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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윤씨귤정공파종친회

낙서윤덕희

낙서공 행장行狀

조회 수 8 추천 수 0 2017.10.10 08:56:50


공의 성은 윤씨 이며 휘는 덕희德熙이며, 자는 경백敬伯이고 해남이 관향이다.

 

시조의 휘는 존부存富이다. 그 이하 10여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휘가 효정孝貞인 분이 있는데 호가 어초은이고 생원시에 합격하였지만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음덕陰德을 행하며, 수신제가하였으니 윤씨의 세업이 실은 이분에게서 기초한 것이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휘가 구衢이고 호가 귤정橘亭으로 문장과 절행(절개를 지키는 행위)이 당대에 가장 뛰어났으며, 일찍이 등과登科하여 호당湖當에 뽑혔고, 조정암 등 여러 현사賢士들과 더불어 경연에 출입하였으므로 장차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으나 끝내 북문北門의 화를 입어 유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 이 사실이 기묘록己卯錄에 기록되어 있다


뒤에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휘가 홍중洪中인데 문과를 거쳐 정랑에 그쳤고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둘째 아들은 휘가 의중毅中, 호가 낙천駱川 또는 리견당理遣堂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요직(부제학, 호당, 관서 백
[평안감사], 예조판서, 승문원 제조 등)을 거쳐서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는데 명종과 선조대에 명경名卿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휘가 유심唯深이며, 음관으로 예빈시 부정副正을 지냈고 둘째 아들은 휘가 유기唯幾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정랑공[윤홍중]이 아들이 없어 관찰공[윤유기]으로 후사로 삼았는데 역시 아들을 두지 못하여 부정공[윤유심]의 둘째 아들 휘 선도로 입후하였으니 이분이 고산선생이다.

 

젊을 때 상상(성균관의 별칭)에 들어갔으나 혼조[광해군]를 맞아 원흉 이이첨의 처형을 상소로써 청하다가 남북으로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가 개옥(반정)하자 처음에 의금부 도사로 소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두 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대군 중 한 분[봉림대군]이 곧 효종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이다. 만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의 대신들에게 미움을 받아 현달하지 못하였고, 현종 초에 나라의 예법의 잘못됨을 소를 올려 논핵하다가 두 송씨 [송시열, 송준길]에게 미움을 받아 멀리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남쪽 끝으로 옮겼으며, 말년에야 풀려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가 세상을 마쳤다. 뒤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익호는 충헌이니 대개 나라의 예법을 바로 잡은 것에 대한 포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문장과 덕행은 덕을 기록한 묘비문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낙서공에게 고조가 된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의 휘는 인미仁美이고, 호는 뇌치헌牢癡軒이며 만년에 문과에 급제 했으나 충헌공의 아들이기때문에 배척당해 기용되지 못하고 벼슬이 학유學諭(성균관의 종9품 벼슬)에 그쳤다. 둘째 아들 휘 의미義美는 진사를 하였으며, 충헌공의 맏형 학생 공 휘 선언에게 출후出後하여 참찬공의 제사祭祀를 받들었다. 셋째아들 휘 예미禮美는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어서 진사공문[의미]의 둘째아들 휘 이후爾厚로 입후하였다. 벼슬이 지평에 그치고, 호는 지암이며 공에게 본생 조고祖考가 된다.


학유공이 낳은 아들 휘 이석은 음관으로 벼슬이 전부에 그쳤으며 아들을 두지 못하여 지암공의 넷째 아들 휘 두서로 입후하사를 받들도록 하였는데 초년에 진사를 하였으나 곧 과거공부를 하지 않고 궁하게 살면서 학문을 연마했기 때문에 덕행과 식견이 당시에 알려졌으며,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부녀자들과 하인들까지 흠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이 50을 못 채우고 세상을 뜨게되자 사림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호는 공재이며, 바로 공의 아버지가 된다. 부인은 전주이씨로 승지 동규의 딸이요, 영상 성구聖求의 손녀 이며, 완원군 권완의 외손이다. 계비도 전주이씨로 도사 형징衡徵의 딸이며 증참판 주하柱廈의 손녀인데, 공은 전 부인의 소생이다. 숙종 을축(1685) 6월 16일 과천의 큰외숙 이공의 임소[과천 현감]의 관사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종가의 아들이 귀하였으므로 조비 심숙인은 공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서 자신도 모르는 동안 춤을 주었다고 한다

