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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윤관련논문

저자 : 崔 美 愛, 指導敎授 柳 年 錫 
출신학교 및 학위 : 順天大學校大學院 國語國文學科, 文學 碩士學位 論文 
년도 :  

孤山 尹善道의 時調에 나타난 思想性 硏究


指導敎授 柳 年 錫


이 論文을 文學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합니다


2001年 12月


順天大學校大學院
國語國文學科
崔 美 愛

 

崔美愛의 文學 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합니다
審査委員長 (인)
委 員 (인)
委 員 (인)
2001 年 12 月
順天大學校大學院

 

목 차
Abstract
Ⅰ. 서론 ··············································································································1
1. 연구 필요성과 목적 ·························································································1
2. 선행연구의 탐색 ·······························································································2
3. 연구 방법 ···········································································································6
Ⅱ. 고산문학의 배경 ·······················································································8
1. 고산의 생애 ·······································································································8
2. 고산의 사상 ·····································································································10
1) 유교사상 ·····································································································11
1) 도교사상 ·····································································································20
Ⅲ. 고산시조에 나타난 사상 ·······································································25
1. 유교사상이 반영된 시조 ···············································································25
2. 도교사상이 반영된 시조 ···············································································58
IV. 결론 ············································································································6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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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Thought in Gosan Yun Seon-do's SiJo
Choi, Mi-ae Departmen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The Graduate School Sunchon National University Advisor : Prof. Ryu, Yeon-seok
In this thesis, we researched the thought in Gosan Yun Seon-do's Sijo to appreciate his works entirely. After we looked into his life, looked around the situation of his time, and observed the characteristics of his literary works, the thought which was appeared in his Sijo could be summarized as follows :
First, his life was full of ups and downs with his intense patriotism during his life 85 years. He had troubles both at home and abroad, such as invasions, party disputes.
He went into exile, entered government office, and retired from the world.
Second, his trend of ideology was based on Confucian ideas. He accepted various ideas, such as Taoism, Buddhism, Shamanism. He considered that the government and the nature were the same thing. He inclined the love for king through his life.
Third, his literature took root in Confucian and moral ethics. He thought that the literature was the means of instruction and special purpose. His view of nature and music was based on Confucian morality.
Fourth, most of his Sijo included the contents of instruction, admonition,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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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otism to realize Confucian idea containing royalty and filial piety.
We could divide the Sijo with Confucian morality into the royalty and the affection for king, the patriotism and caring for people, the administrative policy, the leisure with nature. And we could divide the Sijo with Taoism idea into the peace with satisfaction, the life in the course of nature. His Sijo were his life itself as the literature for the vivid experience of his life. His Sijo were characterized the expression of the imaginative power and the fresh images based on life. The nature expressed in his Sijo was not only the discovery of beauty and meditation but also the symbolic meaning structures.
We showed the trend of Gosan Yun Seon-do's thought in his Sijo through his life, idea, literature, nature, and music. We think that it deserves to help the investigation of Gosan literature and we look forward to study his works continually in various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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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조선시대 국문학사상 양대 시가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으로 가사에 있어서는 松江과 시조에 있어서는 孤山을 들 수 있다. 시조에 있어서는 송강과 고산이 간혹 비교되지만 송강보다는 고산의 시조가 예술성에 있어서 단연 앞선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격조 높은 서정성과 서경적인 아름다움을 환상적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이고 기교적인 언어의 구사는 우리 시가문학의 白眉라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고전문학에서 고산의 문학은 국문학 연구가 본격화되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그 연구 성과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그의 국문시가 가운데 시조임이 분명한 것은 35수이며 1) <漁父四時詞> 40수는 漢詩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漁父長歌>의 전통을 잇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학 표현 방법은 한문에 의한 방법과 국문에 의한 방법이 있다. 前 者는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양반문학이라 할 수있으며, 後者의 경우는 소수의 先覺 사대부나 부녀자, 서민들이 사용하는 글자로서 유학 자들은 忌諱하였고 은폐해온 표현방법으로 儒者들의 활용이 적었기 때문에 그 작품수가 적었다.


사대부들은 지식계층으로 그들의 사상 감정을 한문으로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었으나 국문으로는 통일된 맞춤법과 규정이 없어 효과적인 표현이 어려워서 토속적인 방언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고산의 시조는 우리의 정서․감정․사 고방식이 묻어 있는 토속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이루어진 국문작품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감정과 언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뿐만 아니라 국문학 연구에 필수적인 자산이다.


詩는 인간의 마음을 노래나 글, 말로 표현한 것이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論語』에서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이라 하여 시에는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이나 절박한 심성, 생활의 애환이 담겨 있기에 독자로 하여금 사람들의 심성의 기미를 알고 맛보게 함으로써 인간성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舜임금은 詩란 마음이 바라는 바를 말로 표현


1) 정운채,「윤선도 시조와 한시의 대비적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3,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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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이며 노래란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다' 2) 고 하여 시의 개념을 뚜렷이 하였다. <詩經 大序>에는 詩․歌․舞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시란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詩가 된다. 情이 마음속에서 움직일 때 시인은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 말로서 부족하면 嗟嘆하게 되고, 차탄하는 것이 부족하면 길게 노래하게 되고, 길게 노래하는 것으로 부족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게 된다. 3)


위에서 보면 詩란 마음이 흘러간 바의 표현(염원, 심경, 생활, 애환, 시대상, 사회상)이 라고 할 때 마음의 표현은 사상의 표현이요, 사상이 작품에 용해되어 있으므로 작가의 사상을 모르고서는 작품의 바른 해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본고는 고산의 사상을 고찰해 보고 이 사상이 고산의 국문시가에 어떻게 용해 표현되어 있는가를 탐색하여 밝혀봄으로써 고산시조에 胚胎되어 있는 사상의 천착을 통해 정확한 해석과 도움을 주고자 하는데이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이 있다.


2. 선행연구 탐색


지금까지 고산에 대한 연구는 이재수 4) 를 비롯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확대되어 왔다. 초기에는 작품에 나타난 자연관, 문학관, 작품해석 등에 치중되었고, 최근에는 문학적 표현기교를 비롯한 작품을 중심으로 한 해석, 시대적 배경과 관련지어서 연구하는 방법, 遺稿集의 문헌적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방법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고산의 作品論에 대한 논의로 조윤제 5) 는 고산의 작품을 송강과 비교하면서 묘사에 뛰


2) 원용문,『윤선도 문학 연구』,국학자료원, 1989, p.5.
3) 이원섭 (譯解),『詩經』, 현암사, 1967, p.480. (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 情 動於中 形於言 言之不足 故嗟歎之 嗟歎之不足 故永歌之 永歌之不足 不知手之舞之 足之 蹈之也)

4) 이재수,『윤고산 연구』,학우사, 1955.
5) 조윤제,『朝鮮詩歌史講』,을유문화사,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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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난 기교를 찬양하고 국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그를 시가상 대가로 극찬하면서 그 가운데서도 자연미를 발견한 <오우가>가 극히 뛰어났다고 했다. 김사엽 6) 은 고산으로 하여금 국어미가 발견되고 조선어를 예술적으로 순화, 앙양하였다고 하면서 송강은 가사를 통하여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더 없이 밝혀 놓았으나 고산은 한결 더 깊이 있게 확장시켰고 한문이란 밀림 속에서 당시 우리말 찾기가 지극히 어려운데도 평이하고 소박하며 속되지 아니한 우리말로 문학예술을 완성하였다고 했다. 정인보 7) 도 송강문학과 비교하면서 고산의 <어부사시사>는 物外閑人의 유유한 심경을 흔적 없이 나타냈고 자연풍경을 그림같이 그려낸 점에 대해서 칭송했다. 이재수 8) 는 고산시가에 대해 평범한 시제에다 고결한 인격의 향기를 융합시켜 세련된 수법으로 그려낸 것이 단가이며, 고산작품의 가치는 시정보다도 표현미에 있다고 했다. 박성의 9) 도 고산은 자연시인으로서 시조작품의 가치를 최고도로 발휘했으니, 시조의 나아갈 길은 고산에 이르러 거의 절정에 달했다고 보았고 이런 의미에서 고산은 시조문학의 제일인자라고 했다. 이와 같이 고산의 시조가 우리 문학사에 가장 빛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한결같이 우리말로 조탁되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묘사의 탁월한 기교와 우리말의 소리결이 맑게 씻겨져 순화 고양되었기 때문이다고 할 수 있겠다.


고산문학의 思想的 背景에 대한 연구는 저서나 논문에서 단편적으로 논의되어 왔는데, 이를 살펴보면 원용문 10) 은 작가론에서 시대배경․가계․교유․문학관․음악관․학자적 면모를 다루었고, 작품론에서는 사상적 배경, 시조작품, 한문 작품론, 한시와 시조의 상관 성을 논하였다. 그는 고산의 사상적 배경도 동양문화의 맥락 속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仁 義를 중심으로 한 유교의 정치 철학인 경세제민과 교화선정을 강조한 작품이 유교사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했고, 강호자연에서 생활을 한 은둔도피 사상은 노장철학에 바탕을 두었다고 했으며 작품을 통해 볼 때 고산은 노장철학에 상당히 심취해 있음을 방증해 준다고 하겠다. 그는 또 자연은둔 생활을 신선에다 탁의한데서 나온 결과라고 하여, 의식적 이든 아니든 간에 도교사상에 젖어 있다고 했다.


이용숙 11) 은 유가 문학사상의 특징을 교훈적 목적문학으로 道文一致의 載道的 문학관이 다고 밝히면서, 孝悌類와 戀君類가 주축을 이루고 修己治人의 養志類와 안빈낙도의 處世


6) 김사엽,『국문학사』, 정음사, 1955.
7) 정인보,『鄭松江과 國文學』,문교사, 1955.
8) 이재수,『윤고산 연구』, 학우사, 1955.
9) 박성의,『孤山詩歌』, 정음사, 1957.
10) 원용문, 전게서, p.5.
11) 이용숙,「孤山 尹善道 詩歌硏究」,원광대, 박사학위논문, 1986, pp.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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類도 상당한 양에 달하며 유학사상이 전 작품에 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孤山詩의 특성을 ‘고답미와 자연미의 애호’다고 밝히면서 유교를 본령으로 하면서도 노장 철학에 젖어 있다고 하였다. 박성의 12) 는 국문학에 나타난 유가사상을 鑑戒주의 사상․모화주의 사상․복고사상․도문일치 사상․안빈낙도 사상으로 분류하였다. 윤경수 13) 는 고산시가를 우리의 전통적인 유․불․도교의 합일관으로 광범하게 연관시키면서도, 고산은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중용의 인물’이다고 했다. 최동원 14) 은 유․불사상의 작품보다 도교사상의 작품이 문학성의 격조를 높이게 한 구실을 해명하고자 했다. 이종구 15) 는 고산의 성격과 현실상황 인식, 삶의 자세와 문학의식 등 그의 의식에 따른 시가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소학을 평생 애독하여 유학사상이 그의 문학 전편에 흐르고 있다고 했다. 문영오 16) 는 고산은 奉儒의 전형이며 유학사상이 고산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으로 자리잡아, 유교의 충․효 덕목 외에 실천덕목인 克己復禮的 측면과 민본적 측면(애민사상)이 고산 작품 분석을 통하여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밝혔고, 유교철학의 실천으로 ‘귀양’이란 자신의 현실적 고뇌구제의 방어제로 도교철학에 기대어 유교와 도교가 공존하는 이중적 자연관을 지녀, 그의 시조에 있어서 도덕적인 면은 유교를 바탕으로 했지만 흥취적 면은 도교에 기반을 둔시가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고산시가에서 도교사상이 신앙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이 함께 침윤되어 있음을 분석하여 밝혔다. 고산의 시조에 나타난 사상은 유교사상이 기저를 이루고 있지만 유교만으로 도색된 것이 아니라 유교․도교사상이 수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산의 自然觀에 대한 연구로 최진원 17) 은 고산이 관계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假漁翁’의 초자연의 세계를 찾았다 하고, 자연을 추상화․관념화하여 시의 대상적 자연이 시인의 정서나 사상을 표현하는 매개물이 되는 수단적 의미로 보았다. 안병태 18) 는 자연관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하나는 순수 소박한 자연관으로 자연미와 자연 감정을 읊은 것, 다른 하나는 자연미 속에서 도덕적 요소를 찾아내어 본받으려 한 것으로 <오우가>를 예로 들고 설명하였다. 구수영 19) 은 가정적 배경, 시대적 배경, 자연적


12) 박성의,『한국문학 배경 연구 (上)』, 이우출판사, 1978, pp.128-137.
13) 윤경수,「고산의 자연관」,『현대문학』12-2월, 현대문학사, 1966-1967, p.106

14) 최동원,「道家思想이 古時調에 미친 影響」,『부산대논문집』10호, 1959.
15) 이종구,「孤山 尹善道의 作家意識 考察」,영남대, 석사학위논문, 1993.
16) 문영오,『孤山文學詳論』, 태학사, 2001.
17) 최진원,「고산의 자연관」,『성대논문집』10호, 성균관대, 1965, 10.
18) 안병태,「윤고산의 오우가에 나타난 자연관」,『양주동박사고희기념논문집』, 동국대, 1972, p.596.
19) 구수영,「윤고산의 시가형성의 연구배경」,『충남대인문과학연구논문집』, 1972, p.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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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을 나누어 시조 형성요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규명하였다. 김종열 20) 은 고산이 자연에 들게 된 근본적 동기와 의미를 적극적 자아 실현을 위한 것으로 규명하였다.


이외에도 장무익 21) 은 고산 시조의 국문해석과 자연과 연결시킨 주해와 감상을 주로 다루었으며, 이종구 22) 는 고산의 성격과 현실상황의 인식, 삶의 자세와 문학의식 등 그의 의식에 따른 시가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조태흠 23) 은 고산의 현실 인식이 자연지향 의식과 經世指向 의식의 두 방향으로 작품에 나타난다고 했으며, 자연수용 태도는 자아중심적 태도와 대상중심적 태도의 이원적으로, 자아중심적 태도는 경세지향 의식을, 대상중심 태도는 자연지향 의식을 바탕으로 작품세계가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정운채 24) 는 윤고산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기초를 제공하기 위하여 시조의 많은 작품과 많은 한시 작품을 대상으로 각 작품들이 무슨 시점에 어떤 동기로 창작되었는가를 밝혔다. 맹택영의 고산시조에 대한 일반적이고 전반적인 해설적 고찰, 25) 고제숙의 고산 시가의 이미지 파악, 26) 안경노의 고산의 작품형성 배경과 시가의 특성 연구, 27) 이경자의 <山中新曲> 분석, 28) 원용문의 고산 시가의 미학적 고찰과 자연의 의미 분석 29) 등 다방면으로 깊이 있게 많은 양의 연구물들이 나왔다. 이들 연구 외에도 자연에 도취되어 은둔한 것으로 해석한 연구, 고산의 단가는 자연시가 대표가 되며 자연사상이 보다 심화되었다는 연구, 고산의 자연관이 도교 적인 것과 직결된다고 주장한 연구, 고산의 문학은 어디까지나 생활에 밀착된 문학을 즐거운 마음으로 창조해 낸 것이지 도피문학일 수 없다는 견해 등 그 선행연구는 일일이다 들 수 없을 정도로 고찰되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산의 작품 가치는 시조 자체의 정서적인 면도 뛰어나지만 우리말로 표현하여 아름다움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우리말을 작품의 시정에 어울리게 적절하고 정확히 구사한 표현미에 있음이 밝혀졌다.


한편 고산의 사상적 배경은 유교사상이 기본 바탕이 되어 시가에 관류하고 있으며 도


20) 김종열,「고산과 자연」,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1979, pp.62-66.
21) 장무익,「孤山 尹善道 作品硏究」,『공사논문집』32집, 1992, 2.
22) 이종구,「孤山 尹善道의 作家意識 考察」, 영남대, 석사학위논문, 1993.
23) 조태흠,「尹善道 時調 硏究」,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1985.
24) 정운채,「윤선도」, 건국대학교, 1995.
25) 맹택영,「고산 윤선도 연구」,『청주대 논문집』14집, 1981.
26) 고제숙,「윤선도 연구」, 인하대, 석사학위논문, 1982.
27) 안경노,「윤선도 시가 형성의 배경과 작품의 특성」, 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82.
28) 이경자,「산중신곡 논고」, 한양대, 석사학위논문, 1983.
29) 원용문,「윤선도 시조의 문학적 의미」,『배달말』10집, 배달말학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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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상도 여러 작품에 젖어 있음을 알 수 있다. 治國, 治家, 修身 등의 작품에는 유교사상이 나타나 자연에 은둔하거나 유유자적한 생활로 도교 사상이 침습되어 있음을 탐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고산의 작품세계에서 자연은 정서나 사상을 표현하는 수단적 의미로 자연미와 자연에 대한 감정이나 교훈적․윤리적 요소를 찾아 본받으려는 생활과 밀착된 문학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들은 고산시조의 문학성, 우리말을 구사한 기교, 문학전반에 흐르고 있는 고산 사상의 자연적 미와 의미를 공통적으로 탐구하여 밝히고 있다.
이 연구는 고산시가의 문학성, 자연관, 시의 특질, 국어미, 언어의 기교, 사상 등 선행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산사상이 시조에 어떤 영향을 미쳐 작품화되었으며, 작품속에 나타난 사상과 그 배경을 밝혀 고산문학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3. 연구 방법


고산문학에 대한 선행연구를 고찰해 볼 때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산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친 시대상과 생애를 살펴보며 외부 환경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고찰해 보고, 이를 토대로 연구의 방향과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다음은 고산의 사상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배경이 된 유교․도교의 사상적 측면을 논하여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모든 문학작품은 그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용해되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사상성 규명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수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고산이 유교적 인물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도교, 불교, 노장철학, 卜術, 풍수지리, 무속 등에도 통달하여 이러한 제 사상들이 알게 모르게 고산 작품에 용해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유학 이념과 도교 사상은 이재수, 30) 문영오, 31) 원용문 32) 등이 논의하 였지만 본고에서는 고산의 문학관, 자연관, 음악관 등도 고찰하여 고산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다음은 고산의 사상이 그의 시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어 표출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유교․도교사상 및 고산의 문학관, 자연관, 음악관과 고산의 작품과의 상관관계


30) 이재수, 전게서, p.23.
31) 문영오,『孤山尹善道硏究』, 태학사, 1983, p.61.
32) 원용문,「尹善道文學의 思想的背景」,『고산연구』4호, 고산연구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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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고산 시조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뜻이 분명하여 문맥대로 해석 가능한 작품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자연이나 인물 혹은 古事를 援用하여 상징적으로 그 사상이나 의도, 내용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며, 관점에 따라서 다른 내용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따라서 작품의 창작배경․동기 등을 밝혀 연구자의 의견을 제시하여 객관적이고 합리 적인 해석과 표출된 사상을 탐색하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한 시조에 하나의 사상이나 의도가 내재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상과 의도를 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이런 경우 작품이 지니고 있는 사상의 경중과 창작의도를 분석하여 고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나의 시조도 고찰 관점에 따라 다각도로 분석할 필요가 있을 때 두 번 이상 인용하여 분석하였다. 시조에서 고사를 원용할 때는 유래와 뜻을 설명하고 그와 대비하여 고산 시조를 분석, 해석하여 표출된 사상을 규명하였고, 각 시조마다 상징어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밝혀 해석의 오류를 최소화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본 연구는 고산 시조 35수와 <漁父四時詞> 40수에 나타난 창작동기와 배경(고산의 처한 위치, 시대, 환경, 장소 등)을 고찰하고 각 시조를 분석, 해석하여 시조에 나타난 사상을 밝혀 보고자 한다. 유교적 내용의 작품에서도 忠君戀主․憂國齊民․避世隱遁․自然耽 溺 시조 등으로 분류하여 고찰하고, 도교적 작품에서도 安分知足․無爲自然 시조로 분류 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또한 본 논고의 주목적은 고산의 시조에 나타난 사상과의 영향 관계를 살펴 작품을 조명해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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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산의 생애와 사상


1. 고산의 생애


윤선도(1587년 선조 20년∼1671년 현종 12년)의 자는 約而, 호는 孤山 또는 海翁이고, 전남 해남이 본관이며 유학자 집안의 벼슬을 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父는 惟深이며 叔父는 惟幾인데 그의 숙부가 宗家 從祖에 입양되었고 윤선도 또한 惟幾에 입양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이 되었다. 養父 惟幾는 관찰사였으며 대대로 벼슬을 지낸 집안 으로 좋은 환경에 성장하였으나 受學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시가를 쓴 시기와 연관하여 생애를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고산의 생애에 대한 고찰은 유년 및 성장기, 1차 유배 및 출사기, 2차 유배 및 은둔기, 3차 유배 및 재출사기 등 4기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유년 및 성장기는 출생하여 1차 유배(1587∼1616, 1세∼30세)까지의 기간을 말한 다. 1587년 서울 蓮花坊에서 惟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고산의 천품이 영특하고 청아․강직하였다고 한다. 그가 관찰사인 숙부 惟幾 앞으로 입양된 것은 8세 때이며 11세 때에는 山寺에 가서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였으며 17세 때 남원 윤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 해에 진사 초시에 합격했으며 광해군 4년 (1611년) 25세 되는 해에 선대의 묘소와 옛집이 있는 해남으로 돌아왔다. 1612년(26세)에 進士試에 합격했으며 生父가 병으로 눕게 되자 정성껏 간호하는 등 인정이 두텁고 의로운 인간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1차 유배 및 출사기는 慶源(1616∼1618, 30세∼32세)과 慶尙道 機張(1618∼1623, 32세∼ 37세) 配所期 및 出仕期(1624∼1636年, 38세∼50세)로 <丙辰疏>를 올려 慶源 유배시부터 영덕유배 전까지에 해당된다. 北人 鄭仁弘과 李爾膽 등이 권세를 잡고 정권을 농단하던 때에 고산은 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丙辰疏>를 올려 임금을 기만하고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죄상을 탄핵했다. 33) 이 때 고산은 30세 밖에 안되었으나 疏가 매우 격렬하여 모두 두려워했다고 한다. 昏君 光海君은 소를 대신들에게 논의케 했는데 이이첨이 두려워


33) 박준규,『유배지에서 부르는 노래』, 중앙일보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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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이이첨의 뜻에 따라 고산은 1616년 경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고산은 배소지에서 두문불출하고 글을 읽으면서 시나 읊고 회포를 달래면서 思親의 한시와 시조 <遣懷謠> 5수, <雨後謠> 1수를 지어 우국사친 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1618년(32세)에 유배된 士類들이 여진족들과 내통하여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남쪽 변방 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여 고산은 경남 동래 機張으로 배소를 옮기게 되었다. 1619년(33 세) 기장 배소에서 養父의 부음을 듣고 슬픔에 잠겼다. 1623년(37세) 인조반정으로 배소 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1628년(42세) 인조 6년 別試初試에 급제하고 봉림, 인평 두 대군의 師傅가 되었으며, 그 후 인조의 신임을 얻어 43세 때 공조좌랑이 되고 46세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1632년(46세) 사복시첨정, 漢城府尹으로 승진하였다. 1633년(47세) 예조정랑으로 世子의 侍講院文學에 임명되었다. 임금의 총애를 시기하여 모함하는 무리들과 재상 姜碩 期의 미움을 사 48세 때 성산현감으로 좌천되고 田政輕減을 건의한 <乙亥疏>를 올렸지만 임금에게 보고되지 않고, 이로 인하여 파직되어 해남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다.


