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아버지의 성은 윤씨尹氏이며 이름은 두서斗緒, 자는 효언孝彥. 호는 공재恭齋이며 관향貫鄕은 해남海南이다.
선조에 효정孝貞이란 분이 있었으니, 호는 어초은漁樵隱이다. 어초은공은 덕행과 문장이 유명하여 성균진사가 되었으며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당시는 연산군燕山君시대라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숨어 지내면서 후진을 교육하니 윤씨의 가업家業은 사실상 이 분이 기초를 닦았다.
이 분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은 구衢이며, 호는 귤정橘亭이다
귤정공은 문과교리로서 학행과 문장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중종中宗때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현사賢士들과 함께 경악經幄에 출입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뒤 조정에서 쫓겨나 시골로 돌아갔으며, 뒤에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아들 두 분이 있었으니 홍중弘中은 예조정랑인데 예조판서를 증직 받았고, 의중毅中은 예조판서와 좌참찬을 지냈다. 문학으로 선조宣祖의 명경名卿이 되었다. 정랑공正郞公이 아들이 없어 참찬공의 둘째아들인 유기唯幾로 뒤를 이었는데 강원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이 분 또한 아들이 없어 백씨伯氏인 예빈시 부정 유심唯深의 둘째아들인 선도善道로 뒤를 이었다.
이 분이 고산孤山선생이다.
고산 선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도의와 문장이 당세에 유명했다. 유생儒生으로 있을 때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시사時事를 말해 여러 차례 귀양살이를 했으며, 효종孝宗께서 승하했을 때 송시열宋詩烈의 오례誤禮의 잘못을 말했다가 큰 화를 당할 뻔했다. 특별히 선왕先王이 스승이라 하여 삼수로 귀양갔다가 다시 광양으로 귀양갔다. 숙종肅宗이 즉위하여 특별히 이조판서를 증직했고,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고산 선생은 아들 다섯 분을 두었으니, 큰 아들은 인미仁美인데 문과에 급제했으나 아버지 때문에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숙종 초기에 특별히 사간원의 헌납을 증직 받았다. 그 아들 이석爾錫은 종친부의 전부였다. 고산 선생의 둘째 아들인 의미義美는 성균진사인데 백부伯父인 선언善言의 양자가 되어 위로 참찬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아들 두 분 가운데 둘째 아들인 이후爾厚가 사헌부지평으로서 계부季父인 도덕랑 예미禮美의 양자가 되었다. 모부인母夫人은 영인令人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모부인의 아버지는 예빈시의 참봉 사량四亮이며, 외조는 고려 태사 도棹의 후손인 경주慶州 이필행李必行이다. 벼슬은 상례이며 이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재상인 동고(東皐,李俊慶)의 5대손이다
공재공은 현종顯宗9년 1668년 5월 20일 해남 백련동 옛집에서 태어났다. 공재공은 형제분들 가운데 넷째이다. 전부공의 양자로 들어가 종가의 제사를 받들였다. 전부공의 부인은 숙인淑人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숙인의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증직받은 전부 심광사沈光泗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청송군靑松君 의헌공懿憲公 액詻의 손자이다. 외조부는 병조참판을 지냈고 영의정을 증직받은 전의全義 이명준李命俊이다.
처음 전부공이 아들이 없을 때 충헌공이 공재공 형제가 처음 태어나자 점占을 쳐보니 공재공이 가장 길吉하여 전부공으로 하여금 아들을 삼게 했다. 숙인 심씨가 즉시 강보에 받아 가지고 돌아와 은근히 보살펴 성장시키니, 그 사랑은 자신이 낳은 아들보다 더했다. 공재공이 성장해서 양부모니 친부모니 하는 말을 일찍이 하지 않았으며, 남들이 말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부모를 성심껏 봉양하는 길이면 무엇이든 다했으며, 특히 부모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을 위주로 했다
어릴 때부터 문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필법에 고명高明하여 5-6세에 큰 글씨와 초서를 쓰니 보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칭찬했다. 15세에 결혼했다. 훤칠한 키에 어른다운 태도가 있어 나이 어린 사람이라고 업신여기지 못했다. 당시 전부공이 이미 늙어서 병이 많았다. 공재공이 좌우에서 백방으로 봉양하며 자식이 부모의 일을 대신한다는 뜻을 채득했다. 공재공은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며 종족宗族과 손님에게는 각각 그에 합당한 도리로 대하고, 노복을 부릴 때에는 위엄으로 대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존경했다
나이가 더욱 들어 감에 따라 학문 역시 점차 진보했으며 매일 문사文詞에 힘썼다. 과거 시험장에 출입할 때 동료들이 모두 공재공을 추장했다. 과연 성시省試에 합격하여 1693년에 비로소 상상에 오르니 사람들은 공의 출세가 너무 늦음을 한탄했다.