 


선비는 기미년(1689)에 세상을 떠났고 그 때 공의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심숙인이 직접 길렀다. 어릴 적부터 품격이 뛰어나고 기상이 헌출하며, 자못 호방하여 얽매이지 않았지만, 공재공의 옳은 교훈으로 날마다 법도를 배웠다. 재주 또한 남보다 뛰어나 보는 사람마다 비상한 그릇이라고 말했다.

 

옥동 이서 선생은 공재공과 도의지교를 맺은 터였으므로 드디어 모든 자질子姪들을 보내서 이공에게 취학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공의 나이 아직 약관이 채 못 되었다 경전을 익히는 것으로 일과를 삼으면서도 소학에 더욱 힘을 기울이도록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가법 때문인 듯하다. 또 나아가 대답하고 읍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아침저녁으로 익혔으며, 남은 여가에는 언제나 사부를 모시고 강론을 들었으며, 성리학 외에도 천하의 모든 사물의 이치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에서 얻는 것이 모두 속유들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자팔법은 글씨를 쓰는사람들의 비법이지만 세상에 전수한 사람이 없는데 공재공이 이 선생과 함께 처음으로 공에게 알려 전수하였다. 공은 선천적으로 획이 굳세고 또한 이 영자팔법을 얻고 보니 천고에 전하지 않는 비법을 열고 세속의 고루함을 초탈하여 우뚝한 명필이 되었다. 편액글씨와 왕희지 초서체에 더욱 능하였으며, 고전古篆과 팔분예서 체와 도장전각법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림에 대해서는 공재공이 가르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가정에서 자득하여 능히 전신의 묘를 전하였으니 그림이 비록 말예이기는 하지만 또한 공의 다재다능함을 보이기엔 족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과거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지만 일전이 조비 심숙인의 명 때문에 과거시험에도 노력은 하였는데, 당시 과장에 때마침 혼란이 있었다. 이때부터 공은 생각을 끊고 응시하지 않았다. 공재공 또한 강요하지 않았다
선조로부터 교유하기를 일삼지 않았지만, 구차스럽게 남의 뜻에 영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또한 공익 타고난 성품 때문이었다. 아무리 당대에 이름 있는 사람이나 선비라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끝내 깊이 사귀는 일이 없었고, 간혹 만나는 일이 있더라도 지나쳐 버렸다. 참으로 취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흉금을 털어놓고 허여했으며, 색목(당파)에 구애되거나 귀천을 논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취사하였다. 또 마이 너그럽고 여유가 있어 경계가 없고 외모를 따지지 않았으며, 부리는 사람을 보면 징실한 말로 물리쳐서 조도 감싸거나 애석해 하는 마음이 없었다. 늘그막에 그의 모난 성격을 고치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고치 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모르는 사람들은 간혹 비방하는 일이 있어도 공은 태연한 채 개의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자연에 맡겨둘 뿐 외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염두에 두지 않았고, 사람 중에 혹 좀스럽고 비루한 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곧 침 뱉고 더럽게 여기기를 마치 자신이 더럽혀짐과같이 여겼기 때문에 자제들이 생업을 경영할 일이 있더라도 감히 공에게 알리지 못하였다