2차 유배 및 은둔기로 盈德 流配(1638년∼1639, 52세∼53세)와 隱遁期(1639년∼1651년, 53세∼65세)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산은 鄕族 家僮 수백 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도착했으나 이미 함락되었다. 고산은 하는수 없이 해남으로 귀환했지만 배에서 내리지 않고 세상을 버리고 숨어살기 위해서 제주 도로 향했다. 海途中 완도에서 경관이 빼어난 보길도를 발견하고 이를 부용동이라 명명하고 격자봉 아래 樂書齋를 짓고 여생을 보내려고 했다. 고산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강화도 에까지 와서도 임금께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서 고산은 투옥되었고, 1938년 (52세)에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1년만에 사면되어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과 해남 현산면의 수정동․금쇄동․문소동 등에 정자를 세우고 往來逍遙하면서 작품을 창작하여 금쇄동에서 <山中新曲> 18수, <山中續新曲> 2수, <贈伴琴> 1수, <初筵曲> 2 수, <罷宴曲> 2수를 지었다. 1649년(63세) 여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여 재출 사를 하게 되고 고산의 은거생활은 1639년(53세) 영덕 유배생활이 풀린 후 1651년(65세) 부용동에서 <漁父四詩詞> 40수를 짓기까지 13년 간의 은둔기로 그의 시가에 많은 작품을 남긴 때이다.


재출사기 및 3차 유배기(1652년∼1660년, 66세∼81세)는 고산이 효종의 부름을 받고 재출사한 기간부터 禮論에 패배하여 三水로 3번째 귀양살이 갈 때까지이다. 1652년(효종3년, 66세)효종이 고산의 인품과 經學의 높음을 생각하여 成均館司藝에 임명하였다. 同年 3月 고산은 상소하여 前後의 무고 받은 사실을 아뢰고 벼슬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간신들의 시기와 질투는 더욱 심해졌고 정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고산은 고향에 돌아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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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으나 임금이 時輩들의 직책을 갈아버리면서 동년 8月에 예조 참의에 특배하였다.


이에 病으로 인한 사의를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10月에는 時務 8條의 소를 올리고 정사공신 元斗杓을 공격하는 소를 올려 이로 인해 관직을 삭탈 당하고 부용동에 들어 세상을 잊고자 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애를 느낀 그는 강호에 舟遊하면서 피로한 심신을 달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1657년(71세) 僉知中樞府事로 제수되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물러날 것을 간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그 직을 맡도록 했다. 1658년(72세) 공조참 의에 제수되었고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고, 그 해 다시 소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고 퇴직을 허락 받게 되었다. 고산이 해남으로 내려가지 않고 양주 고산에 머물러 있을 때 宋浚吉 등이 南人 鄭介淸 서원을 헐어버리고 신주를 소분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고산은 국시가 어지러워 가고 선배 유학자가 무고 받음을 통분하게 여겼는데 이듬해 1659년(73세)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효종 승하 후묘소문제와 趙大妃의 복제문제로 고산과 남인 허 목은 體正之說로 3년 상을 주장했으나 西人 宋時烈 등은 體而不正之說로 期年을 주장하여 예론 싸움으로 궁지에 몰려 1660년 (74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34) 1665년(79세) 전남 광양으로 배소 지를 옮겼다가 1667년(81세)에 왕의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나 8년이란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해남 금쇄동과 완도 부용동에 칩거하게 되었다. 고산의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했으며 30세까지는 학문 수련기였고 그 후는 3번의 유배로 17년 간 前後出仕 20년 간, 은둔 26년 간의 생애로 항상 집권 사류들의 질시와 모함을 받으면서도 불의와 횡포에 맞서 정의를 위해 투쟁한 우국 충군의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말년에는 부용동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생활하다가 1671년 85세를 일기로 천명을 다하였다.


2. 孤山의 思想


고산은 유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그의 사상은 유교가 주류를 이루지만 그 시대에 공존했던 불교, 도교, 민간신앙, 음양, 풍수지리 사상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 예로 漢詩 <淨深菴>과 <謝隣僧來助墾荒>에서는 불교적인 용어를 <金鎖洞記>, <醉仙


34) 장무익,「고산 윤선도의 작품연구」,『공사논문집』32집,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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樓賦>에서는 도교적 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고산 문학의 연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각적인 분석과 검토 연구가 이루어져야만 정확하고 올바른 문학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교․도교에 대한 사상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유교 사상


유교의 이상사회가 요순시대인데 巢父․許由의 고사도 이상사회의 극치를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堯임금이 舜임금에게 천하를 禪讓할 때 ‘允執厥中’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이라 했다. ‘中’의 사상, 즉 중용사상이 유교의 중심사상으로 ‘道’가 그 핵심이라 할수 있다. 道는 태극이 되고, 음양으로 나뉘고 자연에는 오행으로 운용되며 인간에는 五倫, 五常이 되는 것이다. 中庸에 “元․亨․利․貞은 天道之常이요, 仁․義․禮․智는 人性之 綱” 이라 한 것도 같은 뜻이며 유교사상의 中核이다. 孔子의 중심사상은 仁이다. 표현은 다르지마는 道가 곧 仁이다. 道는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올바른 길, 바른 길이며 행동철 학이다.


유학은 宋代에 와서 程子․朱子가 性理學(「性命義理之學」의 준말) 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시켜 심성의 수양을 철저히 하면서 동시에 규범법칙 및 자연법칙으로서의 理 를 깊이 연구하여 그 이의 의미를 실현하려는 학문이다. 麗末 安珦이 朱子學을 들여와 성리학 시대가 열리고 조선시대의 인륜도덕의 기본이 되었다. 그 실천율로 삼강오륜을 내세 우며 구체적인 내용은『小學』에 제시되어「立敎」,「明倫」,「善行」,「嘉言」등에서 인간이 행해야 할 길을 밝힌 것이다.


그러면 고산의 유교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평생의 반려가 된『소학』에 대한 고산의 생각은 어떠했을까를 살펴본다.『소학』은 유교이념의 실천서이며 수신과 도덕 교훈서로서 고산이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였을 때『소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산은 남을 가르칠 때에도 자신의 수신을 위해서도『소학』을 중요시하 였다. 고산이 74세 때 효종이 승하하여 禮論事訟에 패배하여 三水 귀양살이에서 장자 仁 美에게 준 글을 통해 『소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누누이 강조하였다.


소학은 인간의 기본 바탕의 본보기로 삼으려고 지은 것이다. 배우는 사람이 이를 위주로 삼는 것이 마땅한 것이니 또한 일생에서 언어와 문자사이를 너같이 배우는 자들에게는 정성을 다해서 익혀야 한다. 지금 이미 여러 번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익히지 못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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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다만 시간이 있으면 고요히 앉아 소학을 조용히 보아 익혀 마음에 두면 반드시 새로 얻을 것이 있을 것이다. 이는 다 일생에 겪어야 하는 당연한 일이니 죽을 때까지 변해서는안 되는 것이다. 우리 집안의 흥멸은 이 서찰 한 장에 있으니 절대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손자아이들로 하여금 명심해서 읽어 잊지 않게 하라. 35)


위에서『소학』을 강조한 말은 우리 집안의 흥멸은 이 서찰 한 장에 있으니'란 글에서 엿볼 수 있다.『소학』의 차례를 보면, 入敎, 明倫, 敬身, 稽古는 내편이 되고 嘉言, 善 行은 외편이 된다. 이런 짜임으로 볼 때『소학』의 내용은 효․충․예․인륜․애민․청렴 등으로 고산의 인격형성과 인생관 정립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고산의 <次樂忘韻二首>라는 시를 통하여 유교사상이 점철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淸和時節雪猶殘 맑고 화창한 봄날이지만 눈 아직 남아있고
誰信人間有此寒 인간세상에 이러한 추위를 누가 믿겠는가?
攬茝蕙纕皆所善 구리떼로 엮은 띠 다 좋다고 느끼는데
囚山蔡服亦云安 귀양살이 허름한 옷 또한 편안하다 말하겠네
只緣愛國輕身易 다만 애국 때문에 몸 가벼이 하기 쉬우나
終爲思親忍淚難 마침내 어버이 생각에 눈물 참기 어렵네
渺渺飛鴻斜日外 까마득히 날아가는 기러기 날은 저문데
鎭胡樓上倚欄干 36) 진호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었네


위의 시는 경원유배지에서 지은 것으로 귀양살이의 착잡한 심정 속에서 충효의식을 실감있게 표현한 것이며, 그의 유교사상이 배어 나오는 작품이다. 다음의 <丙辰疏> 가운데 에도 그의 충효의식의 갈등이 나타난다.


35) 『孤山遺稿』卷五 上, p.17. (小學是做 人底樣子 學者以此爲主者 亦於一生言語文字間 勤 勤懇懇於曹者也 今不須讀告也 但 有時靜坐 着意閑看小學 則必有新得 此 將經傳循環細玩 則 無非懾伏身心之助 此皆一生當務而 至死不可變者也 吾家興滅在此一紙 切勿泛視 且今孫兒輩 銘讀勿忘)
36) 『孤山遺稿』卷一,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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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군신의 대의를 아뢰겠습니다. 신의 애비는 금하려한즉 국가를 저버릴까 두렵고, 들으려 한 즉 자식이 죽음으로 나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망연히 앉아 묵묵히 말씀이 없었 습니다. 臣의 말이 나옴에 미쳐서 신의 손을 잡으시고 오열의 눈물을 떨구시었습니다. 臣 이 비록 용감히 결정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지마는 어찌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스럽고 자비롭게도 무거운 법전에 의거 신을 다스리시되, 늙은 애비에게는 미치게 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천하 후세에 忠臣孝子로 거울이 될 것입니다. 37)
위의 효의식은 아버지 신변이 염려되어 아버지에게는 미치지 말게 해 달라고 하소연했 는데, 이로 말미암아 削官奪職하게 되었다. 이런 심정을 다음의 <用前韻詠懷>에서도 볼수가 있다.


義是人間男子路 義는 人間 男子의 갈 길이오
仁爲天下丈夫居 仁은 天下 丈夫의 사는 집이다.
潛心四象兩儀理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은
四象兩儀의 이치이고
着眼三皇五常書 三皇 五常의 書에 눈을 붙인다.
大鼎珍烹何足羨 큰 솥 진귀한 음식 어찌 족히 부러워하랴.
興酣菰米配鱸魚 38) 흥이 무르익으면 고미도 농어에 짝할 수 있다.


위에서 본 바, 고산의 유교에 대한 심취를 잘 보여주는 시로, 유교사상의 핵심인 충효 사상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義는 남자의 길이고, 대장부의 살아갈 집이 仁이라고 했다.
이는 유교의 정치철학이요, 인간의 道임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다음으로 고산이 성산현감으로 좌천되어 있을 때 삼남 지방의 田政 등급경중에 대한 상소문 <己亥疏>에는 經世濟民, 敎化善政, 民本思想 등을 강조한 바 있는데, 이는 고산의 목민관과 유교사상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37) 『孤山遺稿』卷二, <병진소> (又陳 君臣之大義 臣父欲禁則 恐負國家 欲廳則憫子就死 茫然而坐 黙然無語及臣之辭出 也 執臣之手 悌泣鳴咽 臣雖勇決此地頭 能不悲哉 伏願 聖慈雖置臣於重典 無使延及於老 父 永爲天下後世 忠臣孝子之鑑戒)
38) 『孤山遺稿』卷一,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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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맡는 유사에게 명하여 지금 측량한 전결은 다 낮게 감소함을 베풀어서 혹 평상시에 반으로써 정식을 삼거나 혹은 癸酉年에 비하여 十分의 二, 三을 더하여 정식으로 삼도록 하십시오. 대저 이와 같으면 백성이 반드시 기뻐서 북을 치고 춤을 추고 전하를 공대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와 같지 못하면 백성들은 반드시 머리를 아파하고 얼굴을 찌푸려서 원성이 전하께 모이게 될 것입니다. 39)


위에 나타난 바,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며 백성이 배불리 먹고 평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교의 仁의 정신과 고산의 경세제민, 민본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고산은 천부적인 시인의 자질을 타고났다. 유․불․선의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 지만 특히 유교사상이 基幹을 이루고 있다. 이는 고산이 효종의 사부로 있을 때 개진한 그의 문학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시란 그것으로 성정을 읊조리고 정신이 흐리고 통하게 하는 것이니 몰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백성의 떳떳한 본성, 物의 이치와 관계 있으면 읽어 이로움이 있고, 그것을 행하면 그 능함을 더할 것이다. 사람의 감정과 사물의 모습을 말한 것은 그것을 보면 많이 아는 것의 바탕이 된다. 이제 이 책머리 두 절구에서 하나는 방탕한데 흘러서 돌아 옴을 잊는다는 뜻이고, 하나는 자기의 능함을 부풀려서 나아감을 찾는 마음이 있으니, 어찌 그것을 책을 여는 처음에 두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만약 그것이 정절한 부인이나 충신의 마음을 묘사하는 일이든지 붕우나 형제의 정과 생각을 곡진히 묘사하는 작품은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다 음영할 수 있어서 사람에게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40)


위의 글에서 시란 사람의 성정을 읊조리고 정신을 유통시키는 것이니 몰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시도 백성의 떳떳한 본성과 사물의 법칙과 유관한 것을 읽으면 이로움이 있게 되고 그런 것을 행하면 더 잘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정과 물태에 관해서는 아


39) ( 伏願殿下. 亟命有司, 今量田結 悉施降減 或以比平時 一半爲定式 或以比癸酉 加得十分之 二三 爲定式焉 夫如是則 民必歡欣鼓舞 願戴殿下 不如是則 民必疾首蹙鴳 怨叢殿下矣)
40) 『孤山遺稿』卷六 附錄 諡狀, p.5.
(詩者 所以吟詠性情 流通精神 不可以不知者也 然 其有關於民彝物則者 讀之有利 行之 益其能 言於人情物態者 覽之爲多識之資而 其惡之不足以爲戒 善之不足以爲法者 皆程子 所謂 閑言語不足觀也 今玆卷首二絶 一有流蕩忘返之意 一有衍能于進之心 豈合置之於開 卷之始也 若其模寫 貞婦忠信之心事 曲盡朋友兄弟之情思者 此等諸作 殊有意味 皆可吟詠 而 有補於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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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의 바탕이 된다고 했다.
고산은 문학이 교시적 기능과 권선징악의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해야 하며 유교적, 교육 적, 도덕적, 수기치인 등의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산은 貞婦나 충신의 마음을 잘 그려내는 작품, 朋友나 형제의 정을 묘사한 작품이 진정한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의 <漁父四時詞> 跋文에도 고산의 詩觀을 엿볼 수 있다.


동방에 예로부터 <漁父詞>가 있었는데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옛 시를 모아서 곡조를 이룬 것이다. 이것을 읊조리면 江風과 바다비가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생겨나며, 사람으로 하여금 홀연히 세상을 남겨두고 홀로 서려는 뜻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농암 선생도 이것을 좋아해서 싫증을 느끼지 않았고 퇴계 선생도 탄상하여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음향이 서로 응하지 않고 말뜻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음은 대저 옛것을 모으는 데에만 얽매였기 때문에 옹졸한 결점이 있음을 면할 수 없는 까닭이다. 나는 그 뜻을 부연하고 속된 말을 사용하여 <漁父詞>를 지었는데 四時를 각각 1편으로 하고 그것을 10장으로 하였다. 41)


위에서 前代의 <漁父詞>가 音響不相應이요, 語義不甚備임을 밝히면서 시의 음향(고 저․율격․리듬)을 중요시하며, 말의 뜻 또한 잘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고산은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는데는 한문이 아니라 우리 글만이 아름다움을 나타낼수 있다고 믿었다. 전대의 시가를 모방하여 답습하지 않고 新意를 창출한 점, 음향을 대단히 중요시한 점, 俚語를 사용하여 우리의 정서에 맞도록 말을 선택한 점, 서정적 영역과 서경적 묘사에 뛰어난 점, 어구를 세심하게 조탁하고 탁월한 기법을 구사한 점등을 통하여 보면 국문학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시조문학은 문학적인 면과 가창적인 면을 공유하고 있다. 조선조의 대부분 시조는 가창을 전제로 하여 지은 노래가 많다. 그러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무엇 때문에 시에서 음악성을 중요시하였을까? 이는 위정자들이 樂과 禮를 함께 중요시하여 爲政의 가장 중요한 강령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예는 윤리도덕의 이념 덕목으로 피지배자들의 질서의 식을 일깨워주는 실천 방안으로 생각하였고, 음악은 백성의 정서순화, 곧 移風易俗의 감화력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의 문집 一에 의하면 음악과 직접 관계된 시는 <古琴


41) 『孤山遺稿』卷六 下 別集, 歌辭 p.14.
(東方古有漁父詞, 未知何人所爲, 而集古詩而成腔者也. 諷詠則, 江風海雨 生牙頰間, 今人 瓢瓢然有遺世獨立之意, 是次聾岩先生好之不倦 退溪夫子歎賞無已 然音響不相應 語義不 甚備蓋拘於集古, 古不免有焉促之缺也, 余衍其意 用俚語作漁父詞 四時各一編. 第十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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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을 포함하여 6수나 된다. 여기서 그의 고차원적, 음악적 소양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앞에서 고산은 詩나 歌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고산의 은둔기에는 琴笛과 歌舞하는 이를 두고 보면서 감상하였으며 <山中新曲>, <漁父四時詞> 등의 노래를 짓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였다. 고산은 儒者로 예술을 하는데도 도학자적 이념을 그대로 고수 하여 그의 음악도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고산은 좋은 음악이 되려면 樂하되 淫하지 않고 衰하되 傷하지 않고 不急不慢의 뜻을 얻어야 된다 42) 고 하였다.


또한 정치․사회․문화는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인간의 범주에 속하며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다. 이로 보아 문학의 대상은 자연이며 그 주체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다. 고산의 작품은 자연을 소재로 관념화․상징화하여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아 자연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처럼 자연미를 발견하고 강호가도를 노래한 것은 고산 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문학의 커다란 흐름이었다.
자연이란 개념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유교적 자연관은 도학의 근원인 본연지성이 <청산>과 <유수>로 대표되는 자연과의 교합을 통해서 조화 43) 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보며, 불교적 자연관은 본 체계에 상대되는 미계인 현상계를 일단 자연계라 본다는 것이다. 44)


다시 말해서 欲․色․無色界의 三界가 자연계로서 중생들의 생활무대인 산하대지, 산천 초목을 지칭하는 것이다. 도교에서는 인공과 대응되는 자연이라는 개념은 그 부분적인 일면에 불과 45) 하며 우주생성론․가치론․실제론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자연에 대한 정의도 시각에 따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청산>, <유수>, <산하대지>, <산천초목>, <인공에 대응되는 자연> 등 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고산의 자연관을 논해보고자 한다.