1694년에 전부공이 돌아가시어, 공은 1696년까지 3년간 복을 입었다. 당시 공재공은 서울에 있다가 1697년에 친아버지 지암공을 뵈러 남쪽 고향으로 내려갔다. 숙인 심씨께서 향장鄕粧의 묵은 빚을 받아 오라 명했다. 공이 남으로 내려와 채권債券에 수록된 것을 보니 그 액수가 많아 수천 냥이나 되었다. 그러나 빚을 진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여 갚을 수 없음을 불쌍히 여겨 공은 채권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일을 듣는 사람은 모두 어진 분이라고 일시에 칭찬이 자자했으며 명망이 더욱 떨쳤다.
이보다 앞서 공재공도 부모의 명으로 과거공부를 했지만 과거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부공이 이미 돌아가신 뒤 당화는 치열했다. 이 해에 놀라운 일이 동기간同氣間에게까지 미쳤다. 이때부터 더욱 세상에 마음이 없어져 집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내버려두고 상관하지 않았다. 오직 고대의 전분과 경적에 전심하여 모두 널리 꿰뚫고 그 극치를 추구했다. 이밖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 백가와 중기案技에 까지 모두 그 지취志趣롤 연구했다
상위는 각 지방을 두루 답사하고 밤이면 반드시 돌아다니며 관찰하여 추보推步와 점술占術을 보았다. 등수等數·도등 冊等을 관찰하여 양천척지법量天尺地法을 증험 했으니, 이는 유수석劉壽錫도 능히 따지지 못할 정도였다. 병류兵流는 세상에 전해 오는 도검鞱鈐·병법·병서를 보지 않은 것이 없으며, 변화·합벽闔闢의 기틀을 마음속으로 운행해 보며 거갑車甲·병인兵刃의 제도와 전진辨·공수攻守의 도구에 대하여 모두 고증했다. 공은 일찍이 정의편正義篇을 저술하여 장수의 도리를 자세히 논했다.
공은 제가의 서적을 연구하되 다만 문자만 강구하여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천박한 학문의 자료로 삼는데 그치지 않았다. 반드시 정확히 연구·조사하여 옛사람 입언의 뜻을 파악하여 스스로의 몸으로 체득하고 실사實事에비추어 증험했다. 그러므로 배운바는 모두 실득實得이 있었다
이 옥동玉洞선생과는 일찍부터 금란金蘭의 의誼를 맺었다. 서로의 사는 곳이 멀지 않아 매일 서로 만나 종유했다. 서로 만나면 경서의 뜻을 토론하며 활달한 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위로는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근원, 황왕皇王과 제백帝伯의 도道, 원회元會와 운세運勢의 기紀. 자세한 예악과 도수度數, 역대의 폐홍廢興, 인물의 고하高下, 당세의 사무, 가정 일용의 세미細微한 것까지 서로의 지식을 털어놓아 자세히 분석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여 그칠 줄 몰랐다. 혹 서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편지를 왕복했다. 서로의 허락과 기대가 매우 깊어 다른 사람으로서는 감히 엿 볼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학문이 날로 광박해지고 지식이 날로 고명해져 무릇 강구하지 못하는 이치가 없었고 해명하지 못하는 실사實事가 없게 되었다
어려서 글씨를 배웠는데 종왕鍾王의 법을 취했다. 또한 당송唐宋 이하의 여러 명가와 우리나라 제가의 법을 모두 시험삼아 배워 그 장단을 증험했다. 또한 이옥동 선생과 함께 영자팔법永字八法을 연구하여 옛 사람이 전해주지 않는 뜻을 깊이 체득하여 옛날 연습했던 법을 모두 버렸다. 고법古法이 얽매이지 않고 일가一家의 체體를 스스로 완성했다. 크게는 당액 . 병장과 작게는 편지 등 콩알 깨알만한 것까지 닥치는 대로 모두 그 마땅함을 다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명필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놀라 쳐다보았다.