공이 부형이나 선생 곁에 있을 때면 함부로 떠들거나 농담하지 않았고 감히 기대거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질문할 일이 있으면 단정하게 두 손을 잡고 공손하고 엄숙하게 그 대답을 들었으며, 자세하게 되풀이해서 묻고 비록 지루하더라도 말을 중간에서 끊게하지 않고 반드시 그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감히 공경스럽게 승낙받고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매일 아침 의관을 단정히 하고 침소에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 일어나시 기를 기다린 뒤에 베게와 이부자리를 거두고 물러 나왔으며, 밤이 되어 모시고 앉아 있다가 잠자리에 드신 뒤에 절하고 물러 나왔다. 이는 공이 일부러 자신의 행동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어서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스승의 엄격했던 교훈에 의해 저절로 습관이 된 것이다. 아직 나이 어린 여러 동생들도 공을 보고 따라서 본을 받았으며, 여러 종형 제와 동문수학자들이 날마다 한자리에 10여명 모였지만 항상 화기애애하고 시끄러운 일이 없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임진년(1712) 여름에 조비 심숙인의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른 뒤, 공재공이 가산을 더욱 줄어들 것을 우려하여 계사년(1713) 봄 식구들을 거느리고 남쪽 고향으로 내려왔다. 남쪽으로 온 뒤에도 가정교훈은 학업을 닦는데 족했으며 간혹 인편이 있을 때면 이 선생에게 서신을 올려서 학문하는 방법과 일을 처리하는 요령을 물었으며, 그 답을 받을 때면 반드시 깊이 간직하여 두고 수시로 펼쳐보면서 심신을 닦는 자료로 삼았다


을미년(1715) 겨울 공재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경향京鄕에서 들은 이 소식을 사람들은 서글퍼 하고 부의를 보내주었다. 겨우 성복成服을 지내자 집안이 온통 역병에 시달려 공도 역병을 치르게 되었으므로 제대로 예를 행하지 못하고 때때로 행하였다. 이듬해 병신년(1716) 봄 임시로 강진(현 해남군 북일면北日面)의 간두리에 안장하였고, 5월에 계비배가 또 세상을 떠나자 역시 임시로 백련촌 아래 우측의 산에 안장하였는데, 이때 형제들 중 장가를 든 사람은 네명뿐이었으며 나머지는 관례를 올리고 아직 장가를 들지 않은 사람, 성동은 되었는데 아직 관례를 올리지 못한 사람이 있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공은 그들을 가르치고 차례대로 혼사를 치렀는데, 오직 막내 동생 만이 겨우 세 살이었다. 공은 안씨 부인과 함께 더욱 가없게 생각하고 애써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배고프면 배불리고 추우면 따스하게 하며 힘껏 보호하여 길러서 성취를 시켰다. 전후의 두 상사喪事는 뜻밖에 당한 일이어서 장례의 모든 절차를 임시로 마련하였기 때문에 항상 일생의 한으로 삼았다. 만년에 자제에게 경계하기를, “나의 수의를 미리 마련하지마라” 라고 하였다. 고비의 묘지를 잡아놓지 못한 것은 공재공의 본래의 뜻이 오래도록 남쪽 지방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이 그 뜻을 이루고자 이 선생의 명에 따라 가평에 묘지를 정하였던 것이다. 또 서울의 담군(상여를 메는 인부)을 사서 무술년(1718) 봄 고비考妣의 묘를 이장하여 남양南陽선비先妣의 묘에 합장하였다. 그때가 늦은 봄이었는데 전염병이 크게 번져 피할 곳도 없었다. 담군들이 도중에 병이 들어 차례로 넘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끝내 천 리길의 운상을 무사히 하고 대사를 치르게 되었다. 모든 복인들이 무사하게 돌아오자 모두 경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이미 삼년상을 마치고 처음으로 분재를 하게 되었는데, 공은 형제들이 어리고 약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비록 약간의 농토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살림을 꾸려나가기는 반드시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더 비옥한 땅을 골라 우선적으로 나눠주고 자신은 황량하고 묵은 땅을 차지하였다. 막내 동생을 장가보낸 뒤 토지문서를 보고 분재를 하였는데, 문서 안에 기록의 명목은 있으나 실제로는 토지가 없는 것이 많았으므로 공은 자기의 몫을 나누어 서 채워 주었다. 모든 집안일을 처리할 때 대원칙만 총괄하며, 규범을 만들 뿐, 따로 척촌尺寸을 지시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 날 밤 문밖을 나서는데 편지봉투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주어서 보니 숨은 여러 노비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주인은 알지 못한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으나,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 남의 손을 빌어 혐의를 만들려고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다"라고 하며, 드디어 불문에 부치고 기록을 불에 태워 버렸다. 그 당시 공이 시골에 산지 오래되고, 거센 바다바람에 견디며 오래 있기가 참으로 어렵고, 선친의 묘소와 여러 대의 선산이 모두 경기지방에 있기 때문에 성묘 도 제 때 할 수 없으며, 또 혼사를 치를 때도 어려운 점이 많아 북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신해년(1731) 봄 가족을 거느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중씨공[尹德謙]이 그 전에 미리 성중에 살았기 때문에, 공은 그의 집 근처에 옮기도록 한 뒤 근심을 함께 나누었다. 옛 친구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수시로 모여 지난날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남원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멋있는 귀공자였다. 전부터 중씨공과는 서로 친밀한 사이였는데, 공을 한번 만나본 뒤 서로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대저 그 사람은 술을 좋아하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일생을 살아오면서 우뚝한 기행이 많았다. 매일 공과 함께 밤이 늦도록 담소하면서 지루한 줄을 모를 정도였다. 공이 간혹 충고하는 말을 하면 즉시 굴복하여 말하기를, "장자의 가르침을 내 어찌 복종하지 아니하겠나?"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과 말하다가 서로 맞지 않으면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욕하며 꾸짖는 일을 조금도 거리기지 않고 했는데, 오직 공에게만은 농담을 할 때라도 함부로 말하는 일이 없었다