고산은 누구보다도 자연애호가였다. 그가 인간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자연에서 보상받으려 했던 것이다. 46) 자연=고산, 고산=자연 등식은 어느 작가보다도 철저하게 성립된 다. 47) 이처럼 현실에서 좌절을 맛본 고산에게 부담없이 가까울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이었 다. 17년이란 긴 귀양살이동안 좌절과 실의에서 살아온 그에게 안식과 情誼의 교합을 이


42) 이종구,「孤山 尹善道의 作家意識 考察」, 영남대, 석사학위논문, 1993, p.45.
43) 박성규,「李奎報 硏究」, 계명대, 석사학위논문, 1982, p.91.
44) 인권환,「高麗時代 佛敎詩의 硏究」,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83, p.209.
45) 최창록,『韓國神仙小說硏究』, 형설출판사, 1984, p.195.
46) 원용문, 전게서, p.153.
47) 문영오,『孤山文學詳論』, 태학사, 2001,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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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 수 있게 해주었던 자연을 의인화하였으며 자연에 동화하였다. 윤성근 48) 은 윤선도의 자연관을 3가지 관점으로 보았다. 일상적 유람자의 관점에서는 자연을 아름다운 것으로 파악하고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이상향으로 간주하고 노래하였으며, 정치적 패배자의 관점 에서는 정계복귀의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 노래하였으며, 구도자의 관점에서는 자연 속에 담겨있는 윤리성, 즉 심성의 이상적 상태를 발견하여 노래했다고 설명하였다. 문영오 49) 는고산의 시가에 표현된 사상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도출해서 우리 국문학 작품에서의 자연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파악했는데 첫째, 현실도피로서의 의미, 둘째, 자기구제의 의미, 셋째, 윤리적 교훈으로서의 의미, 넷째, 수신의 통로로서의 의미로 보았다.


즉 고산은 자연을 풍류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道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최진원은 풍류(賞自然), 영원(規範性), 조화(餘白) 등으로 분류하여 논의하였다. 50)


이외에도 조선문학사상을 기초로 한 풍류성을 배경으로 하여 고산의 자연관이 형성되 었다는 내용, 고산의 단가는 자연애를 심화시켰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내용 51) , <山中新曲 >을 통해 자연관, 인생관을 탐구한 내용 52) 등이 있다. 고산의 문학작품은 유배시절에는 충․효를 대상으로, 은둔시기에는 자연을 대상으로 지어진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로 보아 고산에게 있어서 자연은 피곤하고 상처받은 마음의 안식처요 피안이었다. 고산은 자연의 영상을 작품화했지만 단순히 자연미의 표현이나 풍류나 흥취가 목적이 아니라 대상을 추상화․관념화․상징화하거나 자아중심적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여 忠, 孝, 憂國憐民, 避世 安息 등을 작품에서 표출하였다. 고산은 자연을 찾고 자연미를 발견하여 자연시인으로서의 제 1인자라 53) 했을 때 그 의미는 자연미를 잘 표현했다든지 자연을 서경적으로 노래 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윤고산의 작품에서의 자연은 주변적 소재에 불과하며 작품의 핵심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즉 자연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거나 그것에서 어떤 미적 정서를 탐구해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념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54)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자연이 상징하고 있는 고산의 이념․감정을 찾아야 고산의 자연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산의 <上白軒相公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8) 윤성근,「尹善道의 自然觀」,『문화비평』3.4호, 아한학회, 1970, pp.605-642.
49) 문영오, 전게서, pp.103-131.
50) 최진원, 전게서, pp.44-107.
51) 정권채,「尹孤山 文學의 思想的 考察」, 조선대, 석사학위논문, 1981.
52) 이경자,「山中新曲論考」, 한양대, 석사학위논문, 1983.
53) 안병태,「孤山의 <五友歌>에 나타난 自然觀」,『무애양주동선생고희기념논총』, 탐구당, 1973, p.78.
54) 원용문,『尹善道文學硏究』, 국학자료원, 1989,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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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시 <病患孤山船上感興>에서 ‘내가 경국제민의 뜻이 없는 것이 아니요, 군자가 나아 가고 물러날 때 어찌 때 있으리오’한 것은 朱子가 ‘경국제민은 일찍부터 숭상했던 바요, 숨어 나타내지 아니함은 본래의 바램이 아니로다’ 한 뜻입니다. (중략) 선비의 처세는 구차스 럽게 나아가서도 아니 되고 구차스럽게 물러나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나아감에 마땅히 이익을 탐할 것이 아닌가 경계해야 하며, 물러남에 마땅히 세상을 잊는 것이 아닌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55)


위의 글에서 자연의 의취에 탐닉한 것은 고산의 출처진퇴의 인생관에 따른 것이지 자연자체가 좋아서 또 즐거워서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그의 뜻은 경국제민에 있으니, 그 뜻을 펼 수 없어 임시로 안식과 避世를 위해 歸去來 56) 한 것이다. 최진원 57)


도 대표적 가어옹 退溪․聾岩․孤山을 들면서 고산은 무한한 불우를 겪었고 그 불우속에서 번민을 했고 이 번민을 벗어나기 위해서 초연이란 세계를 그려나갔다고 했다. 또 최진원 58) 은 고산을 부용동에 온 후 그 곳에서 파묻히지 않고 수차 정쟁에 뛰어들어 정치적 현실에 관여하였으므로 같은 강호인인 농암과 퇴계와 다르게 분류하였다. 그가 七 里 여울 羊皮옷과 삼천 육백 낚시질을 이상으로 표방하였지 실제로는 양피옷의 嚴子陵이 되지 못했고 현실적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던 삼천 육백 낚시질의 강태공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59) 김대행 60) 도 현실에서 미처 해소하지 못한 갈등과 현실세계에의 지향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견해를 종합해 볼 때 현실정치에서의 萬毁千誣가 따라 다니는 고산은 번민 에서 벗어나 안식처로서의 자기구제를 위한 歸去來處다고 자연을 생각했으며 그의 뜻은 충군․경세제민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산의 작품 표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대상으로 흥취를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外延) 그 밑바탕에 의도한 뜻은 유교이념인


55) <上白軒相公書>,『孤山遺稿』卷四.
(鄙詩, 吾人経濟非無志, 君子行藏奈有時云者, 朱夫子, 経濟兮所尙, 隱淪非素期之意也 (중략) 士之處世, 固不可苟進, 固不可苟退 進則當戒貪利, 退則當戒忘世)

56)『古文眞寶』卷一, <歸去來辭>는 진의 陶淵明이 평택 현령으로 있을 때, 소인(자기보다 고관이었음)에게 예복입고 고개 숙일 수 없다하여 사표를 내고 전원으로 돌아가서 읊은 시로 벼슬살이를 후회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산수와 함께 살았음.
57) 최진원,「假漁翁」,『성대논문집』5, 성균관대, 1960, pp.78-79.
58) ______,「尹孤山 <漁父四時詞> 硏究」, 동국대, 석사학위논문, 1963.
59) 원용문, 전게서, p.6.
60) 김대행,「漁父四時詞의 外延과 內包」,『孤山硏究』창간호, 고산연구회, 1987, p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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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효, 연민 정신이 깔려 있으며(내포), 자연을 노래한 것은 작품에 의탁했을 뿐이라 생각된다. 다음 고산의 <上鄭判書世規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군자의 처세로 나아가고 물러나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따름이니, 조정 아니면 산림이라 한 것은 곧 고인의 말입니다. 제가 이미 병이 들어 세로에서 행세할 수 없으니 수석에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지 아니하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61)


이 글에서 사대부의 처세는 조정 아니면 산림에 묻히는 두 가지 길밖에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고산은 조정에서 출척당했으니 막다른 골목인 자연밖에 더 머무를 곳이 있겠는가. '병들어 世路에 행세할 수 없으니'는 관로에 나아가 충군하면서 경세제민의 표현 이며, 비록 귀거래해 있지만 그의 뜻은 관로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귀거래는 고산뿐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의 공통적 생각이며 생활동경이 되었고 문예사조로도 등장 하였다. 이 귀거래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종의 도피였다. 현실 이탈이며 한마디로 賢者避世다. 62) 이처럼 고산이 자연에 피세해 있더라도 그의 마음은 항상 戀主之情에 머물러 있는 것이 <病患孤山船上感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吾人経濟非無志 내가 경국제민의 뜻이 없는 것이 아니요
君子行藏奈有時 군자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어찌 때가 있으리오.
着處江山皆好意 이르는 강산마다 의취 좋으니
夕陽歸棹不嫌遲 63) 석양에 돌아가는 배 늦어도 싫지 않으리


마지막 구절이 은연중에 자연에 돌아가는 길이 내키지 않고 임금 곁을 떠나는 것이 싫어서 더딤이 싫지 않다고 했다. 이 '더딤이 싫지 않다'고 한 것은 우연이거나 일회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없다. 64) 연군지정이 얼마나 깊은지 다음 <謹和呈龍洲>에서도 볼 수 있다.


61)『孤山遺稿』卷四.
(士君子之處世 出與處之二道而已. 非朝廷則山林 乃古語也 兮旣癃病 不能行於世路 則不 逍遙於水石以終餘生 而更何往哉?) 62) 최진원,「江湖歌道의 風流」,『성대논문집』11, 성균관대, 1966, p.33.
63)『孤山遺稿』卷一 66章, 詩.
64) 정운채,「윤선도」, 건국대학교, 1995,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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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行非出晝 이 길은 주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련만 疾甚自遲遲 병이 깊어 저절로 더디고 더디구나 聖心終好禮 성군의 마음은 마침내 예를 좋아하시리니 王改庶幾期 65) 원컨대 임금님 고치시기를 기약하소서.


위에서 나오는 晝는『孟子』에 나오는 지명인데 맹자가 齊나라를 떠나면서 임금이 잘못을 고치고 다시 자신을 부를 것을 기대하여 3일을 묵었던 곳이다. 이를 비추어 볼 때위 한시 2수에 나오는 ‘더딤’은 모두 “임금이 거의 고치시기를 날마다 바라보고 있는 (王 庶幾改之予一望之)” 맹자의 심정과 같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며, 연주지정 때문에 임금의 곁을 빨리 떠남을 싫어하는 내용이니, 산림에서도 조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고산의 인생 관이 그의 자연관의 밑바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산의 작품에서 유교와 도교가 공존하는 이중성을 발견할수 있으며 금쇄동이나 부용동에서의 삶의 향유방식은 도교적이지만 자연관의 밑바탕과 자연에 묻혀 살게된 동기는 유교적 삶의 좌절과 실의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도교사상


도교는 古代 신선설을 중심으로 不老長生을 이상적인 것으로 추구하며, 老子를 敎祖로 하고 後漢때 張道陵이 창교했다. 노자는 허무를 주제로 한 無爲自然說을 주장했다. 자연그 자체가 하나의 원리이며 진리이니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도피의 생활을 했고 자연에 묻혀 안주하며 인위적인 것을 배척했다. 또한 유교의 삼강오륜은 인간이 만든 것이요, 자연에 따르면 모두 필요 없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라 했다. 노장학파 들은 세상을 백안시하고 飮酒․彈琴․圍碁 등을 일삼고 즐겨 노장 허무의 언사를 입에 담았으니 이를 청담이라고 하였다. 66) 그 예로 중국 南北朝시대 竹林七賢이 대표적인 인물 이다. 도교의 내용은 노장사상과 신선사상이 결합한 것으로 노장사상의 근본은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삼고 仁,義, 忠, 孝 등을 인위적인 수단으로 생각했다. 신선사상의 기본은 秘 法方術로서 질병과 재액을 물리치며 養生, 養氣, 呼吸鍊丹 등에 의한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했다.


65)『孤山遺稿』卷一 69장.
66) 박성의,『韓國文學背景硏究』, 예그린출판사, 1978,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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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도교의식을 수용하였고, 67) 여기에는 昭格殿이 있어 祈 雨, 治病, 求福을 맡아 보았다. 중종때 趙光祖의 건의로 국가적 도교관서인 소격서를 없앴 으나 이는 우리 민족의 의식세계에 잠재되어 민간종교로 전승되어 왔으며, 이런 신선사상 이나 허무사상이 문학작품에 반영되었다.


『孤山遺稿』第一에 <用前韻戱作遊仙辭求和>라는 漢詩에서 ‘鍊丹擬學參同契’, ‘金鼎何難 火次第’ 등 도교의 不老不死의 방안들을 읊은 것으로 보아 고산이 도교에 심취했으며 老 壯의 書나 도교서적을 탐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 진나라때 葛洪(号苞朴子), 仙 人들은 연단을 만들어 복약함으로 신선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연단을 만드는 솥을 金鼎이라 했다. 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해 작시한 것은 도교사상에 대한 조예가 밝았을 뿐 아니라 그의 신선사상도 수준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고산은 부용동을 ‘仙跡甚多 且奇峯環立 其形或似芙蓉花’다고 했으며 신선들이 사는 蓬萊島라 인식하였고 奇花瑤草만이 자라는 仙界라고 생각했다. 고산은 ‘由來神仙豈 異人’이라 하여 신선과 세인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이런 태도나 사고방식은 유가의 공통적인 특질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儒家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현달하기를 바랐고 은퇴할 때는 자연속에서 신선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鄭松江도 <續美人曲>에서 “天上 白玉京을 엇디 야 이별하고 다 뎌 져믄 날에 눌을 보라 가시는고”, <關東別曲>에는 “仙人을 려 丹穴에 머므 살가. 꿈에 사이 날려 닐은 이 그  내 모랴 上界의 眞仙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보면 당시 유자들은 많은 고전을 섭렵하여 여러 방면에 학식을 쌓았고 도교에 대한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활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고산이 관로에서 물러나 금쇄동․문소동․부용동에 묻혀 자연을 벗삼고 은둔한 것은 노장의 은둔도피사상의 영향으로 신선과 같은 생활을 즐기려 했던 듯하다. 고산의 이러한 고답미와 자연미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속에 은둔하려 한 것은 그에게 신선사상이 뿌리깊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고산은 그의 한시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노장철학에서 즐겨 사용하던 ‘仙’을 많이 사용하여 도교에 상당히 심취하였음을 방증해 준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形似仙挑落 九天”<詠硯滴呼韻>, “仙鶴瓢瓢不愁濕”<喜晴>, “鏘然宮微響仙廊”<後溪水聲>, “寒碧領仙 景”<代嚴君次韻酬姜正言大晋>, “仙藥動江村”<詠房中共盆松梅> 등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 고산은 <금쇄동기>에서 그 곳이 선계임을 묘사함으로써 도교에 젖어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산은 東晋時代 노장사상에 젖어 귀족사회를 떠난 도연명이 구가한 이상향으로 금


67) 李太祖는 星祭檀을 쌓고 太白 金星에 祭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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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동을 무릉도원으로 보았다.
이곳은 조물주가 깊고 신비한 경계로서 만든 곳인 바 도원의 봄을 누설시키지 아니하고자 함이라 (중략) 폭포는 이미 동천의 3분지 1이며 구부려 인간세상을 바라보니 사람 가는 것이 어찌 보이리오.(중략) 또한 여기에 와서 보이는 것은 그것이 上淸仙區의 문호가 되었 음을 알겠도다. 68)


또 다음의 <用前韻戱作遊仙辭求和>에도 보면 그런 정황이 나타나 있다.
凔玉未必藍田山 창옥이 반드시 남전산의 것이랴
鍊丹擬學參同契 연단함에 있어서 참동계를 배울가 한다.
月窟倘了天後先 월굴은 아마 하늘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데
金鼎何難火次第 연단하는 솥은 어찌 불이 차례대로 붙은 것이 어렵겠는가?
閬風玄圃高不極 신선이 사는 정원과 현포는 높아서 끝이 없고
蓬海瀛州渺無際 봉래 영주는 아득하여 끝이 없네
來歸肯效華表翎 돌아오는 길 즐겨 화포의 날개를 힘입고
遠遊下笑高陽裔 멀리 노닐면서 아래로 고양의 후예가 웃네
経營遮莫地上友 경영을 하는데 지상의 벗들은 막지를 말라
飜覆不管人間世 나르고 뒤집으면서 인간 세상일은 관장치 않으리
金支翠旗眞氣濃 금장대에 달린 푸른 기발 참기운 무르익고
鳳笙龍管蘭音脆 69) 봉생 용관 난향의 소리가 부드럽구나.


위에서 살펴보면, ‘月窟’, ‘金鼎’, ‘閬風', ‘玄圃’, ‘蓬海’, ‘凔洲’ 등은 모두 신선들이 사는 곳을 나타내는 도교적 용어이다. 또 ‘凔玉’은 “謂得仙術之人以玉爲食也” (옥을 먹어야 신선의 술을 사람이 얻는다는 말)의 뜻으로 어찌 중국 남전산에서 나는 옥만이 효력이 있는가고 묻고 있다. 연단은 신선이 되기 위해 먹는 단약인데 금정에서 굽는다고 했다. 도사가 불노불사를 위해 만들어 먹는 약이며, 고대 중국 황제는 착현산에서 연단하는 끝에 선도를 터득하여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도 있다. 고산도 연단약하기 위하여


68) (是 造物之所以深秘靈境, 而不欲漏泄桃源之春者歟 (중략) 瀑已不洞天三分之一 而俯瞰世路 則 人焉之行 (중략) 且眼者到此 則可知其爲上淸仙區門戶也.) 69)『孤山遺稿』卷一,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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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同契』(漢의 魏伯陽이 지은 책으로 주역의 爻象을 빌려 연단법을 설명한 책)를 배워 야겠다고 했다. ‘華表翎’은 丁令威가 죽어서 학이 되어 돌아와 보니, 그 옛날 고향 사람들은 다 죽고 華表柱만 남아 있다는 전설에서 따온 것이며, 신선이 못된 중국의 전설적인 황제 전욱 高陽씨의 후손인 굴원을 비웃는다고 했다. 또한 지상의 인간 벗들과는 교류관 계가 없고 인간 세상에 대하여 관계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작품 속의 ‘金支翠旗眞氣濃, 鳳笙龍管蘭音脆’는 신선세계의 아름답고 즐거운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며 고산 자신이 이런 선계의 분위기에 노닐고 있음을 말한 내용이다. 이 한시를 통해서 보면 고산은 완전히 신선사상에 심취하여 도교사상에 몰입되어 있었다고 보아진다. 다음 한시 <釣舟>는 고산이 노장사상에 심취했음을 드러낸 시로서 주목된다.


長蓑短笠跨靑牛 긴 도롱이 짧은 삿갓 청우에 올라 타고

袖拂烟霞出洞幽 안개젖은 소매털면서 그윽한 골짜기 나서네

暮去朝來何事役 저녁가고 아침온들 무슨 일이 고될까

凔洲閑弄釣漁舟 70) 창주에 한가함을 낚시배에서 즐기네


위에서는 청우를 타고 함곡관을 빠져나가는 노자의 전기를 用事하였는데, 이는 고산의 도교 철학적 삶의 실천현장을 느낄 수 있다. 예컨대『孤山遺稿』第一卷 <戱次方丈山人 芙蓉釣叟歌>에서도 도가용어, 신선이 산다는 지명, 도인들의 이름이 대거 등장하는 시구를 뽑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世人不識蓬萊島’ 세상사람들은 이것이 봉래섬인 줄 모르고
‘由來神仙豈異人’ 옛부터 신선이 어찌 사람과 다르겠는가
‘時去遊戱玄圃閬風淸興深’ 때때로 가서 현포와 낭풍에 노니니 맑은 흥이 깊더라
‘未必金丹一粒能致洞賓之飛吟’ 반드시 금단 한 알이 여동빈의 날아 읊조리는 것을 능히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還瞰華表九點烟裡皆蜉蝣’ 돌이켜 화표주를 바라보니 아홉 지점이 안개속에 다하루살이 같더라.
‘悠悠直上銀河洲朝帝廷’ 유유히 바로 은하의 모래톱에 올라가서 상제의 조


70) 전게서,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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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 조회한다.


위의 작품에서 “유유히 은하의 모래톱에 직접 올라가서 상제의 조정에 조회한다”는 구절을 볼 때 고산의 시상은 인간계와 천상계를 自往自來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모든 시문은 모두 인간과 거리가 있는 仙의 세계와 관계있는 도가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는 고산의 신선사상이 그만큼 뿌리깊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고, 자신의 은둔생활을 신선에다, 부용동을 무릉도원에 託意한 것이라 생각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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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시조에 나타난 사상


이 章에서는 고산의 유교와 도교사상이 그의 시조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다. 물론 하나의 사상이 한 작품에만 나타난 경우도 있지만 여러 작품에 나타나거나 또 한 작품에 여러 사상이 혼재하여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꼭 이 사상만으로 창작되었다고 단정하기가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겠으나 당시 고산이 처했던 시대상황에 따라서 내용을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살펴본 바 고산사상은 그가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유교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 도교․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유교사상의 근본이념은 충․수기치인․경 국제민이다. 이에 따라 충․우국제민․수기치인과 상호관계가 있는 작품을 대별하여 사상적 영향을 탐색하고 도교사상으로 된 고산의 작품을 그 다음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그리고 여기서 검토할 대상은 고산의 시조 35수와 <漁父四時詞> 40수를 합하여 총 75수로서 고산의 사상이 그의 시조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탐색해 보겠다 .


1. 유교사상이 반영된 시조


1) 忠君戀主


충군연주지정의 대표적 작품은 <遣懷謠>이다. 이는 1618년 고산의 나이 32세 때 함경도 경원 배소에서 지은 것이다. 당시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워져 이이첨의 무리가 나라의 권세를 잡고 그의 뜻에 어긋나는 자는 귀양살이를 보내든지 추방하였다. 이때 고산은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고자 吏判이며 세도가인 이이첨과 그 일파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朝野가 아연실색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판국에 과격하고 준열한 상소문은 폭군을 에워싼 孽臣들에게는 청천의 벽력보다 더 무서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71) 고산이 올린 <丙辰疏>는 이이첨의 분노를 사게 되어 그 결과 함경도 경원 땅으로 유배생활의 혹독한 고난이 시작되었다. 이 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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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아들 생각 때문에 밤잠도 편안하게 이룰 수 없었고, 그의 상소가 화근이 되어 관찰사 직에서 물러나가게 된 부친을 생각하면 눈물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思親의 정을 읊은 2수, 자기수양을 읊은 1수, 연군지정을 읊은 2수의 <遣懷謠>가 전한다.