공은 또한 옛 전체篆體와 팔분법八分法이 근세 이래 더욱 쇠멸하여 족히 볼만 한 것이 없었으므로 공은 진한秦漢이래 간행된 금석문자를 많이 수집하여 조용히 연구하고 묵묵히 완상玩賞하여 초연히 독자적인 서체를 체득했다. 붓을 운행하고 글자를 구성하는 법은 우리나라의 오랜 더러운 습속을 깨끗이 씻어버렸다. 아울러 크고 작은 도장에 새기는 전체를 굽이굽이 묘미를 다했다. 옛 것을 좋아하는 박아博雅한 사대부들도 감히 한마디 트집을 잡지 못하고 한 점의 글씨라도 얻으면 고이 간직하여 보물로 삼았다.
회화에 대해선 공은 조촐히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여가에 때때로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공이 그림을 그릴 때는 오직 물체의 형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을 주로 했었지만 정신과 의태가 완전히 생동했다. 그 광운廣韻과 고치高致는 학문을 많이 쌓은 사람의 능력으로 미치지 못할 점이 있었다. 그림을 평하는 사람들은 고구려·신라 이래 본조本朝에 이르는 수천 수백 년 동안에 공재공의 경지에 능히 도달한 사람은 없었다고 논평했다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겨하는 마음은 청소년 시절부터 이미 그랬다. 아무리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한 가지 예능이라도 취할 점이 있으면 반드시 사랑하고 아끼며 다정하게 대했다. 이 때문에 귀인, ·천민賤民, 현자賢者우자愚者가 모두 좋아했다. 아는 사람은 그 덕德을 숭앙하여 경복敬服하며 모르는 사람은 그 재능을 보고 사모하고 좋아했다. 손님이 끊이지를 않아 섬돌에는 신발이 항상 가득했다. 혹 남들이 다 아는 선대先代의 혐오嫌惡가 있더라도 사귈만한 사람이라면 차별하지 않아 친한 사람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식견이 얄팍한 사람들이 비방할지라도 공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대저 사람을 취하는 도道는 문지門地·색목色目으로 구별하지 않고 오직 선택을 마음에 두었다. 남들이 경홀輕忽히 여기는 사람이라도 취하며, 여러 사람이 추장推奬하는 사람이라도 취하지 않았다.
혼인을 취하는 도는 귀세貴勢를 흠모하지 않고 빈부를 따지지 않았다. 오직 그 집안의 가법정품 행실이 어떤지만 보아서 선택했다. 또한 항상 집안사람에게 밀하기를 "모인某人은 심지가 이와 같으니 착한사람이며 모인은 지취가 이와 같으니 불길한 사람이다. 장래의 성패가 이러저러할 것이다.했다. 뒤에 조사해 보니 과연 공의 말한 것과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여러 차례 세변世變을 겪는 동안 고가와 대족 화망을 면치 못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공과 혼인한 집안은 하나도 연루된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공익 선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모두들 탄복했다.
공은 충헌공 이래 대대로 이어온 가법을 지켜 당시의 세속과는 매우 달랐다. 또한 이옥동 선생과 함께 예의禮儀를 연구하고 옛날엔 어떠했는지 조사하고 지금에는 어떨지 증험했다. 사례四禮이외에 집안에서 지내는 모든 의절儀節을 빠짐없이 모두 연구했다.