중씨 공의 행언과 재학이 사문의 추존을 받았으므로 공은 항상 좋은 벗으로 대접하였는데, 서로 만나지 겨우 몇 해 만에 갑자기 중씨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애통함은 형제의 정을 넘어 실상 자신이 죽는 슬픔과 같이 여기 었다. 공은 고아가 된 조카를 불쌍히 여기어 자신이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돌보며 길렀다. 둘째 아들 용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재주가 있어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입신양명이 멀지 않았다고 기대하였는데 청년시절에 요절하였다. 모든 친지들이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공은 자중하여서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았다.
을묘년(1735) 나라에서 영희전의 영정을 이모移摹하는 일이 있었는데, 공의 그림 솜씨가 우수하다고 임금에게 천거한 사람이 있어서 입궐하라는 명을 받았다. 합당한 부름이 아니면 나아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의심하는 이가 있었다. 공은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막중한 일이기에 군신의 분의로 보나 감히 앉아서 임금의 명을 어길 수 있으랴"하고 곧 입시하여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둡다는 이유로 사양하니, 임금이 그의 실지 정상을 살펴보시고는 참여를 강요하시지 않으셨다


무진년에 또 숙종의 어용을 다시 그리게 되었는데, 임금은 공에게 조영석과 함께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사대부들 중에는 그림으로 세상에 날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특별히 공을 부른 것은 그의 필법의 공졸로써가 아니라 아마도 그에게 취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감이 조영석으로써 랑청郞廳을 삼을 것을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같은 사람인데 혼자만 낭청으로 제수하는 것은 매우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시며, 드디어 랑청을 줄이고 공과 함께 군직에 부치었다.

 

공은 지난날과 같이 노혼,으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내 집의 대사인데, 무식한 화원배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다. 곁에서 감동監董하고 지휘만 해주길 바랄 뿐이지 직접 집필하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시니 공히 사양하지 못하고 날마다 입참하였다. 보좌의 지척에서 종일토록 모시 니, 임금께서 '선비의 솜씨, 라고 일컬으시고 '너' 라고 부르시지 않으셨으며 대소범절을 하나하나 공에게 물으셨다. 간혹 한가롭게 이야기하다 술잔을 기우리게 되었는데, 공의 별공은 황공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하자 곁에 있던 신하가 대신 사뢰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전에 볼 수 없던 특이한 예우라고 하였다. 이보다 전에 공을 부르고자 할 때에 액례掖隷를 시켜 밀감을 하사하시며, 입시한 뒤에는 각종 하사품을 푸짐하게 주셨다. 또 영정을 거의 다 그려갈 무렵에 어전에서 선온宣醞을 하사하시고 몸소 참관하셔서 연중에 하교하기를,"시험해 본 뒤에 그만두라는 옛 사람의 말도 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이 사람을 알겠구나.라고 하시였다. 또 연중筵中에 물으시기를, “예전에 유생을 곧바로 육품직에 제수한 일이 있었느냐”라고 하셨으므로 대답하기를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도감이 해체되자 임금이 창경궁으로 돌아와 하교 하시기를, “윤덕희를 특별히 육품직에 제수하라하시고, 이어 서관에게 아마도 이는 선왕의 명으로 명한 것처럼 하기 위함이었다. 이튿날 전초는 사옹원주부에 첫 번째로 주의하여 비점을 받았으며, 공은 사은숙 배를 올린 뒤 물러나왔다. 임금이 영정을 받들고 영희 전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갈 때 공은 차비備官으로서 어가를 수행하고 갔다 오니 해가 이미 저녁이었다. 여러 날 쌓인 피곤함을 조금 쉬려고 옷깃을 풀고 잠자리에 막 들려고 할 무렵이었는데 임금께서 부르신다고 하였다. 황급히 대궐로 달려가 보니 임금께서 경현당에 납시어 양 도감의 제조 이하 관원들을 앞에 불러 놓으셨다. 술상은 성대하게 차려졌는데, 조용히 몸소 영정의 봉안시를 지은 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시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공은 제일 늦게 도착한 것이다. 다른 신하들은 이미 글을지어 올렸기 때문에, 임금은 공에게 입으로 부를 것을 명 하였다. 공은 운韻에 따라 지어올리고 물러나왔다. 그 뒤 도감에서 둥서謄書하여 시첩을 만들어 입시했던 제신들에게 보내왔다