내일 망녕된 줄을 내라야 모손가
이 어리기도 님위 타시로쇠
아 아리 닐러도 님이 혜여 보쇼셔 <遣懷謠 2>
楸츄城셩 鎭딘胡호樓루 밧긔 우려 녜는 뎌 시내야
므슴 호리라 晝듀夜야의 흐르다
님 向향한 내 뜯을 조차 그칠 뉘 모로다 <遣懷謠 3>
어버이 그릴 줄을 처엄붓터 아란마
님군向향한 뜯도 하히 삼겨시니
眞진實실로 님군을 니면 긔不불孝효가 녀기롸 <遣懷謠 5>


위의 <遣懷謠 2> 초장에서 ‘내일 망녕된 줄을 내라야 모손가’는 자아성찰로 <丙 辰疏>로 인한 경원 배소에서 회한과 좌절감이 나타나며, 중장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 타시로쇠’다고 고백한 사실은 그의 어려운 귀양살이에서도 충성심은 변함없음을 읽을 수있다. 중장과 종장에서 ‘님’이 나오는데 ‘님’은 일반적인 애정의 대상일 수도 있고 임금일 수도 있다.


이는 <丙辰疏>로 인한 귀양살이에서 지어진 작품으로 중장의 ‘님’은 3인칭으로 임금을 지칭하며, 종장의 ‘님’은 2인칭으로 남이 나를 모함하여도 임금님께서 잘 판단하시기를 바라는 동시에 임금의 판단에 따르겠으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겠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결국 그 가혹한 추위와 유배의 형벌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간신 도당의 무고 때문임을 호소하는 우국연주의 충성이 나타나 있다.
<遣懷謠 3> 에서는 자연을 노래한 서경적인 맛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서경으로 노래한 것이 아니라 지고지순의 충성을 진솔하게 표현한 노래이다. 종장 ‘님’을 일반적인 애인 으로 본다면 한편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임


71) 정병욱,『한국 고전의 재인식』, 홍성사, 1983,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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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의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다. 추성 진호루는 유배지 경원성의 남문루인데 그 진호루밖에 흐르는 시냇물이 밤낮으로 울면서 흐른다고 했다. 임금을 향한 一片丹心이 시냇 물에 비유하여 읊고 있는 바 여기에 주목되는 점은 경승이 아니라 ‘우러녜 뎌 시내야’ 인데 시내와 님 향한 뜻이 같은 것으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절실한 심정을 노래했다. 고산의 슬픔의 근원은 ‘님 향 내 뜯을 조차’서임이 분명하다. 고산에 있어서 충군은 절대적 이며 임금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노래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遣懷謠 5>는 고산의 孝親과 忠君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반영함과 동시에 忠이 곧 孝이다는 忠孝兼全이 조화되어 마음속 갈등이 억지로 해소된 듯하나 내면에서는 충효의 무서운 싸움이 전개되어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고산은 충을 다하 다가 불효를 하게 되었다. 충효사상이 최고의 이념이나 현실적으로 고산은 실천하지 못했고 종장에서 충이 곧 효라고 자위해서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고산은 “以孝爲忠 忠便 孝” 72) 다고 하여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기 떳 밧긔 못 보던 뫼 뵈고야
이어라 이어라
낙시질도 려니와 取 거시 이 興흥이라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夕셕陽양이 니 千쳔山산이 錦금繡슈ㅣ로다 <어부사시사 秋 4>


이 작품 초장은 회화성 있는 서경묘사로서 ‘기러기 떳 밧’, ‘못보던 뫼’의 원근이 서차 적으로 묘사되어 한 폭의 산수화 같은 느낌을 준다. 어부가 秋景에 취한 느낌이며 초장에 기러기 떴는 밖에 못보던 뫼이 보이는구나에서 ‘뫼’는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중장 ‘낙시 질도 려니와  거시 이 흥이라’의 ‘이 흥’에서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는 이미 거론된 말을 의미하며 ‘낙시질도 하려니와'는 의미상 ‘이’가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없으므로 초장 ‘기러기 떳 빗긔 못 보던 뫼 뵈고야’를 가리킨다. 흥겹고 기분이 좋은 까닭은 ‘뫼’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여기서는 임금을 상징하고 있다. 종장 ‘夕陽에 니 千山이 錦繡ㅣ로다’에서 ‘千山’은 흥을 더해주기 위해 구체성을 띤데 불과하며 여기서는 세상을 뜻한다. ‘뫼를 보니 낚시할 생각도 없으며 흥이 절로 나서 석양에 천산이 더욱 비단같도다’고 한 것은 멀리 임금계신 곳을 바라보니 저절로 흥이


72)『孤山遺稿』卷一, 詩 p.14. <睡覺思親二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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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기분이 좋아서 온 세상이 비단같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충군연군지정이 담겨 있다.


잔들고 혼자안자 먼뫼흘 라보니
그리던 님이오다 반가옴이 이리랴
말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됴하 노라 <漫興 3>


여기에는 연군의 깊은 뜻을 읽을 수 있다. 누구든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농어촌에 묻히거나 귀향하여 자연에 묻힐 수밖에 없다. 고산도 退官하여 자연에 묻혀 자연을 노래했으나 임금을 그리워하고 잊을 수 없는 마음이 은유되어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몰입되어 있는 物我一体의 경지로 본다면 초장에 ‘술잔을 들고 혼자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니’는 자연을 즐기는 일도 혼자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중장에 그리워하던 임(사랑하는 사람)이 온다한들 반가움이 이만할 수 있겠는가? 인간사 중에 가장 반갑고 즐거운 일이 보고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인데 이보다 더 반가우니 자연 사랑과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는 표현의 극치를 이루었다. 종장에 ‘말씀도 웃음도 아니 하여도 못내 좋아하노라’고 한 것은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자연에 대한 사랑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정경에 대하여 티없이 맑고 깨끗함을 찾을 수 있으며 절대고독이 주는 자연도취에 빠져 짜릿한 희열감을 주는 미인의 미소를 보는 것 같다.
이 작품에서는 한 점의 현실적인 고뇌나 번민을 느낄 수 없으며 이보다 더한 표현이 없을 정도의 자연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고산은 이 작품을 자연사랑으로 지었을까. 그 뜻은 단순히 문맥대로 자연에 동화되어 느낌만을 표현한 것일까. 고산의 시가 전반에 흐르는 주류사상은 愛國戀主이다.


그의 작품을 하나로 관통하는 것은 연주이며 결국 자연애와 더불어 君恩에 귀결되어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 <漫興 3>도 군은에 귀결되어 있는데 초장의 ‘먼 뫼’가 님보다 반가운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임금을 뜻함이요, 중장에 있는 ‘님’은 일반적인 애정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먼 뫼’는 단순히 자연으로서의 산이라기보다 고산이 마음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성군의 모습 이다. 종장의 아무 말씀도 우옴도 없어도 그저 임금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는 뜻이니 임금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난 작품으로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고산의 충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사화와 당쟁이 극심했던 시기에 윤선도의 생애는 출사, 유배, 은일의 반복으로 그의 작품은 현실과 이상사이를 왕래하면서 어떤 때는 도덕적인 이상을, 어떤 때는 자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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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의와 풍자를, 어떤 때는 회한을, 또는 자연에 몰입하여 세상을 잊으려는 태도를, 어떤 때는 정치적 이상을 노래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절대적인 힘은 임금에게 있으므로 현실을 타파하고 개혁하여야겠다는 적극적인 투쟁정신은 엿볼 수 없고 패배하여 물러나면 소극적으로 자연을 벗삼아 자위하고 만족하며 체념하는 생활태도를 보여주었다.


江강山산이 됴타 내分분으로 누얻냐
님군恩은惠혜 이제더옥 아노이다.
아므리 갑고쟈 야도 올일이 업세라 <漫興 6>


이 시조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 임금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중장에서는 자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 “임금의 은혜를 이제 더욱 알게 되었다” 했다. 종장에서는 임금의 은혜를 아무리 갚고자 하여도 할 일이 없어 못갚는다고 했다. 결국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林泉海中에 묻혀 살면서도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벼슬살이를 바라는 마음이 나타나 충군 사상이 얼마나 깊은지 증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애국 연주의 사상은 고산 시가 전반에 관류하고 있다. 그의 모든 생활이 군은 때문에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臣者로서 신의를 지키는 고산정신의 도덕적 구조에 유교이념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자연애와 더불어 자신의 생활, 창작행위의 모든 것을 군은에 귀결시키고자 한 의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러고 보면 고산의 문학도 내면이야 어떻든 그 시대의 儒者의 범주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은 어이야 되엳다 大대匠쟝의 공이로다
나무 어이야 고든다 고조줄을 조찯노라
이집의 이뜯을 알면 萬만壽슈無무彊강 리라 <初筵曲 1>
술은 어이야 됴니 누룩 섯글 타시러라
국은 어이야 됴니 鹽염梅 타시러라
이 음식 이 뜯을 알면 萬만壽슈無무彊강 리라 <初筵曲 2>


이 시조는 지은 때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조 23년경(1645년 59세 때)에 지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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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보이는 <初筵曲> 2수이다. 고산의 우국 연주지심과 유교이념의 국가관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初筵曲>은 나라의 연회상에서 연회가 처음 시작될 때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이것은 국가적 행사에 해당하므로 엄숙하고 장중하면서 국가백년대계의 번영을 위한 훈계적인 내용으로 유흥가로서 불려진 것은 아닐 것이다.


<初筵曲 1>의 초장에서 ‘큰집’은 대장의 공로로 지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집은 주거 공간으로서 집이 아니라 우국 연주의 이치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국가 사직을 말하고 ‘대장’은 애국충신을 뜻한다. 중장에서 나무가 곧게 되는 것은 고자줄(묵 줄)을 따랐기 때문이다. 종장에서는 이 집(국가)의 뜻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오래오래 번영할 것이다고 하여 국가의 번영과 융성을 바라는 훈계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산은 효종의 사부로 간혹 善政을 훈유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보면 이 시조는 임금의 도와 성현의 도를 실천하여 바른 정치를 이끌어 가도록 하는 목적에서 지은 작품이라 생각된 다. <初筵曲 2>도 <初筵曲 1>과 똑같은 시상과 표현기법에다 소재만 바꾸었을 뿐 같은 형식이니 ‘술’, ‘국’은 임금의 성덕이요, ‘누룩섞을 탓’과 ‘염매(소금양념)할 탓’은 어진 신하의 보필할 탓임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罷宴曲>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즐기기도 려니와 근심을 니즐 것가
놀기도 려니와 길기 아니 어려오냐
어려온 근심을 알면 萬만壽슈無무疆강 리라 <罷宴曲 1>
술도 머그려니와 德덕 업스면 亂란니
춤도 추려니와 禮례 업스면 雜잡되니
아마도 德덕禮례를 딕히면 萬만壽슈無무疆강 리라 <罷宴曲 2>


위 시조도 <初筵曲>과 같이 지은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같은 시기라 추측된다. < 罷宴曲>은 잔치가 파할 때 불리어진 노래로서 평안할 때 즐겁게 놀지마는 위태로움을 잊어서는 안되며, 즐거울 때 어려운 근심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잔치에도 한도가 있어야함을 노래했다. <罷宴曲 2>는 연회에는 즐겁고 흥이 있어야 하며 덕담도 오가야 경사스러운 의미가 한층 살아난다. 만조백관이 참여한 가운데 군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잔치에는 술과 노래와 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酒․歌․舞도 지나치면 상하의 분별이 없고 절도에 어긋나며 원래의 의미가 퇴색하기 쉽다. 이것을 경계하고 훈계하는 내용이다. 술․가무도 덕과 예를 갖추어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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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못하면 난잡해짐으로 酒에는 德을 舞에는 禮를 갖추어야한다는 도덕적인 이상의 노래이다. 즉 교훈적이며 권선적 내용인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守分하기를 강조한 노래이다.


흰이슬 빋견 근 도다온다
  셰여라  셰여라
鳳봉凰황樓루 渺묘然연니 淸쳥光광을 눌을 줄고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玉옥兎토의 띤 藥약을 豪호客을 먹이고쟈 <어부사시사 秋 7>


이 작품은 임금님을 지극히 그리워하고 위하는 생각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흰 이슬이 자욱히 내려 있고 밝은 달이 돋아오는 이 아름다운 정경에 혼자 앉아서 지내는 쓸쓸하고 외로운 심정을 노래했다. 鳳凰樓(임금이 계시는 궁궐)에 계시는 임금님에게 淸光(맑은 빛 - 참신한 조정의 모습이 백성을 위하는 분위기)을 드리고 싶은 소망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 당쟁의 다툼 속에 항상 모략에 휩싸인 고산으로서는 나라를 위한 맑은 빛이 서로 협력하고 화합하여 조정에 비추는 것이 소원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달나라 桂下에서 옥토끼가 찧는 약(仙藥)을 호객에게 먹이고 싶다 했다. 호객은 호탕한 사람을 뜻하는데 그에게는 임금님 외에 누가 있겠는가? 이 선약을 임금님께 드려 좋은 정치를 하는 것을 바라며 만수무강하기를 비는 끊임없는 丹忠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2) 憂國濟民


사직의 걱정과 경세제민 사상이 잘 나타난 작품은 <夢天謠> 3수와 <饑歲歎> 1수가 있다. 시조 <夢天謠>는 고산의 나이 66세(1652년 효종3년) 때 지은 작품이다. 이 때 효종은 書傳을 강독하고 있었으나 의문나는 점을 경연의 신하들에게 물어도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효종은 고산의 경학에 대한 식견을 알고 있어 고산을 成均館司 藝로 임명했다. 효종의 교서를 받고 마지못해 응했으나 상소로 前後 무고받은 사실을 아뢰고 벼슬을 그만두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임금이 입성을 재촉하였다. 얼마 후 고산 에게 승지를 제수 하시니 고산은 사양했지만 윤허되지 않았고 반대파 시배들의 시기와 질투는 더욱 심해져 正言 李萬雄이 고산을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고산은 상황의 불리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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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아 승지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두 번의 상소 후 허락을 얻었다. 이에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楊洲 孤山에 머물다가 가을에 귀향을 결심하면서 시조 <夢天謠> 3수를 지었다. <夢天謠 1>은 기울어져 가는 사직을 바로 세우려는 우국충군의 정과 경세제민의 이념이 잘 표현 73)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은 고산을 감싸주고 격려해 주는 세력보다는 그를 시기하고 모함 하는 무리들이 득세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임금 곁에 있을 수 없는 것이 고산의 처지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런 상황 아래서 직접 임금을 만날 수는 없고 꿈을 빌려 고산의 유교이념을 표현했던 것이다.


샹해런가 꿈이런가 白玉京경에 올라가니
玉옥皇황은 반기시나 群군仙션이 꺼리다
두어라 五오湖호烟연月월이 내 分분일지 올토다 <夢天謠 1>


위의 시조 초장에서 생시인지 꿈인지 모르지만 백옥경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했다. 백옥 경은 하늘 나라의 황제인 옥황상제가 있는 곳인데 도교적인 용어로 이 작품에서는 임금이 계시는 궁궐을 의미한다. 중장에서는 백옥경에 올라가 보니 옥황상제는 반가워하시는데 여러 신선들이 자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옥황상제는 효종 임금이고 군선은 효종을 가까이 모시는 자신을 꺼리는 반대파의 간신들을 의미하고 있다. 고산은 조정에서 벼슬을 할 수 없으니 자탄을 하면서 ‘두어라 강호자연에서 지내는 것이 내 분수에 알맞도 다’고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여기의 ‘강호’란 강과 호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은둔지인 자연의 의미로 쓰였다고 생각된다. 이 <夢天謠 1>에 대한 작품의 해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특별한 애호도 있었으나 결국 1년도 못되어 그 해 11월에 파직되어 귀남하였다.
강호에서 세속을 잊고 유유자적하고 있다가 이외에 이같이 조정에 올라와서 연모하던 왕을 배알하게 되었으니 하도 기뻐서 초장에서 생시인지 꿈인지 백옥경에 올라왔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 꿈은 비참하게도 꿈 그대로 같이 마쳐지고 말았다. 옥황(왕)은 반가워하지마는 群仙(西人)들이 시기하고 배척하니까 다시 강호에 돌아가서 자연을 벗삼아 살자는 것이 다. 74)


73) 이용숙, 전게서, p.55.
74) 이재수, 전게서,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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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의 꿈을 꾸어 十십二이樓루에 드러가니
玉옥皇황은 우스시되 群군仙션이 꾸짇다
어즈버 百萬만億억蒼창生을 어늬 결의 무르리 <夢天謠 2>


이 <夢天謠 2>도 또한 꿈의 세계를 빌어 도가적 무대에서 자기의 뜻을 밝히고 있다.
이 시조는 고산이 옥황과 군선들과 이미 알고 지내는 관계이며, 군선과는 적대관계를 나타내고 임금은 반가워하시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夢天謠>는 글자 그대로 고산이 꿈에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그가 당한 일을 임금께 아뢰고자 하는데 간신 때문에 못하고 돌아온 회한이 담겨 있다. '十二樓', '玉皇', '群仙' 등도교적 용어로 비유법을 써서 당시 조정의 어지러운 정치현실과 간신의 집권으로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대책을 몹시 걱정하는 경세제민의 내용이 담겨있다. 초장은 풋잠에 꿈을 꾸어 십이루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十二樓란 옥황상제가 있는 곳으로 도가에서 말하는 백옥경에 있는 누각을 가리키고, 꿈이 아니고는 十二樓에 들어갈 수 없듯이 현실 적으로 궁궐에서 임금님을 만나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중장의 내용은 옥황(왕)은 고산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데 임금님 주변의 群仙(반대파의 여러 신하)은 자기를 비방하고 배척 한다는 당시 조정의 분위기를 나타냈으며, 종장에서 백만 억 창생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는 임금님과 논의도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한이 서려 있다. 종장에 대해 박성의는 “백성을 사랑하고 세태를 우려하는 애국심이 나타나 보이며, 조정 신하들의 방해로 궁궐을 물러나지 않으면 안될 작자의 비장한 심정도 엿보인다” 75) 고 했는데 정곡을 찌른 해석이라 하겠다. 윤성근은 이 작품에 대하여 첫 수에서 꿈인가 생시인가 하고 의심했던 것이 여기서는 풋잠의 꿈이 된다. 옥황은 웃으시되 군선은 꾸짖는다는 것은 초장과 같다.


백만 억 창생을 묻는 것은 정치를 묻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경륜을 펴보려는 뜻이다. 워낙 풋잠의 꿈이니 자기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물러났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76) 고 풀이했다. 하여튼 이 작품은 백성의 고달픈 삶은 돌보지 않고 이익만 앞세우는 당파의 권력 다툼과 추악한 정치 현실을 혐오와 唾棄의 대상으로 노래 부른 것이다. 이런 현실을 타개 하기 위해 임금에게 직소를 시도해보지만 임금께 접근도 할 수 없는 간신의 장막이 드리 워져 있어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아뢸 수 없는 고산의 깊은 한숨과 탄식을 읽을 수 있다.
<夢天謠 1>, <夢天謠 2>를 대비해보면 <夢天謠 1>의 초장에 ‘샹해련가 꿈이런가 백옥


75) 박성의,『松江․蘆溪․孤山의 詩歌文學』, 현암사, 1968, p.456.
76) 윤성근,『윤선도 작품집』, 형설출판사, 1977,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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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올라가니’는 <夢天謠 2>의 초장에 ‘풋잠에 꿈을 꾸어 十二樓에 드러가니’를 표현만 바꾸었지 내용은 같다. 중장도 <夢天謠 1>에서 ‘옥황은 반기시나 군션이 꺼리나다’와 <夢 天謠 2>의 ‘옥황은 우스시되 군션이 꾸짇다’와 같다. 다만 종장에서 <夢天謠 1>은 ‘자 연을 벗삼아 살자’고 했으나 <夢天謠 2>는 자연을 벗삼아 살면 백만 억 창생의 백성생활 문제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걱정이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고산은 임금과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논의하고 싶은데 간신 모리배들이 배척하고 방해함으로써 현실적으로 임금과 만나지도 못하며 그의 정치적 이상을 마음껏 펼 수 없는 좌절, 실의, 안타까움, 한탄을 이 작품 속에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히 이저신제 므슴 術슬로 기워낸고
白玉옥樓루 重듕修슈제 엇던 바치 일워낸고
玉옥皇황끠 와보쟈더니 다 몯야 오나다 <夢天謠 3>


이 작품은 경국제민의 뜻을 품고 임금님께 나아갔으나 아뢸 말씀을 다 못 아뢰고 퇴궐한 고산의 실의에 찬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초장에는 하늘이 이즈러진데 무슨 기술로 기워낼 것인가의 물음과 중장에 백옥루를 중수할 때에 어떤 장인이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옥황께 이것저것 다 여쭈어 보고자 했는데, 뭇 신하들의 방해로 다 못 여쭈어 보고 왔다는 내용으로 우국 충군과 애민의 뜻이 담겨 있다. 고산의 이상은 백옥루에 올라가 백옥루 중수 문제(기우러져 가는 사직을 바로 세우고 임금과 함께 조정의 재건을 도모하는 것이 고산이 품고 있는 생각임),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려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의논하려고 옥황(임금)께 여쭈어 보고자 했는데 신하들의 방해로 다 못하였다는 우국충정과 애민정신이 토로되어 있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朝臣들의 명리와 권세에만 눈이 어둡고 국민의 복지와 허약한 국가에는 염두에도 없고 현사회상은 극도로 부패하였다. 혼탁한 조정과 어지러운 사회를 다시 바로 잡고 고치는데는 어찌하면 되겠는가 이즈러진 하늘을 다시 기워냈다고 하는 여과씨의 신묘한 術이 있어야 하고, 또 백옥루를 중수한 공인과 같은 위대한 賢相이 나와야 비로소 가능하겠다. 이런 묘책과 인재를 왕께 말씀드려 물어보고자 하였는데 조신들의 방해로 못하고 돌아오는 울분과 개탄이 정치에 실패한 시인의 감정을 통하여 토로되었다. 77)


77) 이재수, 전게서,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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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天謠 3>은 기울어져 가는 사직을 바로 세우려는 우국 연군의 충정을 토로한 것 78)
이다. 시조 종장에서 도가적 표현을 빌어 훌륭한 정사를 베풀 수 있는 방법을 묻고자 한것은 꿈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꿈에 의탁한 것이라고 본다.『소학』의 「立 」의 실천으로 가난한 서민의 편에 선 동정과 상부상조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還환子자타 산다 고 그사 그르다 니
夷이齊졔의 노픈 줄을 이렁구렁 일관디고
어즈버 사이야 외랴 운의 타시로다 79) <饑 歎>


위 작품은 <饑 歎>으로 당시 백성들의 생활의 어려움과 고산의 애민사상을 볼 수 있다. 그 예로 伯夷․叔齊의 古事를 들었다. 백이․숙제 형제는 殷의 紂王때 孤竹君의 두아들로서 周의 武王이 姜太公과 함께 주왕을 토벌하려 갈 때 주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토벌하는 것은 의에 어긋납니다.”고 하면서 말렸다. 이때 武王은 칼을 빼어 목을 치려하니 강태공이 “이 분들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목을 쳐서는 아니 됩니다.”고 말렸다. 殷나라는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졌으니 백이․숙제는 의롭지 못한 제후인 무왕이 세운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首陽山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으며 연명하다가 아사했다는 고사인데, 이 시조에서는 충성스럽고 청렴한 백이․숙제의 정신을 높이 기리고 있다.