또한 공은 여러 아들을 이옥동 선생의 문하에 보내어 취학시켰다. 반드시 먼저 소학을 배우게 했고, 많이 읽어 외운 다음 다른 경서를 배우게 했다. 공부하는 동안 걸음걸이, 대답하는 법, 기거起居하는 법. 절하는 법 등을 아침저녁으로 배워 익히게 했다. 부형父兄을 모시고 있을 때는 의관을 단정하게 하도록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며 감히 떠들거나 장난하지 못하게 했다. 새벽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나서 부모님에게 문안을 드리게 했고, 저녁에 잘 때도 이와 같이 하게 했다 내기하는 도구는 감히 모으지 못하게 했으며, 시정배가 하는 상스런 말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했다. 과거를 공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의 자제들은 말씨와 행동을 보면 누구인가를 묻지 않아도 뉘 집의 자제인지 알 수 있었다. 도道에 어긋나는 바르지 못한 말은 아울러 배척 했다.
운명, 관상 등은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하지도 않으셨다. 무당들이기도하는 술術은 더욱 엄격히 금지했다. 우리 나라 풍속에 천연두를 두려워했다. 천연두를 앓는 환자가 있는 집은 으레 상탁床卓에 안주와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아침저녁 경건히 빌었다. 공은 항상 어리석고 사리에 밝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여겨 두신론痘神論을 지어 깨우치게 했다. 자기 집에 천연두가 전염되었으면 반드시 상탁을 철거시키니 노비들이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천연두에 다른 일은 없었다. 공의 집에서는 이것을 법으로 삼아 지금까지 그대로 시행하고 있다.
제사 지내는 절차는 충현공의 유법遺法을 한결같이 준수했다. 옛날과 지금 사이에 혹 다른 점이나 편의한 점이 하나 둘 있더라도 함부로 고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곤궁하여 부족할지라도 반드시 넉넉하고 깨끗하게 장만하여 정성과 공경하는 마음을 다했다. 혹 개인이 잡은 고기가 있으면 사서 쓰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물품에 금물禁物을 어떻게 바칠 수 있겠는가?"라고했다.
숙인 심씨께서는 80세가 넘도록 오래 살았다. 공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에 온갖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몸을 편안케 하는 도구와입에 맞는 음식은 빠짐없이 모두 마련했고, 그밖에도 어머니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있는 힘을 다하여 해드렸다. 비록 공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어머니께서 원하시면 그 뜻을 받들어 순종했다. 또한 금가琴歌·오락 등으로 부모님의 뜻을 맞추었다.
그러나 공재공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에는 풍검豊儉에 뜻을 두고 하는 것이라곤 없었다. 의복은 따뜻하고 두터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입는 것은 아주 얇은 홑옷이었다 비록 겨울 혹한이라고 할지라도 침실에 병풍을 치지 않고, 출입할 때에는 털옷을 입지 않았다. 음식은 기름지고 맛있는 것을 취하지 않고 담박淡泊한 것을 좋아했으며, 아침이외에는 봄·여름이라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 젊을 때는 주량酒量이 대단하여, 큰 잔을 연속으로 마셔도 주기자가 들지 않으셨다. 그러나 전부공이 일찍이 공에게 술을 경계하도록 권유한 뒤에는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만년에 술을 마시더라도 몸에 맞게 마실 뿐 취해 본 일은 없었다.