하루는 임금께서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음관으로 수령을 삼을 때그 절차가 어 떠하냐"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반드시 사송아문詞訟衙門을 거쳐야 비로소 수령으로 제수할 수 있습니다”고 하니, 임금은 해조該曹에 명을 내려 “계차階次에 따라, 빈 자리를 채우도록 하라하시고 마침내 동부도사를 제수하였다. 공이 도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부득이 한 일이었으며, 관직에 이르는 것은 더욱 달갑게 여긴 것은 아니었으나 성상의 권유를 거듭 어기다가 부득이 출사하여 공무를 수행한지 역시 여러 날 된 뒤였다. 나이도 많고 기력도 쇠퇴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 소辭職疏를 올렸으나 전조가 끝내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정문呈文을 올린 뒤 출사하지 않고 한가로운 세월을 보냈다.

 

가을에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윤덕희의 성명을 오래도록 정목에서 볼 수 없으니 무슨 까닭인고?"하셨으므로 대답하기를, “지난 번에 이미 사직을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겨울에 재차 또 하교하기를, “윤덕희와 조영석은 공로가 같은 사람인데, 한 사람은 이미 수령이 되었고 한 사람은 공연히 체직遞職되었으니 이 어찌 공도라 하겠는가? 즉시 상당한 직을 제수하라”고 하여, 전조가 사포서 별제로 제배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사옹원주부로 옮겼다. 6월 도목정사(일년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행하는 전반적인 인사행정) 때 감찰금부도사, 사평 등의 직을 여러 차례 주려하였으나 끝내 승낙하지 않았다. 임금의 뜻은 외임을 시키려는데 있었던 것인데 정관들은 우러러 임금의 뜻을 본받지 못하고 끝내 말단직에 이르는 정릉령으로 주의하니 임금은 부특이 윤허 하였다. 이 해 겨울 공은 또 병으로 사임하고 말았는데,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물러난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다 탄복하였다