그리고 백이․숙제를 기세라는 절박한 현재의 문제에 대한 탈출구의 하나로 인용하고 있으며, ‘알관디고’, ‘타시로다’의 단정적 어투를 사용하여 작자의 절실한 심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그 당시 거듭된 전란으로 국가의 경제력은 극도로 곤궁하고 궁핍한 농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는데, 권세가들은 이런 상황을 구제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당파와 권력싸움에 골몰하여 백성의 생활은 가렴주구로 더 한층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이 작품은 수양산에서 주려 죽은 백이, 숙제를 부러워하고 있다. 여름 내내 고생하여 농사지어 환곡을 상환하고 나면 배고픔의 반복이요,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고 이제처럼 굶어 죽는 것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산은 이 절박한 현실을 그 해의 운명 탓으로 돌려 풍년이 들면 나을 것이란 기대로 백성을 위로하고 자신의 쓰라림을 달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 고산은 백성을 위한 정치로 <時弊四條疏>를 올려 그의 경세제민, 우국충 정의 연민사상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다.


78) 이용숙,「孤山 尹善道의 詩歌硏究」, 원광대, 박사학위논문, 1986, p.55.
79) <山中新曲>, <饑歲歎>,『孤山遺稿』卷六 下, 別集歌辭,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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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석陽양이 됴타마는 황昏혼이 갓깁거다
셰여라 셰여라
바회 우희에 구븐 길 솔 아래 빗겨 잇다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碧벽水슈鶯聲셩이 곳곳이 들리다 <어부사시사 夏 7>


이 작품은 자연을 노래한 서경적 작품으로 초장은 ‘석양’, ‘황혼’ 등의 ‘시대적인 것’ 중장은 ‘바위’, ‘굽은 길’, ‘솔’ 등의 시각, 공간적인 것 종장은 벽수앵성의 청각적인 다양한 이미지를 제공하나 어둡고 고단한 농어촌의 지친 냄새가 풍긴다. ‘황혼’, ‘석양’은 어둠, 노쇠, 쇠락, 서글픔의 이미지를 주며 이것은 이이첨 등 소인배의 영락를 비유하며 굽은 길의 이미지는 간신배의 잘못된 정치와 그들의 전횡을 상징하며, 벽수앵성의 껄끄롭고 조화 롭지 못한 울음은 백성의 원성을 비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은 고기잡이를 마치고 뱃머리를 돌려 귀가하는 길의 정경이 기쁘지 않고 불만에 찬 분위기를 자아낸다. 권신들이 그들의 권력 유지와 이권을 위한 다툼으로 백성을 돌보지 않고 가난한 생활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온 나라에 들려옴을 노래한 우국연민의 시가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는 비유와 상징이 성공의 결정적 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일 수는 있어도 그 해석은 애매모호하게 하는 요인도 된다. 원용문은 “비유와 상징의 차이는 원관념의 존재여부와 크게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원관념이 나타나 있으면서 비유, 생략되었으면 상징이라는 것이다.” 80) 고 했다. 그러므로 비유보다 원관념이 생략된 상징은 애매성이 더 크며 그야말로 각인각색의 해석을 낳게 한다. 특히 창조적 상징은 시어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해석상 오류를 낳게 되는 경우도 많다.


月월出츌山산이 놉더니마 믜운거시 안개로다
天텬王왕 第뎨一일峯봉을 일시예 리와다
두어라 퍼딘 휘면 안개 아니 거드랴 <朝霧謠>


이 시조에서는 주제가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아 이 작품을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 하는


80) 원용문,『尹善道文學硏究』, 국학자료원, 1989,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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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독자의 몫이다. 이 시조를 두고 박성의는 “당시 조정을 싸고도는 간신들을 증오하는 풍자성인 듯하다.” 81) 고 하였다. 물론 시에 있어서 작품의 주제는 독자의 받아들이는 눈높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위 작품의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윤성근은 “월출산 천왕봉은 자신의 모습을 상징한다. 천왕봉이 높아서 좋지만 안개가 가리고 있다. 안개는 천왕봉의 높은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게 가리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흔히 간신이라는 주관적으로 정의되는 사람들이다.” 82) 고하였다. <朝霧謠>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천왕 제일봉’을 윤선도 자신이라고 풀이했고 ‘안 개’를 간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천왕제일봉이 고산 자신이라면 월출산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자기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들을 말한다. 시적 자아가 멀리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그당시의 조정 정치상황과 자신의 희망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른 견해는 문영오의 해석인데 “此 首를 탁의와 풍자로 볼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서경시로 받아들여야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83) 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탁의와 풍자로 볼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서경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시 라면 객관적 서술법을 써야 하고 자연경치를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에서 ‘믜운거시 안개로다’는 주관적 감정의 돌출을 나타냈으며 ‘두어라 퍼딘 휘면 안개 아니 거드랴’는 작자의 희망과 예견을 강력히 드러냈다 하겠다.


그런데 이처럼 작가의 감정, 희망이 나타나 있고 신념이 드러난 작품을 서경시라고 규정해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작품 <朝霧謠>는 풍자적 수법에 의한 상징적인 작품이라 생각된다. 단순히 서경적으로 월출산 천왕봉에 걸려 있는 안개를 노래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천왕제일봉’은 임금을 상징하고 ‘안개’는 간신에 비유하여 그 당시 조정 에서 임금을 둘러싸고 어지럽게 하는 무리들의 횡포를 상징한 것이다. ‘믜운거시 안개’는 노골적인 적의로 간신에 대한 저항의식을 느낄 수 있다. 종장에는 밝은 세상과 정의로운 세상이 온다면 그의 희망과 신념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될 것임을 노래하고, 언젠가는 경세제민의 기회가 오리라는 희망적인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 시조는 임금이 간신들에 둘러싸여 백성의 원성과 충성스러운 신하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어지로운 정치와 병란으로 인한 백성의 피폐한 생활을 알지 못하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했다. 바른 세상, 밝은 세상, 백성을 위하는 세력이 언젠가 정권을 잡으면 간신들은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81) 박성의,『고산시가』, 정음사, 1957, p.12.
82) 윤성근, 전게서, p.16.
83) 문영오, 전게서,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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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 상징의 대표적 시라 할 수 있다.


3) 修身齊家


윤고산의 모든 작품이 유교사상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특히 유교적 도덕관과 선비정 신이 잘 나타난 작품은 <五友歌>가 아닐까 생각된다.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면서 우리에게 어떤 느낌, 교훈을 제시하여 부지중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 참문학일 것이 다.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문학은 교훈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五友歌>도 이 범주에 속하면서도 무척 아름다운 작품이다. <五友歌>에 추상되어 있는 관념에서 유교적 도덕성을 살펴본다.


고산의 <五友歌>는 서시 등 모두 6수인데 종전에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였다.
李在秀는 <五友歌>를 찬미하는 것은, 끊이지 않고 맑게 흐르는 물(水), 변함없는 바위 (石), 눈서리를 모르는 솔(松), 四時에 푸른 대(竹), 보고도 말 아니하는 달(月)에서 五友의 기특한 점을 송영하였는데 이런 것으로 살펴보면 작자의 자연에 대한 친밀감과 자연체관의 비범함을 가히 알 수 있다. 84) 고 하였다. 崔珍源은 관념으로서의 자연은 용해적인 존재 로서의 자연현상이 아니오,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 본래 그런 것이다. 곧 無爲이다. 그렇 다면 자연의 관념화는 자연을 무위로 관념하는 경지다. 그러므로 수․석․송․죽․월을 관념화한 不斷․ 不變․不屈․不欲․不言은 곧 무위에 귀일한다. 85) 고 했다. 그러나 논리 적으로 볼 때 무리가 따른다. <五友歌>에 나타난 관념이 일반의 관념을 대표할 수 없으며 <五友歌>에서 추상되어 있는 관념은 무위가 아니란 것이 확실하다. <五友歌>의 자연에 대한 관념을 부단․불변․불굴․불욕․불언 등 부정적 개념으로 파악하면 개념의 내포가 확산적이고 무한하므로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고 그 자체가 공허하다. <五友歌>에서 추상되어 있는 관념에 대하여 윤성근은 유교 윤리와 관련하여 논의를 전개하였는데 자연 물의 긍정적 성격을 유형별로 정리한 것 86) 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맑다 깨끗하다 (水) 청결성


84) 이재수, 전게서, p.96.
85) 최진원,『韓國文學史』, 대한민국학술원, 1984, p.236.
86) 윤성근,『尹孤山의 自然觀』,『文化批評』7, 8회, 아한학회, 1970,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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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칠 때가 없다 (水) 변하지 않는다 (石) 항상성
사시에 푸르다 (竹)
(3) 눈서리를 모른다 (松) 의연성

(4) 구천에 뿌리곧다 (松) 강직성

(5) 나무도 풀도 아니다 (竹) 중용성

(6) 솔이 비어 있다 (竹) 통달성

(7) 높이 떠 있다 (月) 고고성

(8) 만물을 다 비친다 (月) 겸선성

(9) 말하지 않는다 (月) 침묵성


<五友歌>에 추상되어 있는 9가지의 유교 덕목을 관념화하였다. 고산은 수․석․송․죽 에서 자아의 인격완성이라는 내적 윤리에 관심을 가졌다면 ‘月’에서는 광명으로, 외적 윤리가 함께 드러나 유교의 일반 윤리의 양면성을 모두 구비하여 나타낸 것이다. 문영오는 “고산은 오우를 도학의 실천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87) 고 말한 바 있다. 달에서 표상된 관념인 겸선성은 여타의 관념보다 더 가치가 있으며 고산은 내적 윤리와 외적 윤리를 함께 추구하면서도 외적 겸선의 윤리에 더 가치를 부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유교도덕의 본질과도 합치된다. (<五友歌> 서시 중장에 月을 더욱 높이고 있다. 즉 ‘동산에 달 오르 니’에 있다) 위의 여러 가지 견해를 종합할 때 <五友歌>는 유교적 윤리관이 나타난 작품이라 하겠 다. <山中新曲>중 <五友歌>는 고산의 나이 56세(1642년)에 영덕 배소에서 풀려나 3년후 해남 금쇄동에서 은일하고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 그가 갈 곳은 자연을 벗삼지 않을수 없도록 만든 정치현실에 따른 생활환경이었으리라. 조선시대 벼슬에서 물러난 사대부가 갈 곳은 향리에 묻혀 자연을 벗삼아 살거나 후학양성에 힘쓰는 것이 그들의 생활상이 었다.


<오우가>를 지은 곳인 금쇄동의 <금쇄동기>(영덕 배소에서 풀려난 다음 해인 1640년 그의 나이 54세 때 지은 기록문)에 의하면, 금쇄동은 산의 제일봉의 높이가 일월을 곁에 둘만큼 높아 풍우가 임하고, 골짜기는 고요하고 맑고 밝아 그윽하면서도 안개가 끼여 있고 괴이하고 특이하면서 아름다웠다. 골은 심히 깊고 험하고 멀고 아득하여 사람의 자취도 드물고 벼랑, 절벽이 높고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금쇄동의 지형산수를


87) 문영오,「孤山尹善道短歌硏究」,『동악어문론집』8호, 동국대, 1972,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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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한 글인데, 고산은 이와 같이 인적이 드문 산중에서 수․석․송․죽․월을 벗하여 세상과 다툼이 없이 살겠다고 했다. 속세의 인간들과는 벗할 수 없고, 자연의 오우와 벗을 삼을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은 그의 생활 환경처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자연을 벗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자연관에서 읽을 수 있다. 때문에 고산의 <五友歌 >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되어 왔으나 대체로 자연관이나 사상적 접근에 초점이 집중되어 왔다. 또한 이 시조가 선행의 어떤 작품에 관련 내지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다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었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고산의 <오우가> 제작은 石灘의 영향이 없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88) 본고에서는 그의 작품에 유교적 윤리 도덕관이 어떻게 표현 또는 스며있는가에 대해서만 논술해 보기로 하겠다.


내 버디 몃치나니 水슈石셕과 松숑竹듁이라
동산에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밧긔 더야 머엇리 <五友歌 1>


이 시조는 <五友歌>의 서시이다. 작자의 생활태도나 의지가 잘 나타났으며 고산의 자연관, 현실생활관이 솔직히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자연에 몰입하여 인간을 벗하지 않고 수․ 석․송․죽․월을 벗하며 살겠다는 그의 뜻이 함축된 작품이다. 세상의 명리, 부귀 영화도 버리고 자연과 벗하여 깨끗하게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나타나 있다. 초장에서 ‘내 버디 몃치냐 니’의 자문자답형으로 수․석․송․죽의 지상의 벗을 제시하고 중장에 이르러 천상의 벗인 月을 소개하여 앞에서 언급한 외적 윤리, 겸선성을 강조하여 유교의 본질적 덕목을 교훈적으로 제시하였다. 종장에 ‘두어라 이 다밧긔 또 더여 머엇리’에서 그의 자연관과 오우의 상징하는 의미가 나타나 있다.


구룸비치 조타나 검기를 로다.
람소 다나 그칠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뉘업기 믈 뿐인가 노라 <五友歌 2>


이 작품에서 바람과 구름은 변덕스러우니 그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람과 구름은 시류에 따라 자기의 정체성도 없이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배․간신배의 이미지를 준다.
88) 박준규,「윤선도의 오우가 연구」,『古詩歌硏究』제4집, 한국고시가문학회, 1997,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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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의 <漁父四時詞>, <夜深謠>, <春曉吟> 등에서 바람과 구름을 부정적 이미지인 정치적 간신 훼방꾼으로 본 것이다. 종장은 결론으로 깨끗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자기의 벗이라는 것이다. 즉 깨끗하면서 쉬지 않고 전진하는 노력을 의미하는 고산의 유교적 윤리관을 살펴볼 수 있다. 고산은 깨끗함(청결)과 변함없는 마음(신뢰)을 가진 사람이 인격 자임으로 그를 벗한다는 교훈적 의미가 들어있다. 또한 주야불식과 청정은 고산의 자기 연마의 규범으로 제시하였는지도 모른다.


고즌 므스일로 퓌면서 쉬이디고
플은 어이야 프르 누르니
아마도 변티 아닐 바희뿐인가 노라 <五友歌 3>


이 작품도 <五友歌 2>와 같이 초․중장은 부정의 대상을 벗과 비교하여 열거하고, 종장에서 벗을 삼는 이유와 벗을 말하고 있다. 초장에서 꽃은 아름답고 화사하여 많은 사람이 상찬의 대상으로 사랑을 받으나 쉽게 시들어 버리니 좋지 않다. 중장에서 풀도 푸른듯 하다가, 곧 누렇게 시들어 버리니 벗을 삼을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꽃은 “巧言令色 鮮矣仁”이란 말과 같이 그럴듯한 명분을 세우는 시배들은 권력의 해바라기가 되어 쉽게 지조를 바꾸고 권력을 향해 움직여 변절하기 쉬운 것이며, 풀도 푸르다가 누렇게 변하니 쉽게 변하는 것을 싫어하는 고산의 인생관을 읽을 수 있다. 꽃과 풀은 일시적 인데 비하여 바위는 영구적이고, 화초는 여성적인데 비하여 바위는 남성적이요, 화초는 세속적인데 바위는 은일적․철학적이며 은둔사상과 부합된다. 바위는 묵중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 그래서 그는 벗으로 삼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꽃과 풀은 변절되는 대상으로 절개와 지조가 없는 간신배들을 비유했으며, 바위는 불변, 묵중, 침묵, 무가식의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으므로 고산의 인생관과 일치되어 벗으로 삼겠다고 했다.


더우면 곳퓌고 치우면 닙디거
솔아 너 얻디 눈 서리 모다
구쳔의 블희 고줄을 글로 야 아노라 <五友歌 4>


이 작품에서는 소나무를 벗으로 삼겠다고 했다. 솔의 덕성은 절개와 지조로 상징되어 왔으며, 늠연한 자태와 風霜寒雪에 불변하는 강건 숭고한 관념을 가지므로 예로부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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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객으로부터 많이 상찬되어 왔다. 소나무의 표상성은 대개 절조를 드러낸다. 특히 솔은 가을이면 고엽이 떨어지면서도 푸른 잎이 향상하여 그 위세가 풍상에 시들지 않고 모든 초목이 설한에 파묻힌 엄동에도 늠름하며, 천지간에 꿋꿋이 서 있으니 고산의 강직한 성격과 孤高守節의 의취와 부합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많은 시인묵객이 ‘꽃’을 좋아하고 꽃에 대하여 많은 그림과 시작품을 남겼으나 유독 고산만은 꽃에 대한 작품이 없을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것이 꽃이라 할 수 있는데 자연을 사랑하면서 꽃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있을 듯도 한 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어부사시사 春 1>에 ‘강촌 온갖 고지 먼빗치 더욱 됴타’에서 “꽃”이 나오나 이 꽃은 꽃이라기보다는 강촌의 서경적 풍경의 일부 이지 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고산의 자연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고산이 자연으로 돌아간 동기를 보면 시배들의 모함, 시기, 질투, 참소에 시달려야 했고 자신에게 불리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진원이 고산의 자연관에서 말했듯이 “동서남북갈 데가 없을 때 막다른 골목, 궁지에 몰린 처지이기 때문이다. 궁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 돌파구가 河海而已 山林而已의 자연뿐이다.” 89) 즉 정계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가어옹’의 초연한 세계를 찾았다고 했으며, 윤성근은 “윤선도에 있어서 자연은 안주처이기도 하고 대피소이기도 하였다.” 90) 고 전제하고 나서 안주처로 인식한 경우에는 자연과의 합일을 통한 자연미를 발견하거나 자연에서 추상화한 관념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표현하였고, 정치적 패배의 대피소로 인식한 경우에는 자연의 위력을 빌려서 정계복귀의 꿈을 술회하였다고 언급했다. 윤성근은 고산의 자연관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과 禮訟에서의 주장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말고 현실적 관심사의 전이된 표현으로 풀이해야 한다고 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고산 자신도 눈을 현란하게 하는 가시적인 꽃이나 梅, 蘭, 菊, 목단 등의 琪花瑤草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상찬할 수 있어도 그 내면은 언제 어디서나 임금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충군 애민에 있기 때문에 꽃이 그의 작품에 주제로서 등장치 못하고, 그의 사상을 관념화할 수있는 다른 자연대상물을 찾아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이 떨어지는 것이 자연현상인데 독야청청한 솔은 예외로 ‘변절하지 않는 존재’로서 형상화되어 있다. 종장에 눈서리에도 청청한 것을 보아서 땅속 깊이 내려 있는 뿌리도 곧은 줄 알겠다 했다. 안병태는 고산의 자연관을 이야기하면서 이 작품 종장에 대해서 시적 통찰력은 과학자보다 날카로운 눈과 철학자보다 슬기로운 마음으로 이를 알아 91) 차릴 수 있다고 했


89) 최진원,「孤山의 自然觀」,『성대논문집』10, 1965, p.66.
90) 윤성근,「尹善道의 自然觀」,『文化批評』7, 8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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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뿌리 곧은 줄 알겠다고 한 것은 사람의 겉 행동을 보면 속마음까 지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고산은 이 작품에서 외형적인 면을 보면 내면적인 윤리까지도 알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소나무처럼 ‘변절하지 않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을 벗삼겠다고 한 그의 도덕관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떤 환경에도 불굴 불요하는 충신열사의 지조를 칭송한 것이니 이는 곧 작가자신의 정신과 뜻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다.