공재공은 일찍부터 마벽恥馬癖을 갖고 있어 항상 준마駿馬를 길렀다. 그러나 공은 자제들이 교외나 먼 곳에 출입하더라도 거의 모두 말을 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다. 한번은 공이 멀리 갔다 와야 할 일이 생겼는데, 마침 말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빌려서 타고 갔다. 여행 도중에 그 말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보고서야 비로소 역마인 줄을 알게 되었다. 공은 즉시 그 말을 주고는 줄곧 걸어서 여행을 다녀왔다. 그것은 말을 함부로 타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공의 가산傢産은 윗대로부터 계속하여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공에게 가산이 유족하여 행복하겠다고 부러워했지만 공은 조금도 손을 대어 재산을 불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질子姪이 점점 많아지고, 용도가 점점 넓어졌으며, 또한 시여施與를 좋아하여 남의 급함을 보살펴주고,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힘이 미치지 못함을 두려워했으며, 친지 가운데 가난하여 겨울 추운 때 옷이 없으면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이라도 벗어주기를 주저하지 않았으 므 로 도리어 재물이 부족함을 항상 걱정하게 되었으나 공은 태연자약했다
경주慶州에 사는 박태형朴泰亨은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의지할 곳 없는 고아였다. 공이 듣고 불쌍히 여기고 또한 그 사람됨에 취할 점이 있음을 보고 데려다 길렀다. 대접장에서 결혼한 뒤 그 부인이 공재공을 시아버지의 예禮로써 뵙고 부부 모두 부모처럼 공을 섬겼다 공재공이 돌아가셨을 때는 3년 동안 상제喪制노릇을 했다. 그의 자손 역시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재공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제수祭需보내왔으며, 평소에도 친족이나 다름없이 항상 찾아왔다. 이 사실을 듣는 사람은 모두 공의 의義를 높이 평가했으며, 또한 박씨가 대형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감탄했다.
이하제李河濟란 사람은 종실宗室 계림군桂林君의 아들이다. 성격이 강개하여 의기를 좋아했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그를 집안에 맞아들였다. 그 사람은 빈천했지만 재물에 악착스런 사람을 보면 침을 뱉으려 했다. 그러나 공에게만은 진심으로 존경하며 복종했다
그밖에 공재공이 의義를 존모 했던 풍문은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며 더 적지 못한다.
공은 교유交遊를 즐겨하지 않았다. 조용히 들어앉아 자수自守하면서 지냈다 문상이나 문병 이외는 밖에 나가지 않았고 손님이 방문해 오는 때에도 손에서 서책을 떼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고 할지라도 하루가 채 못되어 남김없이 열람할 수 있었다. 공재공은 패관소설稗官小說도 모두 읽어 지식을 넓히는 데 도움을 얻었다.
또한 중국의 지도와 우리나라의 지리서는 모두 그 내용을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지리의 대해서는 산천이 흐르는 추세와 도리道里의 멀고 가까움, 성곽의 요충지를 빠짐없이 자세히 파악했다 공은 그때 벌써 지도를 만들고 또 기록했으며, 지도상의 지점을 실제 다녀본 사람과 함께 책을 펴놓고 증험하면서 손바닥을 가리키듯 낱낱이 열거했다.
또한 여러 가지 공장工匠과 기교技巧를 모두 이해하여 그에 대한 감별에서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고, 공졸工拙에 대해서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한 가지 예능을 갖고 공의 집에서 일하면서 공의 가르침을 한 번 받으면 수법이 반드시 한층 더 진보할 수 있었다. 중국의 악기인 금슬琴瑟제도를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일찍이 옛 서적을 모두 조사하고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가미하여 칠현금七絃琴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는 당금唐琴과 비교해 보니 체제와 양식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또한 공은 손으로 또는 소노I-F와 망해도望海 를 만드셨다. 그뿐만 아니라 관복冠服·기명器皿등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져버린 기구를 모두 연구하여 그 내용을 서술해 놓았으니, 그대로 만든다면 금슬처럼 될 것이다.
공은 비록 당신은 겸허 했지만 명예가 날로 퍼져 부녀자 중들까지도 모두 칭송을 했다. 연세가 60세, 70세가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장로長老로 대접했으며 자신은 평민인데도 세상에선 공보세로서 기대했다. 마침 그때 요직에 있는 재상이 공의 이름을 조정에 천거했다. 이어서 병조兵曹를 맡고 있는 사람이 공을 장차 세마洗馬에 임명하려고 했다 공이 그 소식을 듣고 친한 사람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설득하여 병조의 계획을 중지시키니 그 계획이 마침내 취소되었다.