이로부터 수년 동안 넉넉하게 유유자적하면서 살았는데 10여 년 동안 혼사와 상례를 여러 번 치르느라 가계가 매우 어려워져, 생계를 모색하려고 임신년(1752) 봄 안부인이 먼저 고향으로 돌아오고, 그해 가을 공도 서울의 집을 큰 아들에게 맡기고 모든 권솔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왔다. 이때 공의 나이 70을 바라보았고 습한 것의 풍토와 기후가 맞지 않아 조섭融에도 방해가 될 뿐, 본래의 요통이 전보다 더욱 심하여 졌으며 걸음걸이가 불편하였다. 그러나 신기神氣가 쇠하지 않아 심하지 않았으며, 항상 머리 빗고 씻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병자년(1756)에 셋째아들 탁이 요절한데다 장손인 특정特貞마저 서울에서 까닭없이 죽고, 이듬해 정축년(1757) 장자 종悰이 또 세상을 떠났다. 2년 사이에 흑화 禍가 이어지게 되어 종사를 맡길 곳도 없게 되었다. 공이 아무리 슬픔을 참고 스스로 견디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약해졌으며, 왼쪽 눈마저 실명하게 되어 몸이 더욱 약해졌다. 무인戊寅년(1758) 가을 안부인이 또 세상을 버리자 공은 더욱 쓸쓸하고 슬퍼하였다. 동짓달에 영암(지금 해남군 송지면)의 남쪽 달마산 갈두葛頭의 우좌로 안장하고 그 오른편을 비워서 자신의 묘지로 정하였다. 일찍이 병자년(1756)에 동궁東宮을 책봉한 경사로 조신朝臣들 중 나이 70이 넘은 신하에게 가자加資하는 은전恩典이 있었는데, 멀리 있었기 때문에 해조該曹에서 책록辯을 하지 못하였고, 공도 자제子弟들을 시켜 신청하지 않았다. 이는 수직壽職이란 의례적이기 때문에 공이 달갑게 여기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계미년(1763) 성상의 나이 70이 되던 해에도 추은의 은전이 있었는데, 공은 생각하기를,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하니 군신의 의리상 감히 홀로 은전恩典에서 누락될 수 없다"고 하고 조정에 알리도록 하니 전조가 드디어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첨지중추부사에 배해졌고, 병술년(1766)에 또 추은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으며, 곧이어 가의嘉儀로 승진되었다. 만약 병자년(1756)의 은자를 받았다면 당연히 자헌(판서)에 올라갔을 것인데 공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이해 섣달 몸저 누워 백련의 옛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가 82세였다. 공은 이미 종2품계에 올라있었기 때문에 의례적으로 同樞(동지중추부사)에 배해져야 마땅한데, 해조該曹에서 즉시 계품啓禀하지 않을 탓으로 장례를 치른 뒤에 교지가 내려졌다. 중의衆議가 다"어명이 내려진 것이 비록 사후지만 계문한 것은 생존시이기 때문에 새로 내려진 직함職啣를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윤처사동규에게 문의하니 역시 그 말도 옳다고 하였다. 이듬해 안부인의 묘에 합장하였다


공은 모습이 장대, 풍성하고 원기가 왕성하고 정신이 맑았으므로, 공재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후일에 우리 아이가 수壽하는 것은 내가 미칠 바가 아닐 것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마음이 넓어 남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고 의리에 관한 일은 의연해서 아무도 범할 수 없었다. 평생토록 특별히 좋아하거나 특별히 싫어하는 것이 없었고 세력이나 이익 등 분잡하고 화려한 일에는 담담하였다. 붕당이나 파당의 습성은 더욱 싫어하였기 때문에 동서란 두 글자는 입으로 말한 적이 없었으며, 자녀 들의 혼사에도 붕당에 구애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남들이 비방하고 의심하는 수가 많았지만 개의 하지 않았다. 주량은 매우 커서 간혹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큰 그릇에 가득 채워 많으면 십 수 잔, 작아도 대여섯 잔은 해야 환담하기에 알맞았으며 주정하는 일은 없었다. 혼자 있을 때면 달을 넘도록 마시지 않았다.

 

초치인 증정부인贈貞夫人청송심 씨는 진사 체원의 딸이고 목사 서견瑞肩의 손이며, 판서 엄지의 외손이었는데, 단정하고 엄숙하고 자애로워 명가의 규범이 있었다. 신묘년(1711)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형제를 두었다. 후취後娶인 증정부인膾貞夫人광주안씨는 진사 서의의 딸이고, 군수 후익의 손이다. 처음 시집을 오자 잇달아 시부모의 상사를 당하였으므로 중궤中饋(주부主婦가 부엌 안에서 하는 일)를 맡아 했으며, 공의 조상을 받들고 아래 사람들을 거느리고 여러 동생들을 잘 기른 데는 부인의 힘이 참으로 컸다. 공은 성품이 온후하고 인자한 데 비해 부인의 성격은 엄정하였으므로 내외의 구분이 엄격한 법도가 있었다. 삼남 이녀를 낳았으니 모두 여덟 자녀였다.

 

윤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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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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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공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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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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