나모도 아닌거시 플도 아닌거시
곳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다
뎌러코 四時시에 프르니 그를 됴하 노라 <五友歌 5>


『竹譜』에는 “대나무를 굳세지도 연약하지도 않고 풀도 아니며 나무도 아니며 속은텅 비고 실함이 약간 다르나 마디가 있다”고 하였다. 草類로서 겨울을 이겨 시들지 않으 므로 동생초라고 하여 풀이라고 하는 문헌도 있다. 어떻든 겨울에도 시들지 않음과 부러 지기는 쉽되 꺽이지 않고 굽혀지지 않은 ‘청고한 절개’를 상징하는 말로 상용되고 있다.


竹에서 그 사상적 표출은 인생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초장에서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중장에 곳기 뉘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다. 나무도 풀도 모두 시드는 풍상한설에 비목비초이면서 사시에 푸르고 곧게 자라나는 모습은 세찬 바람에도 굽히지 않으니 청한한 절사의 기풍과 고고한 선비의 기상이 풍긴다 하겠다. 더구나 속이 텅 비어 있지만 꺾이지도 굽히지도 않고 곧으니 청허와 빈한을 간직한 채 항상성(푸르다)이 있어 군자의 상이라 할 수 있다. 선비의 修己는 자기의 마음을 비워(속은 어이 뷔연다) 대의명분을 세우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데, 이 竹이야말로 유교이념의 본질을 함축한 것이며 哲理라 하겠다. 요사이 정치가들도 흔히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데 욕심없다, 사심없다, 겸허하다는 뜻으로 대나무의 속이 비어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뜻의 노래인 것 같다.


자근거시 노피 떠서 만믈을 다 비취니
밤듕의 光광明명이 너만니 또 잇냐
보고도 말 아니니 내 벋인가 하노라 <五友歌 6>


91) 안병태,「尹孤山의 五友歌에 나타난 自然觀」,『양주동박사고희기념논문집』동국대, 1973, p.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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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은 달에 대한 설명이고 중장은 달의 가치평가이며, 초․중장은 외형적 묘사이며 종장은 달의 속성과 내면묘사로서 외면에서는 암흑을 비추는 고매한 인격으로 승화시켰고, 내면으로는 그 위대한 힘을 성자에 비겨서 벗을 삼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춰 밝게 해 주니 대단히 위대한 것이다. ‘너만 니 또 있느냐?’ 고 반문한 것은 그 가치의 절대성과 위대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달을 ‘너’라고 말할 수있는 대상은 손아랫사람이나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간의 호칭이기도 하다.


그러나 달의 ‘절대성’과 ‘위대성’을 인정한다면 ‘너’라고 할 수 있을까? 고산자신의 특수한 처지, 남들과 쉽게 같을 수 없는 그의 처지를 달에 비유하였고, 보고도 말 아니하니 벗으로 삼았기 때문이리라. 밤중에 만물을 다 비추는 달, 이것은 고시가에서 달은 고독, 비애, 회고 등 恨別의 표적으로 묘사되었으나 고산에게서는 무언의 대상으로 표착되었 다. 92) 는 데에 그 나름의 윤리관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보고도 말 아니하는 존재는 믿음직스럽고 묵중한 덕을 지녔으니 벗으로 삼고 광명한 달이 혼탁한 세상의 모든 욕물과 비리, 부정 부패를 비춰보고도 말 아니하는 군자를 상징하는 의미의 달이다. 만물을 고루고루 밝게 차별 없이 비추는 성자의 경지에 도달하였고 시비와 비난을 단절하는 침묵의 자세로 표상 되어있다. 고산이 달의 무언의 미덕을 기리게 된 것은 세상인심이 혼탁하고 모함과 비방이 난무한 것을 싫어했기 때문 이요, 피해자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지금까지 고산의 <五友歌>를 통하여 유교적 도덕관을 찾아보려고 했다. <五友歌>는 유학을 근간으로 하면서 노장의 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고산의 이러한 자연관은 인간적 결함을 자연에서 배우며 도가사상에 접근하게 되었는데 유․불․선을 넘나들면서 자연미를 발견하고, 자연물이 상징하는 이미지를 부각시켜 우리에게 교훈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물은 ‘깨끗하고 쉬지 않고 전진하는 존재’를, 바위는 ‘변하지 않은 존재’, 솔은 ‘변절하지 않는 지조 있는 존재’, 대나무는 ‘절개를 지키는 곧은 존재’, 달은 ‘침묵의 덕을 지닌 존재’로 표상 되어있다. 이 <五友歌>는 인간이 지녀야 할 윤리 도덕관을 엄정하게 밝힌 교훈적인 시조이다. 고산의 시조는 고산이 직접 내용을 설명하거나 교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것을 읽고 음미하고 분석해서 깨닫도록 해 준다.
그래서 고산의 작품은 비유, 상징성을 지닌 다원적 구조로 독자에 따라서 그 의미 해석이 다양하며,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도록 상징적 수법이 원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五友歌>는 수․석․송․죽․월에 감정을 이입시키고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굴절시켰지


92) 문영오, 전게서,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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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이런 모든 현상은 본성의 수분, 즉 ‘답게’에 귀일됨은 말할 것도 없다. 물이 물다울 때, 돌이 돌다울 때, 솔이 솔다울 때, 대가 대다울 때, 달이 달다울 때 만물은 평정을 얻을 수있는 것이며, 평천하가 된다는 사실은 고산이 오도한 것이다. 93) 고산은 수분의 진리를 천지 자연만물에서 터득하고 이를 인간사에 확대해서 바라봄으로써 도덕적 교훈으로 삼으 려고 했던 것이다.


4) 避世 遁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작품은 대단히 많다. 자연에 몰입하여 자아를 잊고자 하는 사람들은 정치사회가 어지러울수록 많은데 연산조 이후에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많은 것은 사화와 당쟁이 심했기 때문인데 이는 정치적으로 몸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윤고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생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조 20년(1587년)부터 현종 12년(1671년)까지의 삶은 당쟁의 풍파와 병란으로 인하여 백성은 곤궁에 허덕일 때였다. 고산은 유배, 은둔, 출사의 반복된 생활 속에서 은둔시 기에는 자연을 노래하며 동화, 흥취 되기도 하고 자연을 완상하며 그 속에서 교훈을 얻는 작품도 남겼다.


앞장에서도 언급했지만 고산은 유학의 이념인 우국 충군과 경세제민을 항상 간직하면서 현실정치와 완전히 손을 끊지 못하고 마음은 늘 그곳에 가 있었다. 즉 그의 이상은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경국제민에 있었고 은둔에 따른 자연귀의는 정치적 패배의 피세처이 었지 이상향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김동욱은 “인간의 적극적인 면은 천명을 구현하기 위한 작위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왕도의 三綱五倫, 追遠愼終, 大義名分, 立身揚名이 사대 부에게 국가사회와 가정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가 생긴다. 그러나 소극적인 면은 산야에 숨은 은둔사상으로 나타난다.” 94) 고 하여 유자들의 처세관을 규정하였다. 당쟁으로 서로 헐뜯고 참소하는 비정한 사회에서 실의와 패배로 고산은 자연과 더불어 안분지족하며 유유자적함으로써 현실의 고뇌를 잊고자 하였다. 즉 고산은 자연을 현실의 고뇌와 좌절을 잊게 해 주는 자기 위안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고산이 자연에 은둔하며 영덕유배에서 풀려나 효종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13년 간(1639∼1652)은 세속적인 멍에에서 벗어나 있어 이 시기의 작품은 안빈낙도사상이 바탕을 이루어 이는 곧 유가사상에서 파생된 것으


93) 문영오,『孤山文學詳論』, 태학사, 2001, p.176.
94) 김동욱,『국문학사』, 일신사, 1976,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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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생각된다. 공자의 말씀 가운데 어질도다 희야는 한 대그릇 밥과 하나의 표주밥 그릇으로 마시고 누추한 골목길에 살면서 지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근심스러움을 견디지 못했으나 그렇게 곤궁한 가운데서도 그 본성을 잃지 않으시니 훌륭하도다. 희야! 95) 라고 顔回를 칭찬했다든지 또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도다. 義 아니면서 富하고 또 귀한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96) 고 한 것은 공자의 안빈낙도 사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飯兩時瓊液酒 보리밥 한두끼에 구슬같은 술이니
終身此外更何求 97) 종신토록 이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


위의 내용은 孔子가 顔回를 칭찬한 ‘ 一 食 一瓢 在陋巷’과 ‘飯疏食 水’와 일맥상통한 것이다. 어떻든 고산은 退溪, 南溟과 같이 관계에 뜻이 없어 학문을 연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자연 속에 묻히고 즐긴 것이 아니었다. 관계에서 물러나 細窮力盡하여 어쩔 수 없을 때 자연을 찾아 현실적 고뇌와 좌절, 비애로부터 위무도 받고 피폐한 심신의 안식처이면서 피난처로서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고산은 관로에 있을 때나 자연에서 林泉 閑興할 때 그가 끊임없이 추구하며 잊을 수 없는 자신의 심정을 <金鎖洞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집은 진실로 나로 하여금 훨훨 날아 세상을 버리고 홀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올라가는 의취를 갖게 할 수도 있지만 나로 하여금 父子君臣의 윤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98)


또한 <答人書丁丑>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몸이 강호에 있어서 조정[廊廟]이 이미 멀어졌지만 모든 소리가 다 조용해지고 밝은 달이 공중에 매달려 있을 때에는 언제나 하늘 한 구석에 미인을 바라보는 뜻이 있어서, 곧


95) 賢哉回也 一 食一瓢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96) 飯疏食 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97)『孤山遺稿』卷一, p.78.
98) <금쇄동기>,『孤山遺稿』卷五 下.
(此堂固能使我 瓢瓢然有遺世獨立 羽化登仙之意 而終亦使我 不外於父子君臣之倫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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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수레에 임금의 얼굴과 봉림 지우를 생각하게 됩니다. 99)
위의 글에서는 廊廟와 멀리 떨어진 강호에서도 임금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조정과 강호자연을 하나로 파악하는 윤고산의 避世觀은 연군지정으로 귀결되어 고산시가의 기본적인 정서가 되었다.


초기의 <遣 謠>, <雨後謠>, 말기의 <夢天謠>는 물론 연주지정을 노래하고 있지만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중기의 <山中新曲>, <山中續新曲>, <漁父四時詞> 등에는 연군지정의 바탕 위에서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金鎖洞記>와 <答人書丁丑>에서 보았듯이 그의 일편단심은 충군연주이다. 연군지정과는 거리가 먼 듯한 <漁父四時詞>조차 연군지 정의 바탕 위에서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인용되고 있는 고사를 살펴보아도 드러난다. 예컨대 작품을 살펴보면 屈原은 충직과 청빈한 정신 때문에 멱라수에서 빠져 죽고 충성심 때문에 楚江을 건너간 오자서의 古事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믉결이 흐리거든 발을 싯다 엇더리
이어라 이어라
오江강의 가쟈 니 千쳔年년怒노濤도 슬플로다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楚초江강의 가쟈 니 魚어腹복忠튱魂혼 낟글셰라 <어부사시사 夏 4>


위에서는 엄자릉과 강태공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모두 충신들에 얽힌 사연으로 연군지정과 관련이 되어있다.


乾건坤곤이 제곰인가 이거시 어드메오
 여라  여라
西서風풍塵딘 몯미츠니 부체야 머엇리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드론 말이 업서시니 귀 시서 머엇리 <어부사시사 秋 8>


99) <答人書丁丑>,『孤山遺稿』卷四.
(身處江湖 廊廟旣遠 而每當萬聲俱寂 皓月懸空之時 悠然有望美人兮 天一方之意 仍想 鶴駕 玉容鳳林芝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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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西風塵의 고사는 소인배 간신에 얽힌 이야기로서 이 역시 부정을 통한 연군지정을 나타내고 있는 점은 마찬가지다. 또한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山中新曲>, <山中續新曲 >, <漁父四時詞> 등이 충군연주지사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의 작품이 연주지정이라는 기본적 정서의 틀 위에서 피세 사상이 투사된 시가라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누고셔 三삼公공도곤 낫다 더니 萬만 승이 이만 랴
이제로 헤어든 소父부許허由유ㅣ 냑돗더라
아마도 林님泉쳔閑한興흥을 비길 곳이 업세라 <漫興 4>


이 작품은 자연침잠의 안락한 생활강조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흥취가 나타나 있는 전통적인 강호가도의 풍류가 잘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義에 어긋나는 利를 탐하지 않는 정신과 군자는 먹는데 배부른 것을 구하지 않으며 居하는데 편안한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활을 숭상해 왔다. 소부․허유의 고사를 인용하여 도가류의 은일 사상과 고매한 인격으로 탈속하는 삶을 그리 워하며 바라고 있다. 그의 생활은 벼슬에 뜻이 없고 세상의 어느 생활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족하여 흥에 겨워 노래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부귀, 명리, 허식, 물욕을 버리고 번잡한 속세를 떠나 대자연속에 깊숙이 묻혀 유유자적, 안빈낙도하는 도가적 은사로서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정가에 있을 때 번언과 비방이 뒤따라 고뇌와 치욕의 고배를 마신 고산이었기에 삼공의 지위도 만승의 천자 자리 또한 심산궁곡의 자기 삶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자연에 밀착된 고산이 자연 탐익과 잘 조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水슈國국의 히 드니 고기마다 져 읻다
닫 드러라 닫 드러라 萬만頃경澄딩波파의 슬지 容용與여쟈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人인間간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욱 됴타 <어부사시사 秋 2>


초가을 점점 고기가 살쪄 있는 만경징파에 마음껏 놀아보자고 한 것은 목적이 고기잡는 것이 아니라 실컷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다. 자연은 마음껏 놀 수 있는 자원과 장소를 제공하는 의미를 지녔다. 종장의 ‘인간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욱 됴타’고 한 것은 평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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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 출사, 퇴사의 반복으로 시달려온 고산으로서는 그러한 정치현실을 멀리할수록 피해를 당하지 않으니 좋다는 인생관의 한 폭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표현된 자연은 안식처 이며 이상향으로서, 인간이 사는 세상과 떨어져 혼탁한 세상소리가 들리지 않아 편히 쉴수 있는 이상적인 곳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는 고산의 처절한 번뇌의 그림 자가 드리워져 있고 세상의 부정을 읽을 수 있는데 투쟁의 패배를 자연에서 즐거움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이며, 이러한 부정(세상기피)은 고기를 낚고 자연에 동화되어 일체가 된것 같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자기 심정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고산의 처절한 번뇌, 피세의 병, 절제된 아픔을 유학자적인 자세에서 표출한 이 작품은 현실 정치를 철저히 잊으려는 의지가 보이는데 이는 우국의 정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옷 우희 서리 오 차운 줄을 모로다
닫 디여라 닫 디여라
釣됴船션이 죱다 나 浮부世셰과 얻더니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일도 이리 고 모뢰도 이리 쟈 <어부사시사 秋 9>


이 작품에서 고산의 세상 보는 관점이 부정적임을 보게 되는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도 모뢰도’에서 영원한 부정을 대하게 된다. 이는 그의 관료생활이나 현실이 뜻처럼 되지 아니하고 차원 높은 지성과 이상향의 추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00) 고산은 정치, 문학, 예론, 의술, 지리학 등에 통달했으며 지적인 것이 바탕이 된 이상향의 추구는 현실용납이 불가능했고 그럴수록 고산은 현실부정의 일변도로 경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고산의 심적 상황이 위 시조에 표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좁디좁은 고깃배 위에서 서리를 맞지마는 추운 줄도 모르고 갑갑하기 이를 데 없으나 이것도 모르고 浮世가 아닌 다음에야 모두 다 좋다는 뜻이다. 피세의 병이 얼마나 깊었으며 당쟁의 회오리에 얼마나 지쳤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고산은 이러한 심적 정황이 작품에 투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여기서 釣船은 고깃배라기보다 은둔의 현장이며 귀의처인 자연의 일부이다.


내 셩이 게으르더니 하히 아실샤
人인間간萬만事 일도 아니 맛뎌


100) 정병욱,『孤山尹善道』,『文學思想』, 문학사상사, 1976, 2,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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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당 토리 업슨 江강山산을 딕히라 시도다 <漫興 5>


이 작품은 영덕 배소에서 풀려나 고향 해남 금쇄동에서 생활할 때 지은 것이다. 영덕 귀양살이는 임금님께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유배생활을 할 때도 가장 답답하며 억울하고 분한 때일 것이다. 고산은 자신보다 임금을 근심하고 나라를 위하는 이가 드물어 가복과 향민을 이끌고 임금을 도우려 강화까지 갔는데 강화는 이미 함락되고 임금은 항복하여 화의가 이루어진 후였다. 이에 세상을 잊고 울분을 달래려 제주도로 가는 길에 경치가 뛰어난 보길도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고산의 진심을 모르고 간신배가 모함하여 임금을 위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덮어쓰고 귀양살이를 했기 때문에 더욱 억울했다.


이 작품의 선행연구자들은 대개 자연애호적인 측면에서 보고 있으나 작품 제작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문맥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초장에 자기 비하와 저항심리가 담겨 있다. 중장에서는 다투는 일을 부지런히 할 수 있어야 이기는 인간만사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며 그러한 일도 나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중장의 ‘아니맛뎌’는 벼슬길에 오르고 싶은 강한 욕망과 불만의 표시로 생각된다. 종장에 ‘토리 업슨 강산’은 인간세상의 투쟁, 갈등, 모함에 염증을 느끼면서 인간은 자연보다 못하다는 멸시적, 풍자적 표현이다. 이 작품은 당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툼 없는 자연 속에서 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만 이런 현실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자연밖에 없다고 생각해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해소해 주는 돌파구로 이용했다.


어와 져므러간다 宴연息식이 맏당토다
븟터라 븟터라
 눈 쁘린 길 블근 곳 흣터딘듸 흥치며 거러가셔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雪셜月월이 西셔峰봉의 넘도록 松숑窓창을 비겨 잇쟈 <어부사시사 冬 10>


이 작품은 <漁父四時詞>의 마지막 장이다. 여기서 ‘松窓’은 서봉으로 넘어가는 설월을 바라보며 연식하고자 하는 곳을 뜻한다. 작자가 ‘松窓’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기에 이 ‘松窓’은 가는 눈이 뿌리고 붉은 꽃이 흩어진 길의 끝 저만치에 위치한 자연의 일부분으로 제시되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또한 ‘져므러간다’, ‘눈 뿌린 길 븕근 곳 흣터딘’, ‘설월’, ‘서봉’ 등은 조락이나 장애를 뜻하는 낱말들로 시상을 지배하고 있다. 초장 ‘어와 져믈어 간다’는 안식처를 찾아야 하는데 날이 점점 어두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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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 초조하고 걱정되는 사념의 표현이다. 이는 고산이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나이 65세가 되어 당시로는 上壽였으며, 인생을 마감하는 나이였다. 여기에는 국가에 봉사하고 뜻을 펼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감이 나타나 있으며, ‘어와’는 감탄사라기 보다 슬픈 한숨소리의 표현이다. 또한 빨리 ‘설월이 서봉’으로 넘어가기를 바라는 고산의 마음이 나타나 있으며, 중장에 ‘ 눈 뿌린 길 블근 곳 흣더딘’는 인생역정을 보는 것같다.


고산은 <漁父四時詞> 40수의 종장에서 자기의 굴곡 많고 파란만장한 인생, 귀양, 歸南, 출사의 되풀이된 불우한 생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시배들이 고산의 강직을 시기하여 가는 길에 눈(雪)을 뿌려 험한 길의 고생을 말하며, 종장 ‘雪月이 西峰에 넘도록 松窓을 비겨잇쟈’에서 ‘雪月’은 고산을 모함하고 참소하는 모든 세력들이 물러갈 때까지 몸을 보전 하여 기회를 기다린다는 간절한 우국의 마음이 실려 있다.


5) 自然耽溺


고산 작품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으로 천착되어 그 의미도 각양각색이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고산의 작품에는 그의 독특한 '멋'이 풍긴다.


