathers matched those of sons over generations as Yun Seon‒do was born in Seoul, following his father, and his son Yun In‒mi moved to the country, following him.
Secondly, there were differences in the methods and sizes of house management between Seoul and Haenam. The lot in Yeonji‒dong, Seoul that Yun In‒mi inherited from his father Yun Seon‒do included as many as 500 Kans(間). Unlike it, the house that was purchased at a cheap price in Haenam included only a few Kans. The house of head family in Yeon‒dong recorded in the family register in the early 1900s was not big, either.
There were many cases of even inheritance of houses and lots in the Records of Property Inheritance until the 17th century. It is a question how they procured that many houses. Although there were many statements about house or lot purchases in the inheritance documents, only a couple of house purchase documents remain. Even after lots were inherited, they did not build houses much except for small ones including vacation homes and Chodangs(草堂) according to the rare records. The study demonstrated that they did pluralistic house management but failed to figure out how they procured houses, which is left to follow‒up stu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