우리 나라 붕당朋黨의 화제는 이미 고칠 수 없는 폐단이 되어 버렸다
취사取捨, 선악善惡을 자신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낮췄다 높였다하여 세상에 옳고 그름이 없는지 이미 오래되었다. 충현공이 고충직도孤忠直道로써 하니 당시 사람의 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후세 자손이 선대先代를 위하여 드러내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마음 속에 맞고 안 맞음이 없어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굽혀 남을 따라 세상에 아첨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을 추장,,하는 말이 당시 재상의 입에서 나왔으니 세상의 공론은 속일 수 없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1712년에 숙인 심씨가 돌아가셨다. 공은 치상도구를 미리 준비해 두었는데 관과棺槨과 익금의 아름다움은 어느 점에서 보나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경사대부로부터 의역·서리에 이르기까지 앞을 다투어 조문하여 그 행렬이 거리를 메웠다. 조객弔客이 너무나 많아 사람들은 재상의 집이라도 이보다 더할수는 없다고 말했다. 숙인의 시신은 전부공의 묘에 합장했다
숙인의 대상大喪을 마친 뒤로는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 여러 식구를먹 여 살릴 계책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먹고살기 위하여 1713년 봄에 온 집안이 남쪽 해남으로 내려갔다. 연동蓮洞과 백포白浦에는 두 군데에 장庄이 있었다. 모두 전택田宅과 장호庄戶가 있었다. 백포는 큰 바다에 닿아 있어 풍기風氣가 매우 좋지 않았으 므 로, 두 곳의 장을 왕래하기는 했으나 거의 백련동에서 지냈다.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오니 친척들과 노복들이 모두 좋아하여 공을 떠받들었다.
남부지방의 풍속이 모질고 교활하여 거느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민들은 비록 관리의 명령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공의 말을 한번 들으면 감히 어김이 없었다. 평소에는 나이가 가장 어리고 천한 종이라고 할지라도 일찍이 이놈 저놈하고 부르는 일이 없었고, 반드시 이름을 불렀다. 혹 노비 중에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더라도 함부로꾸짖지 않았으니, 한마디의 가르침이 형벌보다 엄했다. 간혹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록 무거운 형벌을 주더 라도 사람들은 공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다
공은 젊을 때부터 연로할 때까지 아무리 급하고 졸지에 일을 당하더라도 말씀을 빨리 하거나 서두르는 빛이 없었다. 말씀을 할 때나 웃을때에나, 혹은 해학諧謔을 하실 경우에도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하시는 일이 없었다. 공은 밖 으로 나타난 용모와 말씨가 중후하고 존엄하시어, 자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의 염念이 일게 했다
그 해 마침 해일이 일어 바닷가 각 고을은 모두 곡식이 떠내려가고, 텅 빈 들판은 벌겋게 황톳물로 물들어 있었다. 백포는 바다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 재해가 특히 심했다. 인심이 몹시 흉흉하게 되어 조석간에 어떻게 될지 불안한 지경이었다. 관창에서 비록 구제책을 쓰기는 했으나, 역시 실제로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다. 백포의 장庄에 이르는 사방 산은 사람들의 출입이 없고, 또한 나무를 기른 지 오래 된지라 나무가 꽤 무성했다. 공재공은 마을 사람들을 시켜 합동으로 나무들을 벌채하고 소금을 구워 살길을 찾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한마을 수백호의 주민이 이에 도움을 받아 모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나, 떠돌아다니거나 죽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 일은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1714년 봄에 공재공은 백씨伯氏되시는 학생공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들었다. 학생공이 살아있을 때 형제라고는 단지 백씨와 중씨仲氏 두 분 뿐이었다. 그러므로 공재공이 남쪽해남으로 내려올 때 형제간에 서로 약속하기를 “몇 해를 참고 기다려서 집안 형편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게 되면 바로 북쪽으로 다시 돌아가 경기도 내의 조용한 곳을 택하여 형제가 모여서 살자 그곳에 함께 모여서 만년에는 매우 화락和樂하게 살아보자."고 했었다. 그러나 큰 흉년으로 농사가 잘 되지 않아 헤어질 때의 계획은 성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흉한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공재공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비탄에 잠겼다. 그러나 부모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조카들의 형편을 깊이 생각할 때 차마 멀리 떠날 수는 없었다. 공은 편지를 보내어 궤연 을 모시고 남쪽 해남으로 내려와 함께 살도록 했다. 그밖에 또 서울에 있는 여러 조카들도 모두 내려와서 옥천玉泉에 있는 장사庄舍에서 함께 지내게 하니, 그곳은 바로 옛날에 선조 지암공이 거주했던 곳이다. 공재공이 살고 있던 백련동과의 거리는 20리가 되었다. 공은 조카들이 이사 내려온 옥천장사 泉庄舍 로 달려가서 손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조카들이 이사를 오고 난 후로는 서로 끊임없이 오고가면서 지난날보다 더욱 다정하게 지내며 돌보아주었다.