<漁父四時詞>에서는 고산의 호탕정회와 자연에 동화되어 술을 마시고 노래부르면서 살아가는 '멋'을 알고 부릴 줄 아는 생활이 연상된다. '속세'에 대한 無碍' 바로 그런 생활이다. 그렇다고 하여 亂하거나 雜되지 않고, 흔히 말하는 객기나 호기 방탕하여 ‘멋’을 부리다가 ‘뜻’까지 잃어버리는 무절제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면서 정취 있는 ‘멋’있는 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압개예 안개 것고 뒫뫼희  비췬다
떠라 떠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 온다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江강村촌 온갓 고지 먼 비치 더옥 됴타 <어부사시사 春 1>


이 작품은 莞島 甫吉島의 아침경치를 묘사한 사실적인 한 폭의 그림 같은 서경작품이 다. 아침 어부들이 배를 띄울 때 앞 뫼에는 햇빛이 들어 안개가 점점 걷히고, 뒷산에는 해가 비치어 오는 것을 볼 때 앞 개는 동쪽 물가이며, 산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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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중장의 ‘밤 믈은 거의 지고 낮 믈이 밀려온다’는 해파를 밀물 썰물이 교차하는 시간에 맞추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그림으로 묘사했다. 초장에는 햇빛과 관계된 공간적 자연 경치라면, 중장은 물과 관계된 시간적 경치이다. 또 동적 묘사로는 ‘앞 개-뒷산’, ‘밤 물-낮 물’ 장별로 ‘햇빛-물’의 대비로서 독자의 생각이 시공을 넘나들게 한다. <어부사시사 春 1>은 미술작품을 멀리서 조용히 관조하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 머릿속에 그려주고 있다. <漁父四時詞>는 <漁父長歌>가 모태가 되었는데 우리가 <어부사시사 春 1>을 높이 평가하는데는 현토한 한시구가 전혀 없고 모두 우리 고유의 말 시가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漁어村촌 두어 집이  속에 나락들락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말가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다 <어부사시사 春 4>


정병욱은 “우선 한 폭의 그림으로써 원근법이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고 초점이 선명하게 드러나 전체적인 입체감이 적절한 볼륨으로 나타나고 있다” 101) 고 했으며 최재호는 여기서 ‘벅구기’나 ‘버들숩’의 두 사물을 통하여 춘경은 객관적이 아닌 일반상, 곧 영원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즉 단정적으로 ‘뻐꾸기다’, ‘버들숲이다’고 하지 않고 ‘벅구기인 가’, ‘버들숩인가’다고 한 것은 들리는 새소리, 보이는 푸른 숲으로 하여금 화창한 봄날을 돋아나게 하여 봄이라는 시상이 영원상에 몰입되는, 곧 물아일체의 고정된 양상으로 나타나 있다. 102) 고 했다. 문영오는 위의 시조가 여러 측면에서 음악성이 잘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첫째, 이 시조의 초장을 볼 것 같으면 그 율조가 우리네의 가장 전통적이며 우리 호흡에 알맞은 4.4조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대구까지 이루고 있으니 가히 음악의 정수를 한데 모았다 할 수 있다. 103) 고 했다.


이상 열거한 논지만 보아도 이 작품이 <漁父四時詞>중 가장 훌륭한 작품임이 입증된 다. 더욱이 ‘벅구기인가’, ‘버들숩인가’ 등 여운 있는 표현과 대구를 이루면서 작자가 명확한 단정을 짓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세계를 펼 수 있게 한 점은 뛰어난 기교라


101) 정병욱,『孤山山論』,『月刊文學』통권 9호, 월간문학사, 1969, 7, p.212.
102) 최재호,『孤山의 漁父四時詞 考究』, 이우출판사, 1979, p.238.
103) 문영오,『孤山尹善道硏究』, 태학사, 1983,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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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고산의 실생활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몰입하여 유유자적한 생활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상적으로 바라는 바는 이러한 생활 속에서 당쟁과 현실정치를 잊고자 하였다. 이재수의『尹孤山 究』에서 소개된「家 貴事」에 앞 못에 소선을 띄워 미희들을 태우고 그 찬란한 복식과 어여쁜 얼굴이 물위에 비치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노래부르게 했다는 시는 바로 <春詞 4>라고 추측된다. 이 시조는 우리에게 ․幽․閑․ 情․平和 등의 정서를 전달한다.


<어부사시사 春 1>과 <어부사시사 春 4>에서 안개 걷힌 앞 바다, 햇살 피어오르는 뒷산, 썰물 밀물이 번갈아 들고 나고 멀리 보이는 강촌의 꽃들이 아름다운 버들 숲 속에서 노래하는 뻐꾸기와 강촌의 먼 집들이 보일락 말락 맑고 깊은 소에 뛰노는 고기들 遺世獨 立 羽化而登仙하여 一快, 즉 미적 쾌감을 주고도 남을 미려조각한 그림이 眼前에 전개되어 자연 극치의 시경을 이루고 있다. 고산은 전체성 속에 조화되며 탈속한 자연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서 일쾌를 얻고 있다. 고산은 부용동의 자연미를 일쾌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시어의 수식과 기교로서 문학에 대한 예술적 자각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민 홍은 <漁父四時詞>가 보길도에서 부용동으로 미화되고 부용동은 다시 무릉도원으로 遺 世獨立한 繪餙된 자연을 정공미려한 미의식으로 창작된 작품 104) 이다고 한 摘示는 정확한 입론이라 하겠다.


고산의 <漁父四時詞>는 善․美의 이중구조를 띄고 있지만 선적인 면보다 미적인 면이더 우세하게 표출되어 있다. <漁父四時詞>에서 그려진 보길도의 자연은 산천경개가 지극히 아름답다. 여러 가지 비유법을 써서 그 지역의 특성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하고 있어 유미적 자연으로 드러나게 했다. 박요순은 “고산의 시 수법은 고산시의 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서 “인간과 속세를 떠나 금쇄동과 보길도의 자연 속에서 이룬 작품들이 순수하고 격이 높다” 105) 고 밝히고 있다.


날이 덥도다 믈 우희 고기 떧다닫 드러라 닫 드러라
며기 둘식 세식 오락가락 고야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낫대 쥐여 잇다 濁탁酒쥬ㅅ 병 시릿냐 <어부사시사 春 2>


104) 이민홍,「漁父四時詞硏究」, 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1971, p.42.
105) 박요순,『韓國詩歌의 新照明』, 탐구당, 1984,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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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초․중장은 서경의 전개로 바다의 경치를 한가롭게 그리고 있다. 초장은 관찰을 통한 물고기의 생리로, 움직임을 끌어다 보고 듣고 느껴지는 온갖 것들을 아무런 꾸밈없이 표현하여 독자의 공명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예술의 경지를 한층 높이고 있다. 중장은 당시 “白去自來 堂上燕”을 연상케 하는 평화와 고요를 나타내며, 종장은 초․중장의 아름답고 한가하며 평화가 깃든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탁주를 따르면서 생활하는 모습이 仙界로 전개되어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東동風풍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돋 라라 돋 라라
東동湖호 도라보며 西셔湖호로 가쟈스라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압 뫼히 디나가고 뒫 뫼히 나아온다 <어부사시사 春 3>


이 작품은 초장과 중장에서 자연스러운 대구의 배열을 유려하게 펼치면서 전체적인 분위기에 생동감을 주어 배가 바다 위를 조용히 가고 있는 장면이 눈에 환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동풍이 불어 물결이 잔잔히 일어나는 동호를 지나 서호를 향해 배를 저어가니, 앞산이 지나가는 것이 보이고 뒷산이 차례로 닿아오는 모습이 자연스레 그림같이 펼쳐져 있는 서경의 모습이다.


고운 볃티 쬐얀 믉결이 기름다
이어라 이어라
그믈을 주어두랴 낙시 노흘일가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濯탁纓영歌가의 興흥이나니 고기도 니즐로라 <어부사시사 春 5>


어부생활의 멋, 맛, 흥취를 느낄 수 있다. 초장에 기름 같은 물결 위로 햇볕이 내려 쬐는 바다는 곱고 잔잔한 평화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정적인 이미지를 배경과 배치시켰다.
중장에는 이런 고요하고 정적이 감도는 곳에서 정말 그물을 치고 낚싯대를 놓아 고기를 잡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잡을 수 없다고 한다. 종장에서는 濯纓歌(굴원의 어부사)에 흥이 나서 고기 잡는 일도 잊겠다는 것이다. 고산은 풍진세상을 멀리하고 物外에 한가로이 놀면서 흥에 겨워 어부가를 부르게 된 것은 너무나 맑은 바다의 정취에 빠졌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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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자연은 멋을 즐길 수 있는 생활의 기반이 되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시상은 어부가 물의 고움, 맑음에서 정경을 즐기는 가운데 흥취가 일어나고, 마침내 속세와 다른 낙천지의 생활을 그려놓았다.


芳방草초 와보며 蘭난芷지도 뜨더보쟈
셰여라 셰여라
一일葉엽片편舟주에 시른 거시 므스것고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갈제 뿐이요 올제 이로다 <어부사시사 春 7>


이 시조는 봄날의 야외에 한유하면서 고기잡이를 하고 저녁녘에 돌아올 때의 낭만적인 생활모습이 선연히 나타나 있다. 초장에는 야외언덕에서 방초도 밟아보고, 난초와 지초도 뜯어보는 한가하고 아무 거리낌없는 생활이 생생히 작품 속에 드러나 있다. 실생활 모습을 읊었기에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중장에 ‘一葉片舟에 시른 거시 므스것고’는 도치법을 써서 시적 변용을 꾀하며 고산 특유의 유려성과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종장에서는 고산의 무심의 경지와 그의 탈속한 모습을 눈에 그려 볼 수 있다. 그는 고기를 낚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방초도 밟아보고 난지도 뜯어보면서 갈 제는 자욱한 안개를 싣고, 올 제는 청풍명월을 일엽편주에 싣고 오면 족했을 것이다. 참으로 가어옹 생활의 티없이 맑고 아름다운 정경을 노래하여 강호한인의 흥취가 물씬 풍긴다.


년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쟝만 마라
닫 드러라 닫 드러라
쳥篛약笠립은 써 잇노라 綠녹蓑사의 가져오냐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無무心심 白鷗구 내 좃가 제좃가 <어부사시사 夏 2>


연잎으로 밥 싸들며 도롱이 삿갓은 농사일이나 고기잡이 일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며 소박한 생활을 뜻한다. ‘연잎으로 밥 싸들고’는 참으로 낭만적이며 ‘ 篛笠’, 綠簑’는 비바람에 관계없이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 농어촌에서 한가하고 무심한 백구는 ‘내가 백구를 백구가 나를 쫓아오는 것같이 날아 왔다 갔다’하는 흥취와 정한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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蝸와室실을 라보니 白雲운이 둘러 잇다
븟텨라 븟텨라
부들부체 쥐고 石셕逕경으로 올라가쟈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漁어翁옹이 閑暇가터냐 이거시 구실이라 <어부사시사 夏 10>


이 작품은 멀리서 바라본 자연의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蝸室이란 인공도 자연의 일부 로서 白雲石逕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銀은脣슌玉옥尺쳑이 몃치나 걸렫니
이어라 이어라
蘆로花화의 블부러 야 구어노코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딜병을 거우리혀 박구기예 브어다고 <어부사시사 秋 5>


이 작품은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아 술과 함께 안주로 구워 먹으며 ‘멋’ 있는 생활을 즐기려는 데에 있다. 古來로 仁者는 樂山이요, 智者는 樂水하여 학문과 도덕이 높은 자가 산림이나 물가에 묻혀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경향이 있었는데 呂 (강태공)․屈原이 그 예이다.


고산은 병자호란 후 부용동에서 은자 생활을 해왔다. 은자 생활은 혼탁한 세상에서 숨어 때를 기다리거나 세상을 절연한 도피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초장에 '은슌옥쳑이 몃치나 걸렷니'는 큰 기대도 하지 않고 몇 마리 걸렸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기 잡는데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중장에 갈대꽃에 불을 붙여 놓고 좋은 고기를 가려서 구어 먹자는 것이다. 종장에 ‘질병을 기우려 벅구기에 술을 따라 마시며 놀자’는 것은 세상을 잊고 근심 걱정 없이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낭만적인 생활태도라 생각 된다. 이 시조가 소박성과 검소한 생활표현 106) 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어부생활의 묘사이 며, 현장감 있는 생생한 표현은 음풍농월의 시인과는 다른 절해고도에서 지기지우도 없는 자의반 타의반의 어옹임을 느끼게 한다.


106) 이재수, 전게서,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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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 다리고 밥을 박앋냐
닫 드러라 닫 드러라
簫쇼湘샹 洞동庭뎡은 그믈이 언다 다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이때예 漁어釣됴기 이만  업도다 <어부사시사 冬 2>


이 작품에서 전문어부의 모습이 풍긴다. 고산이 보길도에서 배를 타고 직접 고기 잡는 체험이 없었다면 초장의 ‘주대 다리고 밋밥을 박앋느냐’고 확인하는 문학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고산의 <漁父四時詞>는 실천 경험의 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어 상상의 문학으로는 따를 수 없는 피부에 와 닿는 듯한 실박한 맛을 준다. 중장의 ‘쇼샹동정’은 중국 揚子江邊의 따뜻한 지방인데 여기에도 언다고 하니, 종장에는 실제 바다에서 경험한 어부의 모습 생활수단으로서의 어로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다. 겨울에 얼어 붙어 낚시도 할 수 없는 寒雪之節이지만 낚시를 고고한 생활면모로 승화시켰으며 즐거움을 터득한 경지라 할 수 있다. 물론 고산이 고기잡이를 생계로 유지한 것은 아니고, 멋과 운치로 낚시를 즐기는 생활의 한 자락을 읽을 수 있다.


여튼 갣 고기들히 먼 소 다 갇니
돋 라라 돋 라라
져근덛 날 됴흔제 바탕의 나가보쟈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밋기 곧다오면 굴근고기 믄다다 <어부사시사 冬 3>


고산이 실제생활의 체험, 관찰, 고기의 특성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추운 겨울에 바다 고기를 낚는 일을 이렇게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얕은 갯가의 고기들이 모두 깊은 바다로 가 버리니 좋은 날을 택하여 먼바다로 나아가자는 것이요, 낚싯밥이 좋으면 굵은 고기가 문다고 한다. 이는 어부로서의 경험이 잘 나타나 있으며 어부생활이 하나의 樂으로써 한가한 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丹단崖애翠壁벽이 畵화 병티 둘럿
 셰여라  셰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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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거口구細세鱗린을 낟그나 몯낟그나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孤고舟쥬簑사笠립에 興흥계워 안잣노라 <어부사시사 冬 7>


겨울의 아름다운 정경을 흥에 겨워 노래한 것이다. 초장에서는 깎아 놓은 푸른 절벽이 그림병풍같이 둘려져 있는 아늑한 자연 배경으로 깔아 놓았다. 중장에서는 巨口細鱗의 고기를 낚으나 못 낚으나 상관없다고 노래한다. 어부는 고기 잡는 것이 본분인데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자연스럽게 어부의 본업을 포기하고 흥에 겨워하고 있다. 그렇기에 종장에서는 고주에서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앉아 있어도 흥겹다고 노래한다. 이 작품은 고기 잡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어부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흥취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산의 <漁父四時詞>에는 자연에 동화되어 흥취를 노래한 것으로 전 작품을 통해 관류하고 있다.


2. 도교사상이 반영된 시조


조선시대 유자들의 문학작품에서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일일이 매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것은 도교를 숭상한다거나 도교적 생활이 아니라 유자이지만 老壯의 著書인『道 経』,『壯子』,『列子』등을 흥미나 혹은 교양을 넓히기 위해 읽고 음미했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교적 영향을 받은 작품 요소를 고산의 작품에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연구 거론된 바 있다. 당시의 시대상이 곧은 선비들에게는 도가적 은일 생활을 요구했으며, 특히 고산은 생애자체가 신선처럼 일생을 보냈다고볼 때 도가사상에 젖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문사들은 사화의 소용돌이로부터 피신 하기 위하여 은일 고답적인 사상을 동경하게 되고 신선과 仙 의 추구로서 심화된 정신 세계를 지녔다 107) 는 견해와 국문학 작품을 대하면 문인들이 노장서를 많이 읽고 있었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 108) 는 견해도 있는 바, 시대상이 유자들로 하여금 은둔 자연순응사 상에 젖도록 만들었으며, 의식중 무의식중에 도가사상이 침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07) 최동원,「道家思想과 儒家思想이 國文學에 미친 영향」,『부산대논문집』10호, 부산대, 1969, p.135.
108) 김석하,『韓國文學史』, 신아사, 1975,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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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사상의 주류는 유교사상인데 忠, 孝, 爲民, 修己治人 등 너무나 현실적이고 인간이 나아갈 길을 강조했기 때문에 정치현실과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낀 사대부들은 도피처로서 마음의 고향을 느낄 수 있는 도교적 요소에 마음을 안착시킴으로써 인간적인 고뇌, 환멸, 불만을 해소하려 했을 것이다. 도교사상의 본체는 道이지만 虛가 중심이념이며, 虛의 경지에 이르러야 자기가 눈에 보인다고 한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조선시대 유자들의 문학작품 중 도가사상과 관련된 작품은 현실적인 기원이나 희망이 모두 비현실적, 환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도교는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것으로 인위적인 모든 것을 배격하고 자연의 순리대로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고산의 시조에서 노장의 도가적 사상이 표현된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1) 安分知足


고산의 작품에는 자연을 소재로 자연 정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했거나 자연을 통하여 어떤 이념, 교훈, 교시, 훈유의 뜻을 발견해 내는 등 자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일생이 현실정치에 패배한 경우가 많아 자연에서 은거하며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도를 즐기는 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서의 좌절, 불평불만을 자연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풍자하거나 상징 적으로 토로하여 억울함을 잊고 답답함을 풀려는데 있었다. 이런 정서는 다음의 시조에서볼 수 있다.


山산水슈間간 바회 아래 집을 짓노라 니
그 모론 들은 욷다 다마
어리고 햐암의 뜻의 내 分분인가 노라 <漫興 1>


위의 시조는 고산이 영덕 배소에서 풀려 나와 금쇄동에 은거하면서 그의 나이 56세 (1642년 인조 20) 때 지은 작품이다. 병자호란과 당쟁의 소용돌이를 겪은 후 자연 속에 묻혀 유유자적한 생활을 읊었다. 산수간에 집을 짓는 것은 이제 헛된 名利에서 벗어나 세상을 등지고, 자연 속에서 은거하여 살고자 하니 남들은 비웃든지 간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어리석고 시골 백성인 자기의 분수에 맞다는 자연동화의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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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 풋을 알마초 머근 後후에
바횟긋 믉의 슬지 노니노라
그나믄 녀나믄 일이야 부 줄이 이시랴 <漫興 2>


이 작품은 소박하면서 안분지족한 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초장은 소박하고 빈한한 생활과 분에 맞는 생활을, 중장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평화로운 생활과 여유로움을 노래했고, 종장은 그 외에 아무 바랄 것도 부러워할 것도 없는 전형적인 은사의 생활을 읊은 것이 다. 소박한 생활과 자연을 벗하여 근심 없이 즐거움을 누리면서 소일하는 삶의 방식이 부러울 게 없는 삶이다고 노래하고 있다. 즉 빈한한 생활에서 여유로움을 찾고 그것보다 더부러운 것도 구할 것도 없다는 노래이다. 영욕과 세속적인 멍에에서 벗어나 안빈낙도 사상이 기저에 깔려 있어 이는 도가적 이념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마람닙희 람나니 逢봉窓창이 서코야
돋 라라 돋 라라
녀람 定뎡소냐 가대로  시겨라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北북浦포南남江강이 어 아니 됴흘리니 <어부사시사 夏 3>


도피지에서 은둔 생활하는 정경을 한가하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어부로서 고기 잡으려는 의도나 목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바람이 부니 뱃놀이로 즐겁게 놀자는 노래이다. 초장 에서 ‘바람나니’에서 동기화 되어 중장에 ‘여름바람 정할 수 있느냐 가는 대로 배를 그대로 두어라’하여 행동화의 동기로 잠재적 목적이 나타났으며, 종장에 ‘어디 좋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는 작자의 생각이 행위로 나타나 유람하겠다는 의미가 나타나 있다. 여름에 뱃머리에서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니 바람 따라 배가는 대로 두고 놀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 라도 있을 것이다. 또한 종장에는 자기 의지가 나타나 있다. 여기에 마람잎, 여름바람, 북포남강 등의 용어는 속세와 거리가 먼 동경의 세계인 선계를 배경으로 했는데 우리나라 선계 이야기는 대개가 유흥과 관련된 것이 많다.


水슈國국의 히 드니 고기마다 져 읻다
닫 드러라 닫 드러라
萬만頃경澄딩波파에 슬지 容용與여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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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人인間간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욱 됴타 <어부사시사 秋 2>


위에서 ‘머도록 더욱 됴타’와 ‘먼 빗치 더욱 됴타’는 인간으로부터의 거리가 조성하는 미학을 나타내는 동시에 ‘道’에로의 접근방식이 되는 것이다. “무한한 크기 때문에 안가는 곳이 없고 어디에나 가기 때문에 멀다. 멀리 갔다가 다시 본 자리로 돌아온다” (『道 経』25장), ‘머도록 더욱 됴타’는 이런 회귀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109) 인간세계는 영욕, 부귀 공명, 명리를 추구하는 다툼의 세계이므로 이에 벗어나기 위하여 예로부터 도피 은둔하여 자연과 더불어 사는 閑雲野鶴처럼 생활하는 도가의식이 드러나 있다.


간밤의 눈 갠後후에 景경物물이 달랃고야
이어라 이어라
압희 萬만頃경硫류璃리 뒤휘 千쳔疊텹玉옥山산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仙선界계ㄴ가 佛불界계ㄴ가 人인間간이 아니로다 <어부사시사 冬 4>


이 작품도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이 안전에 자연의 경승이 전개된다. 함박눈이 내릴 때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나 이 눈이 개여 화사한 햇살에도 눈부실 때는 새로운 은빛 세계가 전개되어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너무나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웠기에 선계나 부처가 사는 세상인지 인간세상은 아니라고 했다. 앞에는 만경 유리 뒤에는 千疊玉山의 樂天地라 하여 고산은 인간세계에 대한 부정적 혐오감, 불평불만을 은근히 암시하며, 자연에 들어가서 정치적 불만과 패배의식을 보상받으려는 생각이 나타나 있다. 즉 혼탁한 정치권력자들이 사는 세상보다 이곳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곳인가를 강조하여 그들보다 더 편안한 생활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으로 자기위안을 삼고 있다.


여기서 인간세상은 홍진이요, 자연은 선계․불계로 비유하여 보상심리에서 나온 안식처로 인식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산의 도가사상이 작품에 어떻게 미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는데 고산이 도가사상에 깊숙이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은둔생활을 신선에다 탁의한데서 나온 결과라 여겨지며, 그의 도가적 문학의식은 다음 시조에서도 볼 수 있다.


109) 이종구,「孤山尹善道의 作家意識」, 영남대, 석사학위논문, 1993,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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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야 누얻다가 여흘 아래 리려다 
 여라  여라
落락紅홍이 흘러오니 挑도源원이 갓갑도다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人인世세紅홍塵딘이 언메나 렷니 <어부사시사 春 8>


이 작품 역시 莞島 甫吉島에서 지은 것으로 보길도를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더할나위 없는 이상향으로 생각하였다. 종장의 ‘인세홍진을 얼마나 가렸는가’는 자연이 인간의 어지로운 세상을, 헐뜯고 질시하는 세상을 가려주어서 도피 은일의 안식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고산의 자연관이 나타나 있다. ‘야 누얻다가 여흘아래 리려다’에서 고산의 모습이 세간에 초연한 무위자연의 모습으로 취하여 눕기도 하고, 여울 아래 내려가 기도 하는 한가한 모습이 자연에 몰입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압개예 안개 것고 뒫뫼희  비췬다
떠라 떠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 온다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江강村촌 온갓 고지 먼 비치 더옥 됴타 <어부사시사 春 1>


위의 작품에서도 봄의 이른 아침의 정경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게 그렸다. 어부 들의 어로를 위해 아침에 배를 띄울 때의 모습을 묘사한 서경시다. ‘앞산→ 뒷산’, ‘밤물→ 낮물’은 공간과 시간의 변화 묘사로 동적이며 빨리 고기잡이를 재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묘사로서 아름다운 봄 정경을 음미하고 있다.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 한가로움이 나타나면서도 물아일체의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멀리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


우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漁어村촌 두어 집이  속에 나락들락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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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가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다 <어부사시사 春 4>


이 작품에서는 고요한 어촌의 한가한 모습을 묘사한 서경시다. 초장 ‘우는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는 물외한인의 優遊하는 심경을 흔적 없이 나타내어 화창한 봄날이 환히 보이며, ‘우는것-프른것’, ‘벅구기-버들숩’의 대구와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의 표현 기법은 생동감을 준다. ‘어촌 두어집이 속의 나락들락’과 ‘온갇 고기 뛰노다’는 동적인 표현이지만 우리에게 ․幽․ ․閑情․平和속으로 빠지게 한다. 고요한 봄 풍경에서 우유자적한 노옹이 살고 있는 선경을 보는 것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산은 자연속에서 유유자적한 생활로 속세의 부귀공명을 부정하고 선인적인 모습으로 안빈낙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을 흥겨운 노랫가락과 함께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서경의 운치를 돋게 하여 자연속에 몰입되고 있는 고산의 정취와 시상이 잘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2) 無爲自然


노자․장자철학의 ‘無爲’를 설명하는데 동원된 개념들은 ‘無心’을 비롯하여 不得已, 自 化, 不待, 神行 등을 들 수 있다. 110) 장자철학은 본질적으로 ‘무심’을 기본 바탕으로 전개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무심’은 완전한 무감정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가치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111) 따라서 그 결과는 초탈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 예로 ‘무심’의 심상을 노래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夕셕陽양이 빗겨시니 그만야 도라가쟈
돋 디여라 돋 디여라
岸안柳류汀뎡花화 고븨고븨 새롭고야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三삼公공을 블리소냐 萬만事사 각랴 <어부사시사 春 6>
芳방草초 와보며 蘭난芷지도 뜨더보쟈
셰여라 셰여라


110) 이효걸(외),『노장철학의 현대적 조명』, 외계출판사, 1990, p.243.
111) 상게서,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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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일葉엽片편舟쥬에 시른 거시 므스것고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갈제 뿐이오 올제 이로다 <어부사시사 春 7>


이 작품을 지은 때인 65세는 그의 인생의 황혼기이며 귀양, 출사, 은일을 거치는 과정 에서 자연과 인간에 관해 깊은 사려와 터득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고산은 유위적 가치로부터 떠나는 ‘무심’의 상태를 지녔던 것이다. <春詞 6>에서 보여주듯 언덕 위의 수양버들과 물가의 꽃을 바라보면서 삼공이 누리는 세속의 귀함보다 더 고귀한 삶을 느끼고 있다. <春詞 7>은 ‘무심’이 더 심화 확대되어 초탈의 경지를 느낀다. 실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갈 때는 안개, 올 때는 달빛, 고기잡이 결과는 ‘안개와 달빛’으로 초탈한 고산의 모습에서 ‘무심’의 극치를 본다.


丹단崖애翠壁벽이 畵화 병티 둘럿난
  셰여라  셰여라
巨거口구細세鱗린을 낟그나 몯낟그나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孤고舟쥬簑사笠립에 興흥계워 안잣노라 <어부사시사 冬 7>


위에서 보면 ‘무심’의 極点으로 고주사립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선인일시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이상으로 도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몇 편의 시를 검토해 보았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유교적이며 도교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상에 따라서 무게를 두고 편의상 분류해 보았다.


유가의 道法人間, 즉 인간계에서 삶의 법칙을 찾는 조율방식이라면, 도가는 도법자연, 즉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찾아 이를 인간 삶의 기본법칙으로 삼으려는 조율방식이다. 따라서 자연은 유가들에게는 이용의 대상이나 삶의 도구가 된다. 도가에서는 인간존재를 자연현 상의 구성분자 일부로 보았던 것이다. 유학의 경우, 인간은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따라야 한다고 본다면, 도가에서는 命이 지니는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운명에 안기는 태도를 지닌 다. 그러므로 유가의 운명관이 順的이라 한다면 도가의 운명관은 安命的이라 할 수 있다. 112) 따라서 도가의 운명관은 도법자연에서 온다. 이런 도법자연의 작품을 검토해 보면


112) 리오사오간․최진석역,『장자철학』, 소나무, 1990,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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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다.


비 오 들희 가랴 사립 닷고 쇼 머겨라
마히 양이랴 잠기 연장 다려라
쉬다가 개 날 보아 래 긴 밧 가라라 <夏雨謠>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은 구구하다. 113) 즉 고산이 겪어야 했던 시대적 상황과 결부하여 탁의와 풍자적 수법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인데, 물론 당연한 이론이지만 배경철학과 주제에 대해서는 연구검토가 필요하다. 이 시 전체가 주는 이미지의 주제는 도법자연하는 농부의 일상생활이다. 자연에 따라 농사를 지어야 하지 억지로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 노자『道 経』에 “거센 바람 아침을 마칠 수 없고,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누가 이렇게 했는가? 하늘과 땅이니라” 114) 고 하였다. 자연법칙도 이와 같은데 인간은 이법칙에 거슬려서는 살 수 없음을 말하는 도법자연을 강조했다.


東동風풍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돋 라라 돋 라라
東동湖호를 도라보며 西서湖호로 가쟈스라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臥와
압 뫼히 디나가고 뒫 뫼히 나아온다 <어부사시사 春 3>


이 자연을 노래한 시는 누가 보나 배를 타고 가면서 보는 아름다운 정경을 노래한 시라고 보여진다. 이 시가 의미하는 바는 현실(동풍)이 자기를 몰아내고 부채질 하니 東湖 가 되었건 西湖가 되었건 피난가야 한다. 일시적인 방편이요, 영원한 도피처가 되지 못하 지마는 시끄러운 현실에서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앞산, 뒷산(어느 곳이 좋은 세상인지 안전한 피난처인지 모르지만) 이 보이게 될 것이라는 현실의 한이 배어 나오는 시조이다. 고산에게는 동호가 되었건 서호가 되었건 비방과 모함의 바람(風)을 피했으면 하는 현실이탈이고, 세상풍파를 멀리하는 遺世獨立을 위한 강호가도였던 것이다. 이렇게볼 때 고산에게 자연은 明哲保身의 피난처이며 아울러 인세와 자아를 격리시켜주는 안식 처가 된다고 생각했다. 115) 강호가도는 대부분 강호 한정적인 순수한 감정으로 자연을 즐


113) 이재수, 전게서, p.75.
114) 김용옥,『노자와 21세기(下)』23장, 통나무, 2000,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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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래한 것보다는 세파홍진을 피하여, 혹은 정치적 실의에서 자연이나 벗하여 자기 나름의 안락을 취하겠다는 소극적인 은둔 내지는 현실도피 사상이 다분히 강호가에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116) 고산의 자연시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자연의 많은 부분이 구상적인 자연이 아니라 관념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강호가도는 자연시라기보다 인생시다. 117) 고 했다. 정병욱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호가도는 결코 인생시일지언정 자연시가 못된다는 명제가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래의 대상인 자연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관념이 형성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118)


위의 주장처럼 강호가도의 자연에는 관념성이 짙다. 고산의 시가에도 대체로 그러하 다. 119)
이상으로 도교사상이 반영된 시조에서 안분지족과 무위자연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안분지족에서는 강호의 생활에서 누리는 나날의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을 묘사했으며, 무위 자연에서는 현실 정치의 혼탁함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여유로운 삶을 누리 고자 하는 고산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는 고산이 현실을 도피하고 자연에 묻힌 것은 역겨운 현실을 이탈함으로써 현실과 동떨어진 고답으로, 자연에서는 煩言과 萬誣가 따라가지 않아 마음이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15) 원용문, 전게서, p.125.
116) 이종출,「고시가에 나타난 국문학의 자연관」,『시문학』9호, 시문학사, 1990, p.12.
117) 문영오,『고산문학상론』, 태학사, 2001, p.111.
118) 정병욱,『국문학산고』, 신구문화사, 1983, p.189.
119) 문영오, 전게서,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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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結 論


문학작품은 그 시대나 사회의 여건과 상황 속에서 창작되고 발전한다. 다만 이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는가 하는 분석에 있어서 작가의 시각이 다를 뿐, 작품의 기저에 배어 있는 시대와 사회의 작용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대나 사회의 상황을 흡수하고 소화하는 주체는 역시 작가의 개성이다. 즉 작가의 인간성, 인생관은 문학의 주체요, 사상이 되므로 문학작품 일체의 주체성이나 표현 형식은 작가의 사상과 인간성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산의 시가는 고산이라는 인간 자체의 표현이요, 그의 개성과 사상의 구체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 에서는 고산의 문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고산의 생애 및 사상을 통하여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고, 고산의 시조에 나타난 사상을 고찰해 보았다.


제Ⅱ장에서는 고산 문학의 배경이 되는 고산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고찰한 바, 먼저 고산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병자호란과 당쟁의 내우외환이 극심했던 시대에 살면서 유교적, 도덕, 철학적 바탕 위에 우국충군․제민 등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충직한 사대부였 다. 우국충군의 유교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간신들을 탄핵하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으 려는 상소로 권신들에게 궁지에 몰려 유배, 출사, 은둔생활로 점철되었으며, 또한 経․ 詩․禮․樂․醫․卜․陰陽․地理 등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인품은 『小學』의 탐독으로 형성된 剛毅忠直, 高邁仙風, 秋霜烈日이라 할 수 있으며, 유학 자적 기질로 그의 시가 또한 교훈적․윤리적 성격을 띠며 음악성도 이런 범주에 속했다.
다음으로 고산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그의 사상은 유교․도교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였으며, 먼저 유교사상의 형성 배경을 살펴보았다. 고산은 전통적인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四書三経』,『小學』을 읽어 유교의 중심사상인 仁義의 도를 실현하고자 했다.


인의는 정치철학이요 교육사상이요, 인륜 기본 규범이었다. 인의의 실천으로 충효와 민본 사상이 고산에게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산의 도교사상은 불로불사의 방안을 터득하고자 <參同契>를 배웠으며 신선 세계의 아름답고 즐거운 분위기를 동경하고 있다. 도교적 내용의 한시에는 도교서적을 탐독하여 얻은 도교 사상이 상당히 침습되어 있었다.


제Ⅲ장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고산의 儒․仙 思想이 그의 시조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작품을 분석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유교사상의 반영을 고찰하여 내용별로 충군연주․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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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수신제가․피세은둔․자연탐익 시조 등으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첫째, 충군연주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忠君孝悌는 유교적 윤리관의 핵심이며, 근본덕목 이요, 최고목표이며 만행의 근원이 된다고 일러 실천 궁행을 주장했다. 충군애국 시조의 <遣 謠 2․3․5>는 이이첨 탄핵상소로 경원 유배지에서 자신의 회한을 그리며 우국연 주의 정과 一忠丹心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遣 謠 5>에서는 以孝爲忠이란 유교이념을 끌어다가 마음속 갈등을 억지로 누르고 있다. <漫興 6>은 우리의 모든 생활, 행복은 군은에 감사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내용이며, <初筵曲>, <罷宴曲>은 고산의 우국연주의 마음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국가백년지대계의 興隆과 번영을 위한 기원의 훈계적 내용으로 되어 있다. <어부사시사 秋 7>은 어부생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물외한인의 풍류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옥토가 찧은 선약을 임금님께 드려 만수무강을 비는 충성심과 연주지정이 담겨 있다.


둘째, 우국제민의 시조로 <夢天謠 1․2․3>, <朝霧謠>, <어부사시사 冬 5>는 권세와 名利에 눈이 어두워 國利民福에는 관심이 없는 간신을 몰아내고 혼탁한 조정과 사회 민심을 바로 잡으려고 임금님께 여쭈어보고자 했으나 간신들의 방해로 못했다는 한탄과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饑 歎>은 거듭된 전란으로 국가재정은 극도로 궁핍하고 백성은 아사하게 생겼으니 환곡을 고리로 먹을 수밖에 없는 백성의 안타까운 생활상을 그렸는데 풍년이 들면 나을 것이란 위로와 民本 憐民의 뜻이 표현되었다.


셋째, 수신제가의 시조로 <五友歌>를 들 수 있다. 수․석․송․죽․월에 인격을 부여 하여 윤리적 교훈적 의미를 탐구하였다. 그 의미 탐구 결과 물은 청정하며 쉬지 않고 전진하는 존재로, 바위는 변하지 않는 존재로, 소나무는 변절하지 않는 존재로, 대나무는 절개를 지키는 존재로, 달은 침묵의 존재로 표상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의 본이 되어 배울 바가 있는 것으로 찬양했으며 그리하여 벗으로 삼겠다고 그의 뜻을 나타내었다.


넷째, 피세은둔 시조 <漫興 4․5>는 임천한흥에서 안빈낙도하며 은둔해 있으니 삼공과 만승보다 나으며 당쟁에 휩쓸리거나 浮世의 투쟁 갈등 속에서도 번민하지 않는 피세의 즐거움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다. <어부사시사 春 10․夏 4․8 秋 2․8․9 冬 10>에서도 고산의 현실세계에 대한 처절한 번뇌로 피세의 병을 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과 우국충정의 마음이 역설적인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다섯째, 자연탐익에 관한 시조 <어부사시사 秋 5>는 소박성과 낭만적 생활태도가 담겨 있어 세상을 잊고 즐겁게 살아가려는 생활모습이 드러나며 어옹 생활이 자의반 타의반임을 알 수 있다. <漁 春 1>은 보길도의 아침 모습을 관조하는 서경시로, 우리 뇌리에 한폭의 그림을 입력하고 있는 듯하다. <어 春 4>는 음악성이 잘 구비되어 정공미려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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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자연이 ․幽․閑․ ․平和를 전달해 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어 春 2․3>은 어부생활의 즐거운 흥취, 풍류를 노래했으며 <어 春 5>는 흥취가 절정에 달해 <탁영가>에 흥이 나서 고기잡이도 잊었다는 노래다. 이 <탁영가>는 세상의 청탁에 따라서 자신의 진퇴를 결정한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그의 내면에 항상 우국 충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 秋 7>은 어부생활의 고기잡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물외한인의 ‘멋’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고산의 ‘멋’의 밑바탕에는 항상 아름다운 자연이 배경으로 깔려져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대하면 감탄이 나게 마련이며 머물거나 쉬어가면서 술을 마시고 계절에 상관없이 흥취와 ‘멋’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런 ‘멋’과 흥취는 고산의 은둔 생활에서는 일상화, 관념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어 夏 2>는 연잎에 도시락 싸들고 백구와 함께 소풍가는 듯한 낭만이 깃든 노래이며, <어 夏 10․冬 7>은 고기잡이와 관계없이 생활의 멋과 흥취가 전편을 관류하고 있다. 고산의 ‘멋’은 자연 속에서 도피 은둔 생활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고답 생활을 낳았고, 소극적이면서 향락주의와 상린하고 서구의 낭만주의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도가사상의 작품은 종교적․철학적 측면을 포괄하여 검토했으나 철학적 측면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고산의 시조는 관점에 따라서 도교철학과 유교철학이 공존하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의 근본행위는 유교적 바탕 위에 있으며 삶의 방식은 도교적이다. 특히 고산에게는 정치현실에 대한 대응방식이 도가적 은일사상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性命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여지고 있다. 자연에 몰입해서 신선과 仙 을추구한 것은 세속에 ‘無關心’, 곧 ‘無心’한 삶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교사상이 침습된 작품을 안분지족과 무위자연 시조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안분지족을 노래한 시조는 <漫興 1․2>는 虛無爲思想이 깃들어 속세의 부귀공 명을 부정하고, 자연 속에서 선인적인 모습으로 평화로움을 찾아 안락한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어부사시사 夏 3․秋 2․冬 4>는 仙界의 유유자적한 생활로 인간세상을 혐오하여 멀리 떨어져 閑雲野鶴처럼 생활하는 도가의식에 젖어 있다. 도가사상은 불노장생․신선사 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仙界이야기로 유흥과 관련되어 있으며 고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부사시사 春 1․4․8>는 부용동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도가적 유미의 자연으로 관념 화하게 되었다. 즉 부용동을 선계로서 안개, 꽃, 뻐꾸기, 버들숲, 閑漁村 깊은 沼, 온갖 고기 등 모든 것이 아름답게 꾸며진 이상향으로 묘사하였다.


둘째, 무위자연의 작품 <夏雨謠>는 이미지와 주제가 도법자연으로 농부의 일상생활을 그려 놓았다. 농사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야 하지 무리하게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부사시사 春 6․7>은 유위적 가치로부터 떠나는 ‘무위’와 ‘무심’의 심적 상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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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 있다. 저절로 사는 생의 방식이 삼공도 부럽지 않음을 나타내어 인간적 가치를 떠나버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어부사시사 冬 7>도 ‘무심’의 극단적 경지로서 세상의 유위적 가치들을 간과해버리는 초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이 연구의 목적은 고산의 사상을 천착, 파악하여 이들이 고산의 시조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밝혀 고산 시조를 정확히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었다. 고산은 유학자․정치인․시인으로서 유배, 출사, 은둔 생활을 반복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면서도 우리말을 교묘하고 아름답게 구사한 시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사상은 유교사상에 기저를 두면서 도교, 불교 등 동양사상을 두루 수용하였으며, 유자 로서 충효, 연민, 윤리, 교훈, 안빈낙도 등의 유학사상이 그의 시조 대부분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귀양살이와 은둔생활을 반복하면서 도교사상이 스며든 자연을 노래한 시조를 상당수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고산은 자연시인이었으며 자연을 매개로 하여 그의 염원과 의지를 시조에 표출하여 그의 뜻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었다. 이처럼 고산을 시조의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로 표현한 기교미와 적절한 음악적 요소의 결합으로 리듬감과 생동감으로써 참신성을 높였기 때문이라 생각 된다.


이 연구는 고산 사상이 시조에 어떻게 용해되어 나타나는가를 중점적으로 고찰한 연구라 할 수 있는데 작품의 사상성 분석에 있어 많은 한시와 시조는 상관관계가 크며 한시를 이해해야 시조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아쉬운 점을 남기며, 후일 연구 과제로 보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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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삼강록(海南三綱錄)

저자 장춘석 

출신학교 및 학위 호남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년도  

5

공재恭齋윤두서尹斗緒(1668-1715)의 회화,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 안휘준安輝濬 

출신학교 및 학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특별논문 

년도  

4

고문서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가사(家舍) 경영과 주거(住居) file

저자 문숙자 

출신학교 및 학위 경희대학교 사학과 강사, 조선시대사 전공, 硏究論文 

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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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山 尹善道의 時調에 나타난 思想性 硏究

저자 崔 美 愛, 指導敎授 柳 年 錫 

출신학교 및 학위 順天大學校大學院 國語國文學科, 文學 碩士學位 論文 

년도  

2

孤山 尹善道 文學硏究-고산의 儒者指向的 意識에 관하여-

저자 하 필 랑, 指導敎授 장 성 진 

출신학교 및 학위 昌原大學校 敎育大學院 國語敎育 專攻, 敎育學 碩士學位論文 

년도 2003年 12月10日 

1

海南尹氏家의 學問과 朋黨政治

저자 이종범 

출신학교 및 학위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 단국대석주선기념박물관 학술지 한국 복식 27호 (2009. 05. 02) 

년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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