공재공은 30여 세부터 이미 머리에 백발이 나타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 상중喪中에 있을 때 갑자기 형마저 여의게 되니, 비록 감정을 억제하고 슬픔을 참는다고 할지라도 머리에 백발만은 어쩔 수 없어 거의 절반이나 허옇게 되었다. 정력도 옛날에 비할 바가 안 되었다. 게다가 수질과 풍토 역시 몸에 맞지 않아 수 년 동안 편하신 날이 거의 없었다. 마음의 생기生氣가 손상됨이 아주 많았다. 공재공은 1715년 겨울에 우연히 감기를 앓다가 마침내 그 해 11월 26일 백련동의 옛집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48세에 불과했다
공이 돌아가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근遠近에 있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친척이 돌아가신 듯이 눈물을 뿌리며 슬퍼했다. 한 야로野老는 자기 친구에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공이 이제 이렇게 가신 것은 우리들이 복이 없는 탓입니다."고 했다. 산에 있는 한 스님이 소식을 듣고 탄식해 가로되 “속죄贖罪할수 있다면 내몸을 어찌 아끼겠는가”고 했다. 부음이 전해지자 서울에 있는 사우±友들은 서로 조상하며 밥을 먹지 않고 통곡해 마지 않았다. 이옥동 선생이 애사哀詞를 지어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선善하고 믿음성 있는 자세를 흠모했었고, 그대의 공명하고 평형한 의지를 존경했었네. 넓고 넓은 바다에서 그대의 모범적인 마음을 알 수 있었고, 화창한 봄 날씨에서 그대의 따뜻한 성정을 볼 수 있었노라. 나는 항상 그대 의 중국充國의 지혜를 생각했었고, 그대의 영공令公의 정성을 앙모했었다오. 그대의 절륜한 예능은 오히려 덕德을 가리었었고, 까닭 없이 중대한 명망을 숨기고 있었네
또한 1718년에 공재공의 묘를 이장할 때에도 옥동 선생은 제문을 지어 슬퍼했다. 그 제문의 대략은 이러했다.
슬픈 일이로다. 하늘은 이 세상을 편안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어찌 이다지도 빨리 공을 앗아갔단 말인가? 하늘은 이미 공에게 재상宰相의 국량局量을주고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장수의 재능을 주지 않았던가 공의 인후다하고 관홍寬弘한 덕德과 공평하고 정직한 의지, 그리고 주통周通하고 민달한 지혜, 굉박宏博한 지식, 또한 뛰어난예능을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공재공의 평생 약력의 대강은 다른 말을 기다리지 않고 단지 이 한편의 글로써 족히 후세에까지 전할 수가 있다
공재공은 평소에 문사文詞에 능한 선비로 자처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공이 지은 시문을 보면 감히 속유儲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공의 시문집으로는 사과·稿2권이 있다. 또한 일찍이 선대의 행적이 거의 없어지고 전하지 않기 때문에 공재공은 가정에서 보고들은 것과 노인들이 전하는 바를 수집하고 믿을 수 있는 문적들을 조사하고 의거하여 가승傢乘을 만들었다. 그밖에 선대의 유문遺文을 수집하여 한권의 책을 별도로 만들어 장차 인쇄하여 영원히 세상에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책이 완성되기 전에 공이 먼저 별세했으니, 빠진 것을 보충하여 계속 완성시키는 것은 자손들의 책임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우리 집안은 서울과 지방으로 이사를 다니느라고 문적들을 거의 잃어버렸다. 공재공의 유고遺稿2책 중의 1책과 가승家乘도 모두 잃어버렸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이듬해 봄에 강진康津 백도면白道面 간두리幹頭 보에 있는 귤정공의 묘 아래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1718에 가평嘉平 조종면朝宗面 원통산圓通山 아래로 이장했다. 대체로 공재공의 유의遺意가 남부지방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들로서는 감히 그 뜻을 저버리지 못하여 이처럼 새로 옮긴 것이다. 그 뒤에 풍수가들이 거의 모두 그 땅이 불길하다고 하기에 1729년 여름 김포金浦 강가 구복정龜伏亭으로 옮겼다. 또 손을 대는 사람이 있어서 1746년에 파주坡州 신속면新屬面 우미리牛尾里 사좌배 해향亥向되는 곳으로 옮겼다.
1752년에 종가에서 남부 1천리 밖으로 이사했다. 철따라 제사도 못지내고 벌채에 대한 금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산에 손을 대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여러 자손이 의논하여 1782년 봄 강진康津 덕정동德井洞으로 옮겼다. 겨울에 족인族人 흥호輿豪·상래商來·동도東都등이 자신들의 묘에 손을 댔다고 항의하여 13년 봄 연동에 있는 어초은공의 묘 아래 갑좌甲坐로 옮겼다. 그러나 그곳 또한 풍수가 좋지 않다고 하여, 1784년 초여름에 영암 옥천면玉泉面 죽천리竹川理 도림정辺林亭 갑좌甲坐 경향으로 다시 옮겼다. 첫째 부인을 왼편에 부장하고 둘째 부인을 오른편에 부장하여 모두 같은 무덤에 합장 했다.
첫째 부인 께서는 전주 이씨李氏인테 승지 동규同揆의 따님이다. 그 할아버님 되는 분은 좌의정 성구聖求이시며, 이조판서 수광晬光의 증손녀이다. 완원군完原君 권완權完의 외손이다. 첫째 부인께서는 160년에 태어났다. 1689년 10월 3일에 별세했는데, 생전에 2남 1녀를 두셨다. 비교적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행적이 자세히 전해져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양南陽땅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공재공의 묘와 함께 여러 번 옮긴 뒤 한 곳으로 모셨던 것이다
둘째부인은 완산完山 이씨李氏다. 부父는 의금부도사 형징衡徵이며,그 조부 되시는 분은 진사이며 참판을 증직받은 주하柱厦이다. 둘째부인께서는 1674년에 태어났다. 자질이 청숙淸肅하고 성도性度가 정한貞閑하여 숙부인 참판 병와甁窩와 이형상李衡祥 공이 양녀로 삼았다. 훌륭한 방법으로 교육시켰으며, 능히 숙철하여 반드시 좋은 베필을 구해 시집 보내려 했다. 그러다가 공제공의 덕기가 보통이 아님을 보고 사위로 삼고 드디어 윤씨 집안으로 시집보냈던 것이다
둘째 부인께서는 시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과 효도를 다했으며, 남편을 섬기는데 존경과 예의를 다했다. 첫째 부인이 낳은 두 아들에게 대해서는 특별히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자기 아들이 아닌 줄을 알지 못했다. 도의로써 자녀를 훈계하고 경과 예이로써 손님을 접대했으니 노복까지도 모두 좋아했다. 집안에는 화평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친척과 마을에서 모두 감탄하며 칭찬하기를 "참으로 군자의 어진 배필이로다."라고 감탄했다. 둘째부인께서는 공재공이 별세하신 다음 해인 1716년 5월 27일에 별세하셨다. 생전에 7남 2녀를 두었다. 공재공의 묘에 첫째 부인과 함께 세 분을 합장했다
낙서 윤덕희.







